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가에서 물 뜨기
- 1 -
충주에 돌아온 뒤 땀에 전 옷을 벗고 부엌 수도꼭지부터 살핀다. 물이 안 나온다. 틀림없이 날이 풀려서 녹았을 텐데? 펌프 자리로 가서 뚜껑을 열어 본다. 전깃줄이 뽑혀 있다. 누군가 뽑은 듯. 전깃줄을 잇고 수도꼭지를 다시 살핀다. 아무 움직임이 없고 펌프 돌아가는 소리도 안 난다. 지난해 이웃집이 불타면서 펌프 부속도 불탔을까?
하는 수 없이 윗마을로 올라가 물을 뜨기로. 물통을 가방에 담고 느릿느릿 고갯길을 올라간다. 수도꼭지를 틀면 철철철 나오는 곳에서 뜰까 하다가 아기 오줌줄기보다도 가늘게 물방울이 떨어지는 샘가에서 물을 뜨기로 한다. 글쎄, 이런 물줄기로 받는다면 어느 세월에 한 통을 받을까 싶지만, 물통 뚜껑을 받쳐서 똑똑똑 떨어지는 물을 몇 방울씩 받으며 조금씩 물통을 채운다.
쪼그려 앉은 채 물을 뜬다. 아주 조금씩 차오르는 물통이 1/10, 1/7, 1/4, 드디어 반쯤. 몇 분쯤 흘렀을까. 삼십 분도 넘은 듯한데.
틈틈이 허리를 편다. 고개를 들어 새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며 어느 나뭇가지쯤 앉아 있나 찾아본다. 하지만 아무 새도 안 보인다. 안경을 안 써서 그렇기도 하지만, 내 주먹만큼도 안 되는 조그마한 새들이겠지. 박새, 콩새.
오랫동안 똑똑 물줄기를 받노라니 물소리 하나하나 퍽 큰소리로 들린다. 나뭇가지에 앉은 새소리도 제법 큰소리로 들린다. 샘터 바닥에 가라앉은 모래를 보고, 물 한 모금 떠서 손가락으로 이닦기를 하고, 따사로운 햇볕을 냠냠 받아먹고, 서늘한 낮공기를 큼큼 들이키고.
- 2 -
샘가에서 물을 뜨는데, 윗마을 공동체학교에서 지내는 아이 둘이 개를 풀어서 내 뒤까지 끌고 온다. 이상한 사람이 와서 쫓아내려고 그러나? 그 개는 아주 어린 새끼였을 때부터 가까이서 보아 온 녀석. 이 녀석은 어릴 적 이웃 개한테 잘못 물려서 거의 죽다가 살아났다. 얼굴을 보면 한쪽으로 뒤틀려 있다. 새끼였을 때는 퍽 불쌍하다고 느꼈는데, 다 자란 뒤 나를 보고 컹컹 짖는 모습을 보면 정나미가 떨어진다. 다른 개들은 나를 보고 안 짖고 안기거나 얌전히 있는데 이 녀석만 짖는다. 하지만 모르지. 개가 짖는 소리에 무슨 뜻이 담겼는지 사람 생각으로만 바라볼 수 있는가.
그나저나 이 아이들은 왜 개를 끌고 내 뒤에 서는가. 할 말이 있으면 입으로 하든가, 보기 싫으면 나가라고 하든가. 이 아이들은 한 마을에, 그것도 바로 위아래에 나뉘어 있는 집에서 사는 사람을 모르는가. 하긴, 나도 이 아이들 얼굴이 낯설다. 아마 서로 얼굴 마주칠 일이 없어서 그럴 테지. 어른인 내가 아이들 얼굴을 잊지 않고 떠올린다고 해도, 아이들이 어른 얼굴을 모두 떠올리지 못한다고 생각해 보자(이 아이들하고 가까이 지낼 일은 없지만 이래저래 스치며 여러 번 보기는 했으니까).
등 뒤에서 바로 개 짖는 소리를 들으니까 물을 뜨던 손이 떨린다. 파르르. 다른 사람도 아닌 아이들한테, 그것도 공동체 대안학교에 다닌다는 아이들한테 도둑이나 이상한 사람으로 의심을 받고 있으니. 조금 뒤, 이 대안학교에 다니는 아이 가운데 오랫동안 가까이 지냈던 아이 하나가 나를 알아보고 “야, 최종규 선생님이야.” 하고 왜들 그러느냐고 이야기. ○○○구나. 히유. 한숨이 나온다. 그렇지만 개를 끌고 온 아이들이 내 이름이 뭔지, 내가 어디에서 사는지, 내가 무얼 하는 사람인지 알 턱이 없을 테고, 알려고도 하지 않으며, 안다 한들 달라질 것 없겠지.
- 3 -
한참 물을 뜨다 보니 손과 발이 얼었다. 처음에는 몸에 땀이 후끈후끈 올라왔다. 자전거 타고 살림집에 닿은 지 얼마 안 되었으니까. 그래서 샘가에서 얼굴 씻고 발 씻을 때 시원함만 느꼈으나, 한참 쭈그려 앉으며 물을 뜨는 동안 허리도 쑤시고 손발도 시리고. 하지만 물통은 언제 찰는지 까마득하고.
그렇지만 똑똑똑 떨어지는 물줄기를 쏴아아 흐르도록 할 수 없다. 무슨 기계로 빨아들인다한들 더 빨리, 더 많이 나올 수 없다. 그저 지금 이 빠르기대로, 이 흐름대로 받을 뿐이다. 억지를 쓴다고, 꾐수를 쓴다고 달라지겠는가. 조바심을 낸다고, 안달을 한다고 바뀌겠는가. 말없이 기다릴 뿐이다. 그저 있는 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추운 겨울, 물이 얼어붙는 시골집에서는 으레 견뎌야 하는 일이며, 몇 방울밖에 안 떨어지는 물줄기라도 고맙게 느껴야지.
문득, 물 한 동이 뜨려고 십 리나 이십 리 길도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다녀야 한다는 사막마을 아이들이 떠오른다. 그 아이들과 견주면 나는 얼마나 수월한가. 이만한 물줄기라도 하늘에서 내려준 복이 아닌가.
- 4 -
물은 반 조금만 더 받는다. 개 짖는 소리 듣기 싫고, 손발도 많이 얼었다. 밥할 만큼은 떴으니, 이것으로 넉넉하다. 다음에는 자전거 타고 휭 왔다가, 다시 자전거 타고 휭 사라져야지.
- 5 -
집으로 내려오는 길에 늙은 감나무 옆에서 쉬를 보다. 올해에도 감 몇 알 열어 주시겠지. 내가 이 감나무한테 해 줄 수 있는 일이라면, 시골집에 있을 때 틈틈이 올려다보거나 쓰다듬어 주기, 때때로 오줌을 주기. (4340.2.6.불.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