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짓는 글살림

32. 실컷



  고흥읍에 볼일을 보러 가서 걷습니다. 세거리 한켠에 있는 밥집에 적힌 글월이 문득 보입니다. “무한리필(1인).” 우리 집 어린이는 이 글월을 못 알아봅니다. 적히기로는 틀림없이 한글이로되 ‘한국말’로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 집 어린이하고 “무한리필 고깃집”에 간 적이 없어서 이 말을 모를 수 있어요. 그러나 그곳에 간 적이 있든 없든 ‘무한리필’이라는 글월은 어른들이 썩 잘 지어서 쓰는 말씨가 아니라고 느낍니다. 어설프거나 서툴거나 엉성하거나 어리숙하거나 얕거나 모자란 채 쓴 말씨라고 느껴요. 또는 깊은 마음이나 사랑이 없는 채 그냥그냥 쓰는 말씨라고도 할 만합니다.


 실컷 먹으렴

 마음껏 먹자

 얼마든지 먹어

 배불리 먹으렴


  조금만 생각해도 ‘무한리필’이란 말씨가 퍼지기 앞서 우리가 어떤 말을 썼는지 알아낼 수 있습니다. 고깃집에서든 어디에서든 알맞을 뿐 아니라 아름답거나 즐겁거나 사랑스러운 마음을 나눌 만한 말씨를 헤아릴 수 있어요.


 먹고 싶은 대로 먹자

 먹고픈 대로 먹자


  가만 보면, 어느 풀그림에서 ‘무한도전’이란 이름을 써요. 끝없이 부딪힌다는 뜻으로 ‘무한도전’일 텐데, “끝없이 부딪히기”처럼 수수하게 이름을 쓸 수 있습니다. 짧게 네 글씨로 쓰고프다면 ‘끝장보기’이라 써도 어울립니다.


  어느 이름이든 처음부터 어울리거나 마음에 들 수 있어요. 때로는 쓰고 쓰면서 어울리는구나 싶거나 마음에 들곤 해요. 멋들어진 이름을 곧장 지어내어 널리 쓰기도 하지만, 수수하구나 싶은 이름을 지어서 쓰는데 시나브로 멋이 살아나면서 담뿍 사로잡히기도 해요.


  어떻게 먹으면 좋을까요? ‘배불리’ 먹을 수 있어요. ‘실컷’ 먹거나 ‘마음껏’ 먹을 수 있어요. 고깃집에서는 “배불리 드셔요”나 “실컷 드셔요”나 “마음껏 드셔요” 같은 이름을 내붙일 수 있습니다.


 세거리·네거리·닷거리


  길거리는 한길로 곧게 나기도 하지만, 두 갈래로 퍼지기도 하고, 세 갈래나 네 갈래로 벌어지기도 합니다. 이때에 저는 ‘세거리·네거리·닷거리’라 말해요. 셋으로 갈리니 ‘세거리’이고, 다섯으로 갈리니 ‘닷거리’예요.


  자동차를 얻어타서 함께 갈 적에도 으레 ‘세거리’나 ‘네거리’라 말하는데, 이렇게 말하면 자동차를 몰던 분은 못 알아듣곤 해요. 그래서 ‘사거리·오거리’로 다시 말하기도 합니다. 한국말 ‘셋·넷·닷(다섯)’이 어려울까요? 아니면 우리는 한국말로 숫자를 세거나 거리를 읽는 눈썰미가 아직 없을까요? 길거리를 한국말로 읽을 줄 모르거나, 이렇게 읽는 깜냥을 익힌 적이 없는 셈일까요?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 둘이라 ‘두길(이차선)’이라 하고, 길이 셋이라 ‘세길(삼차선)’이라 하며, 길이 넷이라 ‘네길(사차선)’이라 합니다. ‘두길·세길·네길’은 교통방송 같은 곳에서 쓸 수 없는 말씨일까요, 아니면 앞으로는 쓸 수 있는 말씨일까요?


  이제 다들 아무렇지 않게 쓰는 ‘나들목’ 같은 이름은 1990년대가 저물 즈음 비로소 퍼져서 자리잡았습니다. 그래도 아직 영어로 ‘IC’나 ‘인터체인지’를 쓰는 분이 꽤 있습니다. 입이나 손에 붙은 말씨를 못 털어낸달 수 있고, 스스로 생각을 가누어 씩씩하게 새로운 말씨로 거듭나려는 몸짓이 못 된달 수 있습니다.


