[숲노래 책노래] 어버이


2013.8.5. 선물받은 시집을 앞짐에 챙겨서 두 아이를 데리고 순천으로 나들이를 간다. 시외버스에서건 어디에서건 살짝 틈을 내어 읽으려 한다. 그러나 바깥일을 보고 두 아이를 건사하느라 첫날은 한 쪽조차 못 펼치고, 이튿날 아침에 겨우 몇 쪽 펼쳤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시외버스에서는 작은아이를 무릎에 앉혀 재우면서 나도 곯아떨어지느라 바빠 더는 못 읽는다. 그나마 집으로 돌아와 짐을 풀면서 ‘아, 쉽게 꺼낼 수 있도록 앞짐에 시집을 넣고 나들이를 나왔네.’ 하고 깨닫는다. 아이가 하나만 있던 때에도 나들이를 다니면서 책을 읽기란 무척 힘들었다. 아이를 돌보거나 살피는 데에 힘을 쏟을 뿐이었다. 아이를 둘 데리고 다니며 1분이나 10초쯤 책을 손에 쥐어 펼치기란, 여섯 살 세 살 어린 아이들이니 아직 바랄 수 없는 노릇이려나 싶다. 작은아이가 일고여덟 살쯤은 되어야 나들이 다니는 길에도 슬쩍 책 한 자락 꺼내어 몇 분쯤 누릴 수 있을까. 아이들 데리고 다니는 아버지가 드물다. 아이들 데리고 다니며 짐에 책을 챙기는 아버지라면 훨씬 드물겠지. 아이들 데리고 다니는 어머니 가운데 짐에 책을 한 자락 챙기는 분은 몇 사람쯤 있을까. 아이들 건사하기에도 바쁠 텐데 책을 짐에 넣어 구태여 무겁게 들고 다니려 한다고 해야 할까. 덧없거나 배부른 몸짓이 될까. 아이들이 신나게 놀고 뛰고 노래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이야말로 살가운 책읽기가 되니, 어버이로서는 애써 종이책에 매이기보다 ‘아이책’ 또는 ‘삶책’을 한껏 누리자 여기면 될까.


2014.2.1. 아이들은 어버이가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지를 찬찬히 지켜본다. 그러고는 스스로 가만히 따라하곤 한다. 아이들이 쓰는 말이란 모두 어버이가 쓰는 말이요, 여기에 둘레 어른들이 쓰는 말을 곁들인다. 아이들이 누리는 놀이란 어버이가 누리는 놀이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먹는 밥이란 모두 어버이가 늘 먹는 밥이다. 네 살 작은아이가 그림책에 볼펜으로 금을 죽죽 그린다. 그림도 그린다. 무엇을 하는가 하고 지켜보니, 아버지가 책을 읽으며 하는 몸짓을 고스란히 흉내낸다. 아버지는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대목이 있으면 밑줄을 긋는다. 때로는 빈자리에 이런 생각 저런 느낌을 적어 넣는다. 아직 글을 모르고 읽거나 쓰지 못하는 작은아이인 만큼, 글씨 흉내를 꼬물꼬물 그림으로 보여준다. 큰아이는 두 살 적에 이런 금긋기와 그림그리기를 했다. 큰아이는 무엇이든 스스로 하려 했으니 두 살 적부터 아버지 흉내를 냈고, 작은아이는 누나가 언제나 잘 챙기거나 도와주기 때문에, 두어 해쯤 늦는다고 여길 만하다. 작은아이가 볼펜을 쥐고 ‘아버지가 안 보는 데’에서 몰래 책에 금을 긋고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참 예쁘다. 비록 책을 다 어저립히듯이 금을 긋고 그림을 그려서 “아이고, 보라야, 그림책을 하나 새로 사야겠구나.” 하고 말했지만, 이렇게 아이들이 ‘맨 처음’으로 금도 긋고 글(그림)도 그린 책은 오래오래 건사하며 애틋하게 되돌아볼 만하리라 느낀다


