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상이 어찌나 야박하게 되었는지, 요즈음은 거리의 책가게에 들어가서 책을 좀 서서 읽을 수도 없읍니다. 좌판 위에 놓인 새로 나온 월간잡지를 이것저것 뒤적거려 보는 것이 조그마한 생활의 낙이라면 낙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요만한 자유마저 용납되지 않습니다. 광화문이나 종로거리의 책가게에 들어가서 5분 동안만 책을 들고 서 있어 보십시오. 점원 아이들이 얼굴 표정이 달라지지 않는 책가게가 없을 것입니다. 책을 펴 보기가 무섭게 벌써 점원 아이가 득돌같이 팔뒤꿈치 옆에 바싹 다가와서 위압을 주는 것쯤은 예사입니다. 노골적으로 책을 빼앗고 나가라고 호령을 치는 책가게도 있읍니다. 얼마 전엔가 동대문 쪽 길가에 있는 고본옥에를 들른 일이 있읍니다. 릴케의 시집이 있길래 그 안의 시를 몇 편 뒤적거리면서 읽기 시작했읍니다. 때마침 빗방울이 부슬부슬 떨어지기 시작하여서 나는 그 책사가 인심이 너그럽지 못한 책사인 줄 알면서도 미적미적 서 있었읍니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함경도 사투리를 쓰는 임꺽정이같이 생긴 주인이 달려와서 왈칵 책을 빼앗고는 “아니, 고만 읽고 나가시오, 가게를 닫아야겠소!” 하고 모욕적인 어조로 소리를 질렀읍니다. 나는 졸지에 가게를 닫아야겠다는 말이 납득이 안 가서, “아니, 대낮에 가게를 닫아야겠다니 무슨 말이요?” 하고 반문했읍니다. 그랬더니 주인은 “오늘은 날씨도 비가 오고 해서 가게를 닫고 낮잠이나 자야겠으니 어서 나가 달란 말요.” 하면서 바로 나를 점포 밖으로 팽개치기라도 할 것 같은 험한 기세를 보였읍니다. 나하고 얼마 동안 옥신각신을 하는 중에 여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와서, 금방 가게를 닫겠다던 주인은 그쪽으로 가 버리고, 나는 그래도 울화가 가라앉지 않아 얼마 동안 미적미적거리다가 밖으로 나와 버렸지만, 나는 가게를 닫아야겠다는 주인의 핑계가 화가 나면서도 한쪽으로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 (1963.2.) / 《김수영-퓨리턴의 초상》(민음사,1978) 214쪽
‘고본옥(古本屋)’은 ‘헌책방’ 또는 ‘옛책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동대문에 있는 곳이고, 여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왔다는 소리로 헤아려 볼 때, 이곳은 지금 ‘청계천 헌책방거리’를 가리키는구나 하고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시를 쓰는 김수영 님은 광화문과 종로에 있는 책방에 들른 뒤, 그길에 청계천 헌책방거리, 또는 청계천 둘레 동대문 골목골목에 있던 헌책방에 들러 책을 뒤적여 보다가 입술이 파르르 떨릴 만한 일을 겪고 글을 하나 남겼네요. 조금이나마 마음이 따순 헌책방 임자를 만났다면, 한결 살갑고 따순 마음이 묻어나는 글을 남겼지 싶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동대문에서 김수영 님을 차갑게 내쫓은 분은 ‘헌책방에서 느낄 수 있는 아쉬운 대목’을 적바림하게 만들고야 맙니다. 하긴, 이때는 헌책방뿐 아니라 새책방에서도 ‘서서 읽는 사람 내쫓기’를 똑같이 했다니, 말 다했지요.
그러고 보면, 서울 광화문에 있는 큰 새책방이든 나라에서든 학교에서든 ‘책을 읽자!’고 소리높여 외칩니다만, ‘서서 읽기’ 하는 사람은 ‘책읽는 사람’으로 안 치지 싶습니다. 책을 사서 읽을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지요. 하지만 형편이 안 되는 사람도 많잖아요. 이런 사람들은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고, 책방에서 서서 읽을 수 있어요. 그래, 광화문 교보문고나 영풍문고에서는 푯말을 달리 붙여야지 싶습니다. “책을 읽자!”가 아니라 “책을 사서 읽으쇼!”로. (4340.3.9.쇠.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