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만화를 볼 때마다 놀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림결이 깔끔하고 그린이마다 개성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한편, 사람이든 사물이든 참 훌륭하게 그려냅니다. 만화 그림이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정물은 아니지만, 정물을 빈틈없이 그릴 수 있는 그림 솜씨를 바탕으로 자기 눈길과 생각과 그림감에 따라서 아주 단출한 금 몇 가지로 모든 것을 담아내는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일본 만화는 바로 이런 예술에 아주 알뜰합니다. 한편, 줄거리로 담아내는 그림감도 테두리가 넓습니다. 테두리가 넓으면 깊이가 모자라기 쉬운데, 넓게 여러 가지 그림감을 다루면서도 깊이를 놓치지 않습니다. 이는 그리는이 혼자서 애쓰기 때문이 아니라, 도움을 주는 사람이 둘레에 많기 때문이겠지만, 그리는이 스스로 자기가 그림으로 담아내어 줄거리로 살을 입히는 만화에 온마음을 쏟아붓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자전거 한 대를 그려도 그냥 떠오르는 대로 그리지 않는다는 소리입니다. 야구공 하나를 그려도, 공을 차는 다리 모양을 그려도, 이삿짐차와 책을 실은 짐차와 얼린 물고기를 실은 짐차를 그려도, 대충대충 그리지 않아요.

 여기까지만 되더라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만화를 보자면, 이만큼이라도 된 만화를 요즘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뭐, 몇 사람쯤, 혼자서 바득바득 애쓰는 분들 만화에서는 엿볼 수 있는데, 초중고등학교 아이들까지 두루 즐겨보는 만화를 그리는 사람들한테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워요. 너무 대충 그립니다. 아무래도, 도움이(배경이나 말풍선이나 칸을 그리며 도와주는 일꾼)를 쓰기 쉽지 않은 형편도 한몫 할 테지요.


 요즘 틈틈이 보는 일본 만화 가운데 《교도관 나오키》(고다 마모라 그림,학산문화사,2006)가 있습니다. 어느덧 3권까지 우리 말로 나왔는데, 이 만화는 제가 즐기는 다른 일본 만화와 마찬가지로 깊은 생각이 담겼습니다. 제가 달가이 여기지 않는 말로 한다면 ‘철학’이 담긴 만화라 하겠어요. 사형제도를 꼭지점으로 놓고,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 끔찍한 범죄로 피해를 입은 사람, 범죄자를 가두어야 하는 사람, 범죄자한테 교수형 집행을 손수 치러 주어야 하는 교도관, 벌을 내리는 판사와 변호하는 사람, 가해자와 피해자 유족, 이런 사형제도를 꾸려 나가는 정부… 어느 것 하나 빠뜨리지 않고 꼼꼼하게 살피면서 이야기를 건넵니다. 객관이라든가 냉철로 줄거리를 다루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여줄 뿐인데,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한편, 우리들 모두가 ‘사람’이라는 대목을 놓치지 않습니다.


.. 반성한 사람을 이렇게 공포에 질리게 한 다음 죽여 버리다니…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은 귀신이에요, 악마예요? 이건 도저히 인간이 할 짓이 아니에요! ..  〈3권 147쪽〉

.. 아오야마는 처음부터 자기 죽음으로 속죄할 각오를 하고 있었어. 그래서 오오키의 위증을 알고도 사형을 감수했다고 나는 생각해. 나는 그런 아오야마의 고결함에 감복하고, 복구규정을 어기면서 특별대우를 해 주는 거야. 이해해 줘, 나오키 ..  〈3권 198쪽〉


 제대로 그렸다는 생각이 드는 일본 만화를 보면서, ‘야, 이래서 요즘은 영화가 책보다 더 사랑을 받는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한편, 만화에 나오는 대사만 쏙 뽑아서 소설을 쓴다고 해도 거의 똑같이 마음이 꿈틀거렸으리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우리 나라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책을 살펴보았을 때, 마음이 꿈틀거리게 하는 책이 드물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얼마 없어요. 어느 만큼 ‘참, 좋네’ 하는 생각으로 이끄는 책이 있기는 하지만, 눈물이 똑똑 떨어질 만큼 마음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이야기를 건네지는 못한다고 할까요? 더 깊이 곰삭이며 자기 목소리를 낮출 줄 알고, 누구나 다 함께 귀기울여 들을 만한 이야기로, 깊은 밤에도 불을 밝히며 읽을 만한 이야기로, 바쁘고 고되게 일하는 가운데에도 틈을 짜내어 헤아리고 살필 만한 이야기로 빚어내는 책이 뜻밖에도 적구나 싶어요.

 훌륭하다는 생각까지도 드는 일본 만화를 보다가, 잠깐 덮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만화를 그린 사람은 만화 하나를 훌륭하게 그렸는데, 만화가 아닌 소설을 썼어도, 시를 썼어도, 수필을 썼어도, 이와 거의 같은 즐거움과 뭉클함을 선사했으리라고요. 다만, 만화라는 매체이기 때문에 ‘책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이 제대로 눈길을 안 둘 뿐이며, 찬찬히 살피지도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대로 된 만화 하나가 나오자면, 글책 하나가 나오는 시간 못지않게 힘과 땀을 들여야 하고, 살가운 사진책 하나 엮어내는 시간 못지않게 오랜 세월 붓에 모든 것을 바쳐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저는 생각을 담은 책을 좋아합니다. 생각을 담은 만화를 좋아합니다. 생각을 담은 그림책, 생각을 담은 사진책, 생각을 담은 경제-경영-과학-종교-예술-교육-문학-인문학-어린이책 들을 좋아합니다. 생각을 담지 않은 책은 이 나라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출판사에서 낸 책이라 해도, 가장 이름난 글쟁이가 쓴 책이라 해도, 100만 부나 200만 부가 팔려나갈 만큼 인기가 높은 책이라 해도, 대통령이 칭찬하고 신문과 방송마다 크게 칭찬하는 책이라 해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누가 거저로 안겨 줘도 읽지 않습니다. 그냥 헌책방에 가져다줍니다.

 생각을 담은 만화, 생각을 담은 소설, 생각을 담은 교육학, 생각을 담은 사진, 생각을 담은 동화 하나 그립습니다. (4339.6.6.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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