2015.10.21. 책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면, 책으로는 언제나 책 이야기를 할 수 있구나. 모든 책에는 저마다 이야기를 담기 마련이지만, 사람은 책을 길동무로 삼기는 하더라도, 삶은 책 바깥에서 이룬다. 아름다운 책을 읽더라도 아름다운 이야기는 책을 손에 쥐는 동안 흐른다. 책을 내려놓으면 삶은 책하고 다르다. 책에서 얻은 이야기가 삶에서도 흐르리라 여길 수 없다. 삶에서 누리는 이야기를 책에서도 함께 누리자고 여길 적에 비로소 책을 즐거이 맞이할 만하다고 느낀다. 책처럼 짓는 삶이 아니라, 삶을 짓듯이 책을 한 권씩 만나면서 즐겁게 노래하는 하루가 된다. 그러니까 인성교육이든 무슨무슨 교육이든 책으로는 할 수 없다. 가르침이나 배움은 오직 삶으로 할 수 있다. 직업교육이든 지식교육이든 학교에서는 할 수 없다. 오직 마을이랑 집에서 삶으로 할 뿐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학교는 삶터 구실을 하나도 못 하면서 오직 시험공부 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나? 언제쯤 이 수렁에서 헤어나오려나? 마을 이야기를 함께 짓는 학교라 한다면, 학교에서 인성교육이나 다른 여러 가지 교육을 할 만하다. 그러나 마을 이야기를 함께 짓지 못할 뿐 아니라, 마을하고는 동떨어진 채 ‘출퇴근하는 공무원’만 있는 학교라 한다면, 이 학교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책이 여러모로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사람다운 마음결로 나아가려고 하는 ‘인성교육’이라면, 모름지기 삶자리에서, 그러니까 어버이랑 아이가 이웃하고 동무를 아끼는 하루를 누려야지 싶다. 숲·나무·풀·꽃이며 온갖 벌레·새·뭇짐승에다가 바람·해·별·달·구름 모두를 헤아릴 수 있을 적에 비로소 따순 마음이나 고운 마음이나 착한 마음이나 너른 마음을 키우거나 가꾸거나 살찌울 만하리라 느낀다. 별 한 톨 못 보는 아이들이 무슨 착한 마음이 되겠는가? 바람 한 줄기 느끼지 못하는 어른들이 무슨 고운 마음을 가르치겠는가? 가을에 가을볕을 함께 쬐고, 겨울에 겨울노래를 함께 부를 적에 비로소 삶이요 교육이며 사랑이 된다.


