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3
학교에 도서실이 생겼다. 도서관은 아니고 도서실이지만 반갑다. 이제는 읽고 싶은 책이 있을 적에 사서 읽는 값을 좀 아낄 수 있겠다고 여겼다. 그런데 처음에는 동무들이 바글거리던 도서실이다가, 나날이 발길이 끊어진다. 그럴 만하지. 새로운 책을 들이지 않으니 그다지 볼 것이 없기도 하고, 시험공부로 바쁘니 책을 읽을 틈을 누가 낼 수 있겠나. 1993.6.18.
도서관 4
인천 배다리에서 헌책집을 꾸리는 〈아벨서점〉 곽현숙 아주머니가 이레째 전화를 거신다. 첫날에는 인천시가 ‘왕복 16차선 산업도로’ 막삽질을 주민 몰래 밀어붙이려 하는데, 마을 아줌마 세 사람 힘만으로 이런 삽질을 막아내기 벅차다는 하소연이었고, 이튿날부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으시고, 다른 사람이 써 줄 일이 없을 듯해서 책집 아주머니가 손수 글을 써서 시청하고 구청에 보내려 하는데 어떡해야 하느냐고 물으시더니, 다음날에는 셈틀을 장만하셨는데 어떻게 켜야 하느냐고 물으신 뒤에, 다음날에는 이제 셈틀을 켜고 끌 줄은 알겠는데 글쓰기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으신다. 이윽고 글을 다 썼는데 어떻게 저장하는지, 저장한 글은 종이에 어떻게 뽑아야 하는지, 그래서 인쇄기가 있어야 한다고 여쭈니 이튿날은 인쇄기를 샀는데 뭘 어떻게 이어서 어떻게 뽑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 인천하고 충주 사이에서 이레째 날마다 몇 시간씩 전화로 이야기를 하다가 대뜸 여쭌다. “저기, 아벨 아주머니.” “응? 왜?” “저한테 뭐 하실 말씀 있지 않아요?” “글쎄, 무슨 할 말이 있다고 그런가.” “날마다 몇 시간씩 이렇게 전화로 물어보시잖아요.” “그게, 곁에서 이런 말을 물을 젊은 친구도 없고, 도와줄 만한 사람도 없어서.” “사람이라면 제가 있는 이곳, 이오덕 어른이 살던 무너미마을 시골에 사람이 없지요. 여기에는 젊은이가 저 하나만 있는걸요.” “그야 그렇지. 사람은 도시에 많지.” “아무래도 아벨 아주머니한테는 곁에서 심부름을 해줄 만한, 도울 사람이 있어야겠지요?” “그런 젊은 사람이 있으면 좋지. 환영이지.” “저도 마침 이곳에서 이오덕 어른 글을 갈무리하는 일을 마쳤어요. 이 일을 마친 이제 앞으로 무엇을 하면 좋을는지 저 스스로도 몰라서, 지난 한 해 동안은 오로지 자전거만 달렸어요.” “그래, 그랬다면서?”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철을 꼬박 자전거로만 충주하고 서울 사이를 이레마다 다녔어요. 이레마다 서울마실을 하며 책을 잔뜩 장만해서 무너미마을로 낑낑대며 싣고 돌아왔는데요, 이제 이 자전거질은 그만하려고요. 제가 인천으로 가면 되겠지요?” “응? 인천으로 온다고? 거긴 어쩌고?” “이오덕 어른 큰아드님은 저더러 여기서 살라고 집도 하나 지어 주셨지만, 아무래도 이곳은 제가 있을 곳이 아닌 듯해요. 그리고 이제는 저도 텃마을인 인천으로 돌아가서 인천에 이바지할 일을 하나쯤은 할 때가 되었지 싶어요. 무엇보다도 아벨 아주머니가 사랑하고, 저도 무척 사랑하는 배다리를 지키자면 한 사람 손이 더 있으면 좋으리라 생각해요.” “아, 자네가 와주면 든든하지. 아주 든든한 일꾼이 하나가 생기는 셈이지.” “네. 그런데 가더라도 바로 갈 수는 없어요. 여기에 그동안 그러모은 책을 다 싸야 하거든요.” “그렇지. 그 책더미를 싸야 움직일 수 있겠지.” “제가 텃마을 인천으로 돌아간다면 그냥 돌아가고픈 마음은 없어요. 그렇다고 대단한 일을 벌일 수는 없겠지만, 또 헌책방거리에 헌책방만 있기보다는 다른 책터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래, 인천이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한 도시처럼 보이지만, 막상 속은 부실해. 도서관도 아직 제대로 없다고.” “네, 그래서 저는 배다리로 돌아가서 도서관을 해볼까 생각해요.” “도서관? 아, 도서관 좋지. 배다리에 도서관이라. 참 좋네, 좋아.” “그런데 그냥 도서관을 하지는 않을 생각이에요. 그냥 도서관은 어디에나 있거든요.” “그럼 무슨 도서관을 해보려고?” “네, 제가 1999년에 보리출판사에 들어가서 영업 일을 했거든요. 그때에 다달이 통계를 뽑아요. 우리 출판사에서 다달이 팔린 책을 어느 책이 전국 어디에서 얼마나 팔렸는가를 뽑아서 달모임에서 밝히는데, 전국 통계를 보면 인천이 가장 책이 안 팔린 곳이에요. 전라도보다 훨씬 적게 팔려요. 아주 부끄럽더라구요. 다른 출판사 영업부 선배한테 여쭈어 봐도 인천에서는 책이 참 안 팔린대요. 그래서 책마을에서 일하며 제가 인천사람이라는 얘기를 못하겠더라고요. 저는 책을 많이 읽는다치더라도 다른 인천사람은 책을 너무 안 읽으니까요.” “그래, 인천사람이 책을 참 안 봐. 우리 아벨에도 인천사람보다 서울에서 책 보러 오는 사람이 참 많거든. 인천에서 책을 좀 봐주면 좋겠는데, 인천이라는 마을에서 책을 알아보고 배우고, 책에 흐르는 숨소리를 들으면 좋겠는데.” “그런데요, 출판사 영업자로 일할 적에 겪기도 했고, 또 제가 사전을 짓는 일을 하며 전국 헌책집이며 온갖 책집을 다니고 사람들을 부대끼면서 돌아보자니, 여러 책 가운데 가장 안 팔리고 안 읽히는 책이 사진책이더군요.” “사진책?” “네. 사진책이요. 그래서 저는 다른 갈래 책도 다 있는 도서관이지만 무엇보다 ‘사진책’을 앞세우는 사진책도서관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아마 사진책도서관은 한국에도 아직 없지만, 이 지구별에서조차 한 군데도 없는 줄 알아요. 말 그대로 ‘세계 사진책도서관 1호’가 바로 인천 배다리에서 문을 여는 셈입니다.” “사진책도서관 1호. 아주 좋은데. 사진, 사진책, 책. 그렇지, 사진이란 참 묘한 데가 있어. 글이나 그림하고 다르게 사람들 마음을 끄는 알 수 없는 기운이 있지. 그런 사진으로 이룬 책을 모으는 도서관이라.” “오늘부터 부지런히 책을 쌀게요. 아마 두 달쯤 걸릴 듯합니다. 두 달 동안은 이곳에 틀어박혀 책을 신나게 싸야겠어요. 두 달 뒤에 배다리로 찾아가겠습니다.” 2007.2.3.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