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읽는어른' 2019년 6월호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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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이야기꽃
세걸음 ― 하얀 딸기꽃 곁에 “비슷한말 사전”
2016년에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이라는 사전을 써냈습니다. 글종이로 5000쪽(원고지 5000장) 남짓인 꾸러미를 글꼴을 줄이고 엮어 500쪽이 채 안 되게 내놓았습니다. 고작 글종이 5000쪽만큼 사전으로 꾸렸기에 1000낱말 남짓 다루었는데, 사전 짓는 길을 스물 몇 해를 산 끝에 처음 선보인 사전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비슷한말 2》을 선보이고 싶었으나 목돈을 들여야 하는 일감인 터라 아직 엄두를 못 냅니다.
‘비슷한말’이란 비슷해 보이지만 막상 다른 말입니다. 다른 말은 다르기에 ‘닮다’랑 ‘비슷하다’를 섣불리 섞어 쓸 수 없고 ‘힘’하고 ‘기운’을 함부로 뒤섞을 수 없어요. ‘자라다’하고 ‘크다’도 비슷하지만 다른 말이에요. ‘즐겁다·신나다·기쁘다·신바람나다·흐뭇하다’는 비슷해 보여도 결이나 쓰임이 다른 낱말이니, 어떻게 얼마나 다른가를 찬찬히 밝히는 몫을 사전이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철수와영희, 2016) 464∼465쪽
휘다·굽다·꺾다·부러뜨리다
→ ‘굽다’는 몸이나 어느 한쪽을 ‘접은 뒤에 다시 펼 수 있을’ 때에 쓰는구나 싶고, ‘휘다’는 몸이나 어느 한쪽이 ‘접힌 뒤에 다시 펴지 못할’ 때에 쓰는구나 싶습니다. 마주 붙거나 닿는 쪽으로 가게 하기에 ‘접다’라 합니다. 몸이나 어느 한쪽이 마주 붙거나 닿는 쪽으로 갔다가도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기에 ‘굽다’요, 마주 붙거나 닿는 쪽으로 갔다가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기에 ‘휘다’라 할 만합니다. ‘팔굽혀펴기’라고 하듯이 “팔을 굽혔다 폈다”처럼 씁니다. “팔이 휘었다”고 하면 팔이 한쪽으로 접혀서 다친 모습을 가리킵니다. 이리하여 “나뭇가지가 휘었다”처럼 쓸 뿐, “나뭇가지가 굽었다”처럼 쓰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허리가 휘게 일을 하다”라고는 말을 하지만 “허리가 굽게 일을 하다”라고는 안 합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는 옛말이 있으나 “팔은 안으로 휜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를 미루어 살피면, ‘굽다’는 ‘굽고 펴다’와 맞물리면서 쓰는 낱말이고, ‘휘다’는 안쪽으로 접지 않고 바깥쪽으로 접는 모습을 가리키는 낱말이라 할 만합니다 …….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에서 ‘휘다·굽다·꺾다·부러뜨리다’를 꾸러미로 다룬 모둠풀이 첫자락을 옮겨 보았는데요, 여느 사전은 이 낱말을 돌림풀이·겹말풀이로 다룹니다. 《보리 국어사전》 한 가지만 들어 보겠습니다.
* 《보리 국어사전》 뜻풀이
[휘다] 곧은 것이 힘을 받아 구부러지다
[구부러지다] 한쪽으로 굽거나 휘어지다
[굽다] 1. 한쪽으로 휘거나 꺾이다 2. 한쪽으로 휘어 있거나 꺾여 있다
[꺾다] 1. 어떤 것을 구부려서 부러지게 하다 2. 허리, 팔, 다리 들을 구부리거나 접다
사전은 말을 읽고 제대로 배워서 삶을 새롭게 돌아보도록 이끄는 디딤돌 같은 책이라고 여깁니다. 드문 말이나 어려운 말보다는, 쉽고 흔하다 싶은 낱말부터 제대로 옳게 알맞게 즐거이 풀이하고 다룰 노릇이라고 여깁니다. 낱말을 더 많이 실을 사전이 아닌, 사전에 실은 낱말부터 꼼꼼히 알뜰히 여미어야지 싶어요.
사람들은 흔히 ‘어려운’ 낱말을 사전에서 찾아봅니다만, 어려운 말이 아닌 ‘쉬운’ 말이나 ‘흔한’ 말을 신나게 찾아봐야지 싶습니다. 사전까지 찾아봐야 하는 ‘어려운’ 말이라면 처음부터 안 써도 될 말은 아닐까요? 늘 쓰고 자주 쓰며 으레 쓰는 ‘쉽고 흔한’ 말일수록 참뜻·제뜻·속뜻을 찬찬히 짚으면서 알맞고 즐겁게 쓸 노릇 아닐까요?
외국말을 어떻게 배워서 쓰는가를 생각해 보면, 어려운 외국말부터 배우지 않아요. 가장 쉽고 흔한 외국말부터 온갖 결이나 쓰임을 헤아려서 낱낱이 따지고 깊이 익히려 하지요. 어린이가 말을 어떻게 배워서 쓰는가 하면, 어려운 말부터 듣거나 익히지 않아요. 어린이는 가장 흔하고 쉬운 말부터 즐겨듣고 즐겨말하면서 신나게 살려서 씁니다.
어린이가 제 나라 말을 익힐 적에도, 어른이 외국말을 익힐 적에도, 언제나 살림말이나 삶말, 그러니까 가장 쉽고 흔하게 주고받으면서 생각을 펴고 마음을 여는 이야기에서 바탕이 될 말을 진득하게 꾸준하게 오래오래 차근차근 바라보고 되새기면서 온몸으로 받아들여요. 쉬운 말을 제대로 알아야 말도 글도 제대로 일어서는 셈입니다.
