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 장마, 종로에서
대학교를 다닌 일을 씁쓸하게 돌아보지는 않는다. 비록 대학교가 사람을 사람다이 가르치는 구실을 못 한다고 느껴 그만두었어도, 1994년에 대학교라는 곳에 들어갔기 때문에 ‘정태춘 박은옥 노래’를 만났고, ‘사전 심의 없애기’를 바라는 뜻으로 내놓은 노래꾸러미를 대학교 앞 책집에서 살 수 있었다. ‘사전 심의’를 거치지 않은 노래꾸러미였으니 나라에서 승인을 안 했고 여느 음반집에서는 다룰 수 없었으나, 이 노래꾸러미를 대학교 앞 인문책집에서는 팔았다. 땅밑에 있던 신문사지국에 하나 있는 카세트라디오에 ‘정태춘 박은옥 노래꾸러미’를 꽂아서 조용히 들을라치면 지국장님이나 형들은 “야, 소리가 작아. 소리 좀 키워.” 하면서 다 같이 크게 듣자고 했다. 노래꾸러미 앞쪽이 끝나고 뒤쪽으로 넘어가도, 다시 앞쪽으로 넘어와도 다들 노랫가락에 마음을 담으면서 들었다. 하도 틀어대느라 카세트테이프는 늘어졌고, 한 벌 새로 샀고, 다시 한 벌 새로 사서 들었다. 이런 노래를, 나라에서는 받아들이지 않겠다던 노래를, 바보스러운 심의 규정을 허물려고 온힘 다한 노래를, 2019년 봄날 ‘알리’라는 젊은 노래지기가 새삼스레 불렀다. 이 노래를 알아보고 방송에서 씩씩하게 부른 젊은 노래지기는 얼마만일까? 모든 노래지기가 이 노래를 알아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꽃으로 피어나는 꿈을 품은 씨앗 같은 노래를 목소리로 새로 담은 노래지기가 있으니, 살짝 찡하다. 씨앗은 따순 손길을 받아 꽃으로 깨어난다. 2019.4.4.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https://tv.naver.com/v/5883571/list/331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