2018.8.10. 흔들리는 버스나 전철에서 책을 읽는 사람이 있다. 바로 내가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열일곱 살부터 이런 책읽기를 했다. 열일곱 살이던 해에 어버이가 집을 옮기는 바람에 그때부터 고등학교를 두 다리 아닌 버스로 다녀야 했고, 버스로 한 시간 즈음 다녀야 하는 길에 언제나 한 손에 책을 쥐고서 ‘마음이란 무엇인가?’를 책을 거쳐서 읽으려 했다. 흔들리는 곳에서 책을 어떻게 읽을까? 흔들림에 맞추어 몸을 똑같이 흔들기에 얼마든지 읽는다. 흔들리는 곳에서 몸이 안 흔들리도록 하려면 책이며 눈이 다 흔들려서 글씨가 눈에 안 들어온다. 그러나 버스나 전철이 흔들리는 결하고 몸을 똑같이 맞추어 움직이면(흔들면), 눈은 책을 또렷이 바라보고 아무 흔들림 없이 책을 읽을 수 있다. 책을 읽을 적에는 오직 책만 바라본다. 다른 것을 바라볼 까닭이 없다. 창밖을 본다거나 버스·전철을 탄 다른 손님을 볼 까닭이 없다. 사내라는 몸을 입고 태어난 터라, 내 또래는 버스를 타면 으레 ‘가시내라는 몸을 입고 태어난 여학생’을 흘깃거리던데, 나는 그런 흘깃질에 마음이 없었다. 거꾸로 내 또래 가운데 책읽기에 마음이 있던 아이를 만나지 못했다. 아마 또래들 눈으로는, 내가 참 어이없거나 바보스러웠으리라. 책읽기를 오래 하다 보니, 이제는 1000쪽에 이르는 책도 몇 분이나 몇 초 만에 읽어낼 수 있다. 1000쪽이건 2000쪽이건 이러한 책에 깃든 참거짓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무슨 심령술사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숲에 깃들어 숲을 늘 마주하면서 숲을 읽으려 한다면, 숲을 척 보아도 숲이 아픈지 튼튼한지 바로 알아챈다. 나는 책으로 내 마음읽기를 어릴 적부터 했기에, 어느 책을 보든 이 책을 쓴 분이 ‘무엇을 바라보고 바라며 책을 냈는가’를 마음으로 읽는다. 이를테면, 돈을 바라보았는지, 이름값을 바라보았는지, 교수 자리를 바라보았는지, 티없는 넋으로 이웃한테 앎을 나누려 했는지, 즐겁게 배움길을 걸으며 깨달은 슬기를 벗한테 알려주고 싶은지, 어설피 짚은 헛다리가 헛다리인 줄 모르고 자랑을 늘어놓으려 하는지 …… 들이 책 겉종이만 보아도 한눈에 들어오더라. 그런데 퍽 오랫동안 놓친 대목이 있다. 책을 보며 책을 읽어낼 줄 아는 눈이라면, 사람을 보며 사람을 읽어낼 줄 아는 눈으로도 옮아 가야 아름답겠지? 이 눈으로 살림과 삶과 사랑을 읽고 알아내며 즐겁게 꽃피우는 눈으로도 옮겨 가야 기쁘겠지? 그러니까, 나는 책으로 마음을 읽는 눈을 키우기는 했어도, 그 다음 길을 어떻게 간다든지 새로 지필 만하다는 대목을 못 느끼거나 생각을 않은 채 살았더라. 열일곱부터 걸어온 이 길이 어느 고비를 맞이한 요즈음 아주 짤막한 말 한 마디가 벼락처럼 가슴으로 스민다. “더 할 수 있습니다”라는 한 마디. 이 말을 들려준 분은 나더러 책을 앞으로 어떻게 읽으라거나, 여러 마음닦기나 몸닦기를 어떻게 다스리라고 이끌거나 가르치지 않았다. 그저 다른 여러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이 한 마디 “더 할 수 있습니다”를 들려주었을 뿐. 나는 이 한 마디를 듣고 먼저 물속에서 내 몸을 새롭게 맞추어 보았습니다. 눈을 뜨고 골짝물에 잠겨 숨을 일곱걸음 내뱉아 보았다. 세걸음 내뱉기까지는 어렵잖이 되는데, 네걸음을 내뱉으려니 문득 숨이 막히네. 이때에 “더 할 수 있습니다”를 떠올리며 몸에 그렸고, 그 뒤 거침없이 물속에서 숨을 내뱉을 수 있더라. 냇바닥에 착 가라앉아서 달라붙은 몸 둘레로 온갖 물고기가 맴돌면서 ‘반가워, 잘 왔어. 우리 같이 놀자.’ 하고 속삭여 주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 몸에는 끝이 없다. 우리 몸은 이 몸뚱이에 끝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우리가 마음으로 끝이 있다는 생각을 씨앗 한 톨로 심으면 몸은 이대로 따라간다. 우리가 마음으로 끝이 없다는 생각을 다시 씨앗 한 톨로 심으면 몸은 또 이대로 따라간다. 무엇을 먹어야 튼튼해지지 않겠지. 무엇을 안 먹어야 튼튼해지지 않을 테고. 먹든 말든, 마음이 기쁨인지 두려움인지 살필 줄 알아야지 싶다. 하든 안 하든, 하다가 그치든 끝까지 해보려 하든, 제대로 바라보아야지 싶다. 우리는 어디를 보는 책읽기를 할까? 우리는 무엇을 바라는 마음읽기를 할까? 우리는 어떤 사랑으로 나아가려는 꿈읽기를 할까? 길은 늘 우리 마음에 있고, 길을 바라보는 눈은 언제나 스스로 머리를 어떻게 틔워서 가슴을 어떻게 여는가에 달린 노릇이지 싶다.


2019.6.28. 어버이는 두 가지 말을 아이한테 들려주는 사람. 첫째, “가! 신나게 가! 마음껏 가! 하고픈 대로 가!” 둘째, “그만! 멈춰! 다툼은 그만! 다툼은 멈춰! 미움은 그만! 미움은 멈춰! 시샘은 그만! 시샘은 멈춰! 히죽질은 그만! 히죽질은 멈춰! 괴롭힘질은 그만! 괴롭힘질은 멈춰!” 어버이는 아이가 스스로 나아갈 길을 신바람을 내며 가도록 북돋우다가도, 아이가 스스로 벼랑에서 굴러떨어지려 할 적에 멈춰세우고는 이다음 걸음을 스스로 어떻게 하라고 짚어 주는 곁사람이지 싶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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