*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뜻풀이
[휘다] 1. 한쪽으로 기울거나 쓰러지다 (마주 붙거나 닿는 쪽으로 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올 수 없다는 느낌으로 쓴다) 2. 뜻·마음·생각을 다른 쪽으로 바꾸거나 내려놓다
[굽다] 1. 한쪽으로 기울다 (곧지 않다, 마주 붙거나 닿는 쪽으로 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고 할 적에도 쓴다) 2. 뜻·마음·생각을 다른 쪽으로 바꾸거나 내려놓다
[꺾다] 1. 길고 단단한 것을 동강이 나게 하다 (다시 펴지지 않거나 아주 끊어지게 하다) 2. 가는 길을 다른 곳으로 바꾸거나 돌리다 3. 몸통이나 몸 한쪽을 어느 한 곳으로 기울도록 하다 (‘굽히다’처럼 마주 붙거나 닿는 쪽으로 가도록 한 뒤에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는 느낌으로 쓴다) 4. 한쪽으로 기울게 해서 겹치다 (접다, 한쪽으로 가서 마주 붙거나 닿도록 하다) 5 …….
돌림풀이·겹말풀이 없이 새로 뜻풀이를 붙이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차근차근 해보면 되지요.
우리는 세 살 어린이한테 어떤 말을 어떤 마음으로 들려줄까요? 어린이한테 무엇을 가르치기 앞서, 우리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어린이에 앞서 어른부터 스스로 말 한 마디를 제대로 삭이고 익히고 가다듬어서 살림꽃으로 펼 적에 즐겁지 않을까요? 가게에 삼백예순닷새 내내 놓인 빨간 딸기가 아닌, 오월이 무르익어야 비로소 열매를 누리는 딸기알인 줄, 우리 어른부터 스스로 느끼고 누리면서 어린이하고 딸기 열매를 맛볼 적에 훨씬 신나리라 느껴요.
서로돕기, 같이돕기, 함께돕기 ― 상부상조, 상호원조
서로좋아, 같이좋아, 함께좋아, 좋아좋아 ― 윈윈, 상승효과
사전에 없는 말이어도 ‘서로돕기’랑 ‘같이돕기’ 같은 말을 혀에 얹습니다. ‘서로좋아’하고 ‘함께좋아’ 같은 말도 슬그머니 종이에 적어 봅니다. 어깨동무하듯이 서로 즐거울 말을 머리에 담고 눈에 얹고 가슴에 싣고 두 손에 놓고 곁에 모시고 싶습니다.
이러면서 슬쩍 새말을 지어요. 어떤 말인가 하면, ‘딸기알빛’하고 ‘딸기꽃빛’입니다. 딸기알은 새빨가니까 ‘딸기알빛 = 새빨강’이요, 딸기꽃은 새하야니까 ‘딸기꽃빛 = 새하양’이에요. 유월로 접어들 즈음 찔레꽃이며 감꽃이 피어나요. 감알은 바알갛거나 새빨갛습니다. ‘감알빛’이라 하면 어떤 빛깔이 될까요? ‘말랑감알빛’하고 ‘단감빛·단단감알빛’처럼, 우리 몸에 기쁜 숨결이 되는 감알을 더 찬찬히 바라보면서 새 빛깔말을 쓰면 어떨까요.
붉게 열매를 맺는 감이지만, 꽃은 마알갛습니다. ‘말갛다’하고는 다른, 마알가면서 하이얗고, 살풋 노르스름한 감꽃이에요. 고욤꽃도 살짝 비슷하지요. 소한테서 얻는 젖인 소젖, 한자말로 하자면 ‘우윳빛’이란 ‘감꽃빛’이나 ‘고욤꽃빛’이지 싶습니다.
‘화이트’나 ‘백색’을 쓰지 말자고 하기보다는, ‘딸기꽃빛·감꽃빛·찔레꽃빛·앵두꽃빛’처럼 우리 곁에서 상냥하며 곱다시 피어나는 숨결을 헤아리는 빛깔말을, 새빛을, 숨빛이며 꽃빛을 조용히 눈을 감고서 품어 봅니다. 이 빛깔말을 품는 마음으로 도요새이며 저어새이며, 온갖 철새가 이 나라 새파란 바다로 찾아와서 마음껏 날갯짓하면 좋겠어요.
* ‘어린이’ 뜻풀이
[보리 국어사전] 나이 어린 사람. 흔히 네다섯 살 먹은 아이부터 초등학교에 다닐 만한 아이까지를 이른다. (같은말 : 아동)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어린아이’를 한결 곱게 바라보거나 아끼려고 가리키는 말. 놀며 배우고 사랑하는 살림을 짓는 하루가 되려고 이 땅에 태어난 사람 (나이로만 치자면, 갓 태어난 때부터 열 살을 지나 열두어 살 즈음까지 ‘아이’라고 일컫습니다. 너덧 살 즈음부터 열두어 살 즈음까지는 따로 ‘어린이’라 일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 아이”나 “우리 아이”처럼, 어버이가 이녁 딸아들을 가리킬 적에 ‘아이’라는 낱말을 쓰지만, ‘어린이’는 어버이가 낳은 딸아들을 가리킬 적에는 못 씁니다)
사전은 ‘단어장’ 아닌 ‘풀이하는 이야기책’이지 싶습니다. 어린이를 어린이답게 보려는 뜻으로 ‘어린이’를 새롭게 풀이해 보았습니다.
최종규(숲노래) : 한국말사전 짓는 사람
‘사전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리고, 한국말사전을 새로 쓰는 길을 걷는다.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내가 사랑한 사진책》,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자전거와 함께 살기》, 《책빛숲》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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