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1

아기가 태어나면 어버이는 으레 가장 좋은 옷감을 살펴 가장 이쁘면서 사랑스러운 배냇저고리를 입히고 싶다. 아기한테 입힐 배냇저고리를 헤아리며 바느질이나 뜨개질을 하고, 미리 삶고 볕을 쪼여 아기가 이 땅에서 햇볕이며 바람이며 냇물이며 풀내음이며 싱그러이 누리기를 빈다. 2008.6.15.


옷 2

곁님 어버이도 우리 어버이도 큰아이한테 고운 옷을 입히고 싶다며 돈을 주시고, 아이를 데리고 옷집에 가기도 한다. “아기가 곧 자라서 올해밖에 못 입힐 텐데 굳이 안 사 주셔도 되어요.” 하고 여쭈니 “에이! 안 그래요! 올해만 입힌다고 하더라도 아이한테 고운 옷을 입혀야지!” 하는 말씀. 듣고 보니 그렇다. 한 해를 입더라도 아이가 가장 반길 뿐 아니라, 아이를 바라보는 어버이로서도 해사하구나 싶은 옷을 지어서 입힐 노릇 아닌가. 한 사람이 한 벌 읽고 지나갈 글이라서 아무렇게나 써도 될까? 아니다. 다문 한 사람이 읽어 줄 글이어도 온마음을 쏟을 노릇이다. 2008.12.20.


옷 3

“어쩜 아이들 옷은 이렇게 이쁘게 지을까? 내가 입고 싶어.” 곁님이 문득 말한다. 이 말을 듣고서 꼬까옷을 새삼스레 바라본다. 참으로 꼬까옷이 얼마나 곱고 이쁜지 모른다. 그런데 어른들 옷은 이렇게 곱거나 이쁘지 않기 일쑤이다. 게다가 사내가 입는 옷은 너무 투박하기 일쑤. 왜? 왜 사내한테는 꽃옷을 안 입힐까? 왜 사내는 시커먼 옷을 입히려 할까? 사내도 가시내도 모두 꽃사람, 그러니까 꽃사내에 꽃가시내일 텐데, 거무튀튀한 옷을 입히면서 마음도 몸짓도 거무튀쥐하지는 않을까? 사내한테 배롱꽃빛 옷을 입히고 파란 하늘빛에 찔레꽃처럼 하얀 옷을 입히면 마음결도 몸짓도 확 달라지지 않을까? 군인한테 시커먼 옷을 입히는 까닭을, 공무원한테 똑같이 시커먼 옷을 갖춘옷이라며 입히려는 뜻을 어렴풋이 알 만하다. 2009.8.20.


옷 4

중·고등학교 여섯 해만 학교옷을 입히려는 이 나라이다. 초등학교에서는 왜 학교옷을 안 입힐까? ‘마음대로 걸치는 옷’일 적에 아이들 사이에 ‘위화감’이 생긴다는 교육청 논리인데, 앞뒤가 안 맞는다. 그러면 초등학교는 걱정없고? 또 고등학교를 마친 뒤에는? 스무 살부터는 모든 젊은이가 ‘위화감’을 느끼고 살아도 되나? ‘위화감’을 따지겠다면, 값비싼 자동차도 없어져야 하지 않나? 이 나라 구석구석 어디를 보아도 온통 위아래로 가르는 몸짓인데, 왜 중·고등학교 푸름이를 ‘굴레옷’으로 꽁꽁 조여서 괴롭히려 들까? 아이들은 학교옷이 아닌 사랑옷을 입을 수 있어야 한다.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푸른 숨결을 피울 수 있는 차림새를 스스로 살피면서 지을 줄 알아야 한다. 굴레옷에 조이며 자란 푸름이 손에서 어떤 글이 태어날까? 굴레옷에 갇힌 채 살아가는 사람들 입에서 어떤 말이 샘솟을까? 사랑옷을, 날개옷을, 꽃옷을, 하늘옷을, 숲옷을, 기쁜 살림옷을 누릴 적에 비로소 글다운 글이며 말다운 말이 자란다. 2010.3.4.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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