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아 - 어느 시골의사 이야기 존 버거 & 장 모르 도서
존 버거 지음, 장 모르 사진, 김현우 옮김 / 눈빛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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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이름 : 행운아
 - 글 : 존 버거 / 사진 : 장 모르
 - 옮긴이 : 김현우
 - 펴낸곳 : 눈빛(2004.11.11.)
 - 책값 : 9000원


 시골의사와 나누는 ‘행운’
 - 존 버거, 장 모르 함께 만든 《행운아》


 〈1〉 환자를 알아주어야 할 의사


.. 실제로 좌절한 사람에게 ‘좌절’이란 단어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것은 환자 자신의 목소리의 메아리에 불과하다. 알아줌은 간접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불행한 사람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취급받을 것으로 예상한다 .. 〈82쪽〉


 영국 어느 시골에서 수수하게 의사로 살아가는 ‘사샬’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이는 이 시골에 오직 하나 있는 의사이며, 마을사람들에게 우러름을 받기도 하고 좋은 말동무가 되기도 하며, 어려움을 풀어 주는 사람이기까지 합니다. 다만, 마을사람들은, 여태까지 만난 다른 의사와는 사뭇 다른 이 사샬한테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아주 자기들과 하나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 이러한 개인적이고 매우 친밀한 알아줌은 신체적인 면과 심리적인 면 양쪽 모두에서 요구된다. 전자의 경우 그것은 진찰의 기술이다. 진찰을 잘하는 의사는 드문데, 이는 그 의사에게 의학지식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대부분의 의사들이 관련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실들 ― 단순히 신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감정적, 역사적, 환경적인 것까지 ― 을 고려할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환자의 진실, 다양한 양상을 암시할 수 있을 환자의 진실 대신에 특정한 양상만을 찾는다 .. 〈79쪽〉


 의사가 환자를 알아주는 일은 환자한테 ‘어떤 병이 어디에서 나서 얼만큼 번졌고, 어떻게 손을 쓰고 무슨 약을 쓰면 된다’ 하는 의학지식이 아닙니다. 이런 일은 오래지 않아 컴퓨터가 모두 알아서 해 줄는지 모릅니다. 컴퓨터도 할 수 있는 일, 그러니까 기계와 같이 착착착 지식을 뽑아내고 처방을 내리는 일이 사람이 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몸이 아플 때 사람들은 의사를 큰형이나 언니 정도로 가정한다.(74쪽)”고 합니다. 하지만 “치료가 불가능할 때 그가 우리의 죽음을 지켜봐 주기를 바란”다는군요. 이런 마음과 느낌은 무엇일까요?

 실제로 우리 자신이나 식구나 동무나 둘레 사람들이 병원에 참 자주 가고 많이들 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병원에 다니는 분들 가운데 ‘아주 좋다’고 하는 의사를 어렵지 않게 만나는 사람은 퍽 드뭅니다. 그저 집에서 가까운 병원으로 다니면 좋을 텐데, ‘좋은 의사’를 찾아다닙니다. 이 ‘좋다’는 의사란 어떤 사람이기에 그럴까요. 또, 집에서 가까운 병원에서는 ‘좋다’는 의사를 만날 수 없는가요.


 〈2〉 좋다고 할 만한 의사

 제 나름대로 ‘좋다고 할 만한 의사’는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 봅니다. 첫째, 좋다고 할 만한 의사는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흰 가운을 입고 눈이 부신 빛을 쏘는 기계가 옆에 줄줄이 늘어선 병실에서만 만나서는 안 됩니다. 시골의사 사샬은 “좀처럼 수술실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스스로를 일종의 움직이는 일인 병원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식탁 위에서 충수염이나 탈장 수술을 한 적도 있고, 승합차에서 아기를 받은 적도 있었다. 일이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61쪽)”었다고 합니다. 요즘 이런 의사를 볼 수 있을까요.

 둘째, 좋다고 할 만한 의사는 자기가 다스린 환자의 식구나 동무들, 또는 자식들까지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시골의사 사샬은 “마침내 그는 사람들이 변해 가는 것을 보기 시작했다. 삼 년 전에 홍역을 치료해 줬던 여자아이가 결혼을 해서는 첫 번째 출산을 위해 찾아오는가 하면, 한 번도 앓은 적이 없었던 남자가 총으로 자기 머리를 쏴 버리는 일도 있었다(61쪽)”고 합니다.