  꼭 이 말을 써야 하지 않습니다. 이 말에 얽힌 삶하고 살림을 헤아리면서 이 말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몸으로 녹여낼 적에 스스로 마음이며 삶이며 살림을 새롭게 가꾸는 길을 열 만합니다.


  집에서 살림하는 사람을 두고 ‘가정부’나 ‘주부’란 이름을 그냥그냥 쓰는 분이 많습니다만, 가시내뿐 아니라 사내 스스로 집에서 살림하는 길을 걷는다면 이런 말씨를 하루아침에 털어낼 만하리라 여겨요. 생각해 봐요. ‘가정부·주부’는 가시내만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사내가 집에서 살림을 한다면 이 이름이 안 어울릴 테지요. 그러면 어떤 이름을 쓰면 좋을까요?


  예부터 쓰던 ‘살림꾼’을 쓰면 되어요. 집에서 짓는 살림을 즐겁고 슬기로우며 사랑스레 마주할 줄 안다면, ‘살림꾼’이란 이름을 ‘살림님·살림지기’처럼 손질해서 쓸 수 있어요. 때로는 ‘살림순이·살림돌이’처럼 쓸 수 있고요.


 시골순이·시골돌이


  어느 책을 읽는데 ‘촌부’란 낱말이 나옵니다. ‘촌부’는 뭘까요? 사전을 살피면 ‘촌부(村夫)·촌부(村婦)’ 두 가지가 있네요. 한자를 달리 적으면서 두 사람을 가리킨다는데요, 시골에서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또는 시골에서 지내는 아주머니 아저씨를 ‘촌부(村夫)·촌부(村婦)’라 가리키는 이름이 어울릴까요, 아니면 ‘할아버지·할머니’라 하거나 ‘아저씨·아주머니’라 할 적에 어울릴까요?


  때로는 ‘할배·할매’나 ‘할아방·할마씨’라 할 수 있겠지요. 고장마다 달리 쓰는 말씨를 살려서 할아버지나 할머니나 아저씨나 아주머니를 가리킬 만해요.


  글을 쓰는 분들은 글멋에 빠진 나머지, 몸으로 살림을 지으면서 입으로 나누던 수수한 말맛을 잊기 일쑤입니다. 우리 곁에 있는 고운 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시골에 사는 사람을 두고 ‘시골순이·시골돌이’라 할 수 있어요. ‘촌년·촌놈’이 아니고 말이지요. 이와 맞물려 서울에서 사는 사람을 두고도 똑같이 ‘서울순이·서울돌이’라 할 만합니다.


 살림말


  책으로 배운 분은 곧잘 ‘생활어·생활언어’를 이야기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어쩐지 귀가 간지럽습니다. ‘생활어·생활언어’는 도무지 삶이나 살림이나 살갗에 와닿지 않아요. 어쩌면 삶이며 살림이며 살갗하고 동떨어진 말씨가 ‘생활어·생활언어’ 같은 모습이리라 느낍니다. 이런 말씨를 쓰는 분들은 삶하고 너무 먼 탓에 삶을 고스란히 담는 말을 느끼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나타내지도 나누지도 사랑하지도 못하는구나 싶어요.


  살림을 하면서 짓거나 쓰거나 나누기에 ‘살림말’입니다. 삶을 누리거나 짓거나 가꾸면서 쓰기에 ‘삶말’입니다.


  여기에 다른 말을 더 헤아리고 싶어요. 무엇보다 서로 사랑을 하면서, 스스로 사랑을 길어올리면서 ‘사랑말’을 쓰고 싶습니다. 함께 짓거나 스스로 이루려는 꿈을 바라보면서 ‘꿈말’을 쓰고 싶어요.


  잘잘못을 가다듬거나 손질하는 ‘손질말(순화어)’이 있어요. 손질해서 써도 좋지요. 그런데 어떤 말을 이래저래 손질하거나 말거나, 언제나 밑바탕에는 살림하고 삶하고 사랑을 두어야지 싶습니다. 살림꽃을 피우듯 말을 하고, 삶꽃을 나누듯 말을 하며, 사랑꽃으로 잔치를 벌이듯 말을 하면 좋겠어요.


  일부러 멋스러이 말을 하거나 글을 쓰지는 않기를 빕니다. 살림하듯 말을 해요. 살아가는 결을 고스란히 말로 담아요. 그리고 사랑하는 손길이며 눈길이며 마음길이며 발길이며 몸길이며 꿈길로 글 한 줄을 써요. ㅅㄴㄹ


숲노래 : 전남 고흥에서 ‘사전 짓는 책숲’을 가꾸면서 한국말사전을 새로 쓴다. 《우리말 동시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같은 책을 썼다. hbooklov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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