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 1

고등학교를 다니던 1991∼1993년에 국어사전을 두 벌 읽었다. 첫 낱말부터 끝 낱말까지 모조리. 이때에 두 가지를 느꼈다. 첫째, 이 나라 국어사전에 웬 영어하고 일본말이 이렇게 많지? 둘째, 이 따위로 사전을 엮고도 국어사전이란 이름을 붙인다면 차라리 내가 쓰겠노라고. 1994.3.1.


국어사전 2

《보리 국어사전》을 짓는 편집장이자 자료조사부장 일을 맡기로 했다. 나는 이 일을 안 하려 했다. 지난해, 그러니까 1999년 8월 1일부터 보리출판사에서 영업부 일꾼으로 일하다가 2000년 6월 30일에 그만두었다. 뜻있다는 출판사에서 기쁘게 일을 했지만, 이곳에서도 슬픈 저지레가 잔뜩 보여서 ‘사표’란 종이를 집어던졌다. 책마을이란 곳에 신물이 나서 골방에 틀어박혀 책도 안 읽고 멍하니 하늘바라기만 하던 어느 날, 윤구병 님이 찾아와 나를 살살 꾀었다. 술 한잔 사겠다고 하면서 나한테 “종규야, 다른 애(편집부 일꾼)들은 머리에 똥이 너무 많이 들어서 새로운 사전을 만드는 일을 맡길 수 없어. 새로운 사전을 만들어야 하는데 머리에 똥이 가득 들었으니 어떻겠니? 그런데 내가 보기에 너는 머리에 아직 똥이 덜 든 듯해. 너 같은 젊은이가 나서서 새로운 사전을 만들면 좋겠는데, 어떠니?” 하고 이야기했다. 윤구병 님이 들려준 이야기가 맞구나 싶었다. 내가 잘났다(?)는 소리가 아니라, 나이 있는 분들은 머리에 똥이 너무 차서 참말로 새로운 사전을 짓는 일에는 안 어울리겠다고 느꼈다. 윤구병 님한테 몇 가지를 걸었다. 이 몇 가지를 받아들이시면 얼마든지 하겠다고. “윤 선생님, 윤 선생님 말씀대로 그렇지요. 새로운 사전은 새로운 마음으로 젊은 넋이 되어야 슬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일을 하자면 몇 가지는 지켜 주시면 좋겠어요.” “뭔데? 이 일 하겠다는 뜻이지?” “아니요.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몇 가지를 먼저 말씀드려야겠다는 얘기입니다.” “그래, 뭐냐?” “윤 선생님, 첫째로는 예전 보리출판사에서처럼 12개월 수습에 62만 원 월급 받고는 이제 도무지 일을 못 하겠습니다. 다른 출판사는 3개월 수습이던데 어떻게 12개월씩이나 수습을 시키나요? 노동착취입니다. 게다가 윤 선생님이 저를 데려가서 일을 맡기려 하시니까, 저는 수습을 할 까닭이 없겠지요. 월급은 적어도 100만 원은 받아야겠어요. 저도 먹고살아야지요.” “그래. 또?” “다음으로, 사전을 지으려면 제가 모든 일을 다 해야 하기는 하지만, 혼자서는 일손이 모자라요. 잔심부름을 맡되, 제가 바라거나 시키는 대로 군소리 하나 없이 그대로 따라 줄 심부름꾼이 있어야 해요. 그렇다고 아무 일이나 시킨다는 뜻이 아니라, 낱말풀이나 올림말이나 보기글을 뽑을 적에는 토씨나 받침 하나도 틀리면 안 되기 때문에, 제가 바라거나 시키는 대로 참말로 백이면 백 그대로 해줄 수 있는 착한 심부름꾼이 있어야 해요.” “야, 당연하지. 그런 일꾼은 꼭 있어야겠다. 그리고?” “아시겠지만, 사전을 제대로 지으려면 자료를 제대로 갖춰야 해요.” “암, 그렇지.” “우리는 처음부터 맨손으로 새로운 사전을 짓기로 하잖아요.” “그래.” “그러니까 모든 자료를 몽땅 새로 갖춰야 하니까요, 새로운 자료를 사들이는 돈을 아끼지 않으면 좋겠어요. 제가 새로운 자료를 사들이는 돈, 자료구입비를 다달이 적어도 200만 원은 써야겠다는 어림이 나와요.” “200만 원이면 될까? 적지는 않니?” “아니요. 그만큼이면 됩니다. 사전 지을 자료는 헌책집에서 많이 사야 할 텐데, 헌책집 사장님들은 제가 나중에 국어사전 쓰는 일을 하기로 해서 자료를 잔뜩 사들여야 할 적에 기꺼이 싸게 팔아 주신다고 했어요. 그렇다고 헌책집 사장님들이 너무 싸게 주시려 하면 웃돈을 얹어 드릴 생각입니다만, 다달이 200만 원씩만 쓰려 해요. 왜냐하면, 한꺼번에 너무 많이 자료를 사들이면 다 살피기 어렵거든요. 우리는 세 해 동안 기획검토와 자료조사와 자료정리를 하기로 했으니, 세 해 동안 다달이 200만 원씩 자료를 갖추면 비로소 사전 짓는 바탕은 다 되리라 봅니다.” “알았어. 또?” “이렇게 받아들여 주시면 할 수 있어요. 오늘은 술을 마시느라 일을 못하고, 이튿날부터 할 수 있습니다.” “그래, 하겠다는 뜻이지?” “네. 할게요.” “이 녀석, 그럼 처음부터 하겠다고 하지, 뭔 뜸을 그렇게 들이니? 네가 하겠다고 하면 어떤 조건을 말하든 그 조건을 다 들어주면 되잖아. 아이구야.” 2001년 1월 1일, 새로운 국어사전 짓는 첫걸음을 떼는 날, 윤구병 님하고 주고받은 말을 옮겨 놓는다. 2001.1.1.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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