 셋째, 좋다고 할 만한 의사는 환자가 두렵지 않게 해야 하며, 자기 집에 있는듯(그래서 의사를 형이나 언니처럼 느끼듯) 마음 가벼이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시골의사 사샬이 꾸린 진찰실은 “병원처럼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오랫동안 살고 있는 아늑한 공간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 어떤 응접실보다 더 깔끔했으며, 작은 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간이 널찍해 보였다. 그곳이 바로 환자들이 진찰을 받고, 처방과 진료를 받는 곳이(53쪽)”었다고 합니다.

 넷째, 좋다고 할 만한 의사는 크지 않은 병원에서 일하거나 크지 않은 차를 타거나 자기를 낮출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시골의사 사샬은 “다른 집들과 떨어져 있는 병원은 차고 두 개를 합쳐 놓은 크기였다. 대기실과 두 개의 진찰실, 그리고 약제실이 있었다. 숲이 우거진 계곡과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한쪽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계곡의 다른 쪽에서는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을 정도(49쪽)”인 곳에서 일하고 있었답니다.

 다섯째, 좋다고 할 만한 의사라면 죽음을 앞둔 환자를 돌보는 식구들 앞에서 돈이 얼마가 있어야 수술을 할 수 있다느니, 장례비용이 얼마라느니, 얼마를 안 내면 주검을 내주지 않겠다느니 하고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시골의사 사샬은 다음처럼 움직입니다.


.. “참 별일이네요.” 노인이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말했다.
 “심장이 안 좋다가, 이제 폐렴까지… 별일이잖습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말입니다.”
 노인은 울기 시작했다. 마치 여자가 울 때처럼 매우 조용한 울음이었다.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벌써 왕진 가방까지 싸 들었던 의사는 가방을 내려놓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차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을까요?” 그가 말했다.
 딸이 차를 끓이는 동안, 두 남자는 집 뒤편에 있는 과수원과 올해 사과 농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딸이 차를 가지고 왔을 때는 노인의 류머티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의사는 차를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31쪽〉


 환자인 여인은 늙은 할머니입니다. 할머니는 이튿날 숨을 거두었고, 할아버지는 내내 발 구르기를 멈추지 않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시골의사 사샬은 “좀더 사셨더라도 고통 속에 사셨을 겁니다. 훨씬 더 힘드셨을 거예요.”라고만 짧게 말하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3〉 ‘행운아’란?

 권정생 님은 《우리들의 하느님,녹색평론사(1996)》이라는 책에서 “나는 나중에 커서 훌륭한 의사가 되어 불쌍한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겠다는 어린이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기특한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그것도 이기적인 욕심이란 생각이다. 그런 어린이는 자신들만 훌륭한 의사가 되고 다른 사람은 모두 불쌍한 환자가 되라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42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의사 되기란 참 어렵습니다. 기계가 아닌 ‘사람인 의사’가 되기도 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의학지식 쌓기를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자신들만 훌륭한 의사가 되고 다른 사람은 모두 불쌍한 환자가 되’길 바라는 비뚤어진 이기심을 품지 않도록 마음 다스리기에도 애써야 합니다.


.. 사샬의 특권에 대한 마을 사람이나 숲 사람들의 반응은 복잡하다. 사람들은 그가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왜, 그렇게 좋은 머리로…” 그때 사샬이 그들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는, 시골의사로 활동하기로 한 그의 선택까지도 일종의 특권을 암시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성공에 무관심할 수 있는 특권. 이제 그의 특권은 어느 정도는 그들의 특권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자랑스러워하고, 동시에 그를 보호하려 든다. 마치 그의 선택이 은연중에는, 머리가 좋다는 것이 약점일 수도 있음을 암시하기라도 하듯이. 종종 사람들은 그를 매우 걱정스러운 듯이 쳐다본다. 내가 생각하기에, 사람들이 그를 의사로서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아니다. ― 그가 좋은 의사라는 것은 마을 사람들도 알고 있지만, 그런 의사가 보기 힘든 의사인지 아니면 흔히 볼 수 있는 의사인지는 모르고 있다. 그것보다도 사람들은 그의 생각하는 방식을 자랑스러워하고,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하여금 자신들과 함께 머물도록 선택하게 해 준 그의 정신을 자랑스러워한다 .. 〈117쪽〉


 이리하여 시골의사 사샬은 ‘행운아’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샬에게 의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시골사람들도 ‘행운아’가 되어요. 외진 시골로 가서 성공에는 얽매이지 않고 의료 봉사를 하면서 즐거움과 보람을 찾는 일은 한편으로 ‘특권’이지만, 이런 일을 자기 몸을 낮추고 다스릴 수 있는 마음을 지닌 일은 특권이 아니라 ‘부지런히 애써서 얻은 열매’입니다. 사샬한테 특권만 있었다면 시골사람들은 그저 그런 의사 하나쯤으로 보고 조금은 고마워했겠지만, 자기들과 한 마을에서 살면서 자랑스럽게 여길 만하게 생각하지 않았겠지요.

