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기 2019.2.19.


《꿘투》

 이장근 글, 삶이보이는창, 2011.9.8.



글월을 부치러 우체국으로 가는 길에 저자마실을 하려 한다. 작은아이는 집에서 놀겠노라 하고, 큰아이는 짐순이가 되어 주겠단다. 대구에 있는 마을책집 두 곳에 동시를 새로 써서 띄우고, 이오덕 어른 큰아드님한테도 동시를 새로 쓰고 내 동시집을 묶어서 띄우고, 구미에 있는 마을책집에도 동시를 새로 써서 띄운다. 문득 생각한다. 나라 곳곳에 있는 마을책집마다 틈틈이 동시를 새로 써서 띄워 볼까? 시골버스에서 시집 《꿘투》를 읽다가 확 찢어버릴 뻔했다. 2011년에 나온 시집이니 어쩔 수 없는지 모른다만, 교사로 일한다는 분이 ‘밥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를 마음속으로 성희롱 하고, ‘대학 다닐 무렵 옆방 아가씨 숨소리를 벽에 붙어 들으며 용두질한’ 이야기를 버젓이 시로 쓴다. 이 시집에는 도종환 장관이 추천글을 써 주는데 첫말이 “이장근의 시는 정직하다”이다. 그래, 틀림없이 숨김없이 시를 쓴 듯하다. 그런데 삶을 배우거나 사랑을 익히지는 않은 듯하다. 숨김없이 쓴다고 해서 시가 되지도 않고 문학이나 노래나 삶이 되지도 않는다. 고은이란 사람이 저지른 짓하고 무엇이 다를까? ‘용두질할 권리나 자유’가 없다는 소리가 아니다. ‘용두질하는 시를 쓰며 밥집 아줌마를 성희롱하는 정직’을 시집으로 낼 만한가?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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