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깊이가 있는 말이 따로 없다. 깊이가 없는 말이 따로 없다. 깊이는 우리 스스로 마련한다. 사람들이 어느 말을 널리 써 주었기에 그 말이 깊지 않다. 우리 스스로 살아낸 숨결을 담아낸 낱말이기에 비로소 깊다고 한다. 어느 분은 ‘가령’이나 ‘전혀’가 깊이있다고 여겨 이 말씨를 붙잡는다. 누구는 ‘이를테면·그러니까·곧’이나 ‘도무지·하나도·조금도·참’이 깊이있다고 여겨 이 말씨를 보살핀다. 어느 말씨로 이야기를 편들 대수롭지는 않다. 낱말은 가리거나 고를 줄 알되, 이 낱말로 줄거리를 엮어 이야기를 들려줄 줄 모른다면, 그저 껍데기이다. ‘나’하고 ‘본인’ 가운데 어느 쪽이 깊이있다고 할 수 없다. ‘아무튼’하고 ‘하여간’ 가운데 어느 쪽이 깊이있다고 할 수도 없지. 먼저 삶이 깊이있다면, 깊이있는 삶에서는 어느 말을 쓰든 다 깊기 마련이다. 그리고 깊이있는 삶은 차츰차츰 어린이 말씨로 다가선다. 깊지않은 삶, 곧 얕은 삶은 차츰차츰 사람들 꼭대기로 올라서려고 하는 벼슬아치 쪽으로 기운다. 1995.10.8.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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