 “안타까운 합병증이라고 부르는 것까지도 사샬은 실수라고 생각(142쪽)”합니다. 하지만 우리 현실을 가만히 돌아다보면, ‘의사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사람은 없고 ‘합병증’이라느니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데까지 왔다’느니,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느니 하면서 온갖 핑계와 구실을 대며 책임을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돌리는 직업인만 많아 보입니다.


.. 의사는 여러 직업들 중에서 가장 이상화한 직업이지만, 그것은 추상적으로 이상화했을 뿐이다.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몇몇 젊은이들은 초기에 그 이상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많은 의사들이 환상을 깨고 냉소적으로 변하는 이유는, 그러한 이상이 엷어졌을 때, 자신이 다루는 환자의 실제 삶의 가치에 대해 확신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성격이 둔하거나 비인간적이라서가 아니라, 그들이 인간의 삶의 가치를 알아볼 능력이 없는 사회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생활하기 때문이다 .. 〈177쪽〉


 〈4〉 우리 자신에게 물어 볼 이야기들

 시골의사 사샬 이야기를 옆에서 살피면서 《행운아》란 책을 남긴 존 버거는 우리한테 묻습니다. “사샬은 25년 동안 의료 활동을 펼쳐 왔다. 지금까지의 치료건수는 10만 건이 넘을 것이 분명하다. 이만하면 ‘괜찮은’ 기록처럼 보인다. 그가 1만 건만 다루었다고 해서 ‘덜 괜찮은’ 기록일까? 그가 머리만 좋고 부주의한 의사였다고 가정해 보자. 한 번의 사례를, 혹은 열 번, 백 번의 사례를 부주의하게 다루었다는 이유로 그의 기록에서 그만큼을 제외해야만 하는가? 반대로 머리가 좋고 대단히 헌신적인 의사였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그 기록에 얼마를 더해 줘야 하는가? 그래서 그가 얻게 되는 것은 또 무엇인가?(175쪽)” 하고요.

 “고통의 치료가 가지는 사회적인 가치는 무엇인가?”, “구해 낸 생명들이 가지는 가치는?”, “대단히 어렵게 정확한 진단을 내려 주는 것은 위대한 작품을 그리는 것에 비견될 수 있을까?”, “의사는 전문성에 따라 평가되어야 하는 것일까?” 같은 이야기도 묻습니다. 자, 이런 물음을 들은 우리들은 무어라고 대꾸해야 좋을까요. 아니, 이런 물음을 들어 보기나 했을까요, 생각이나 해 보았을까요, 참다운 의사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는지, 의사를 넘어 우리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우리 자신이 얼마나 참다운 사람, 참다운 일, 올바르고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인지를 생각이나 해 보고 있기나 할까요?


.. 풍경은 기만적일 수 있다.
 종종 풍경은 거기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펼쳐지는 무대라기보다는 하나의 커튼처럼 보인다. 그 뒤에서 사람들의 투쟁, 성취 그리고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는 그런 커튼… 〈13쪽〉


 생명을 얻어서 이 땅에 태어났고, 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일은 누구한테나 축복이고 행운입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 자신이 축복받은 일과 행운을 얻은 일을 생각하거나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시골의사 사샬은 틀림없는 행운아이고, 사샬과 함께 살아가는 시골사람들도 행운아입니다. 이런 사샬을 취재하고 만난 존 버거와 장 모르도 행운아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엮은 책을 읽는 우리들도 행운아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도 우리 스스로 느껴야 행운이지, 느끼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픔도 기쁨도 슬픔도 즐거움도 우리가 살갗으로 느껴야 비로소 아픔, 기쁨, 슬픔, 즐거움이 됩니다.

 《행운아》라는 책은 언뜻 보면 남다르다고 할 만하게 살아가는 시골의사 한 사람을 드러내어 보여줍니다. 책 한 권 읽으며 ‘보람차게 살아간 한 사람 삶’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한편, ‘시골’과 ‘의사’를 넘어서서 ‘한 사람이 고즈넉하게 걷는 길’을 차분하게 보여주는 책 《행운아》입니다. 우리는 이 책을 곁에 두고 틈틈이 읽으면서, 우리 스스로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보거나 살필 수 있고, 자기 삶을 알뜰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일이란 무엇인가 우리 나름대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운이 좋아서 주어지는 ‘행운’이 아닌, 저마다 소중한 한 사람으로 태어나, 저마다 자기 길을 즐겁게 걸어가는 ‘삶’과 이야기를 느끼면서. (4338.6.13.달.처음 씀/4340.3.9.고쳐 씀.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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