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책을 즐겨 읽어 볼까요?
 [책이 있는 삶 2] 껍데기가 아닌 속살을 살펴봅시다


 저는 없는 이야기를 꾸며서 지은 책은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없는 이야기를 꾸민다고 할 때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진득하게 담아내면 눈길이 쏠립니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만 엮어낸 책은 달갑지 않습니다.

 뜬구름 잡는다는 이야기가 `공상과학'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터무니없는 소리, 말도 안 되는 소리, 앞뒤가 어긋나는 소리, 우리 삶을 비틀거나 한편으로 치우치게 보는 소리가 바로 뜬구름 잡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삶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소리 또한 뜬구름 잡는 소리이며 우리 삶에 눈멀고 귀멀게 하는 이야기 또한 뜬구름 잡는 소리입니다.

 털털하게 털어놓는 글이 좋습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자 흉허물없이 다가오고 다가갈 수 있는 이야기가 좋습니다. 글도 그림도 사진도 마찬가지입니다. 억지로 곱고 멋있게 쓰거나 지으려는 글, 그림, 사진은 입맛에 안 맞습니다. 언뜻 보면 무언가 남다르거나 멋있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하지만 두고두고 다시 곱씹으면 영 아닙니다. 때깔만 곱다고 맛있는 사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 자기를 드러낸 글은 소설이든 수필이든 희곡이든 시든 동화든 무엇이든 좋습니다. 없는 걸 있는 듯 그려낸 글은 영 와닿지 않습니다. 억지로 불러오는 웃음과 어거지로 쥐어짜는 눈물은 그야말로 지겹습니다. 그런 글을 볼 때면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 삶이 억지 웃음을 불러와야 할 만큼 재미가 없는가? 우리 삶이 어거지 울음을 쥐어짜야 할 만큼 눈물나는 아픔이 없는가?


 .. 고등학교를 갓 졸어한 겨울 오후였다. 집에서 선창가에 내려간다고 가니까 한 달 전에 팔려간 우리 집 소가 양지 쪽 말뚝에 매어져 서서 되새김을 하면서 눈을 버꿈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소 앞으로 다가가서 소를 쓰다듬어 주면서 `마침 우리 동네에 있어서 좋다'며서 중얼거리다가 선창가로 내려가려고 하는데,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다시 가서 보니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도저히 그냥 내려갈 수가 없어서 한참 동안 머리랑 등이랑 쓰다듬어 주면서 `울지 마라. 울지 마라' 달래 주면서 선창가로 내려갔다. 소가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을 그때 처음 보았다 .. <우리가 뽑은 대장>(지식산업사,1985) 130쪽


 소가 흘리는 눈물을 본 사람은 얼마쯤 될까요. 소가 흘리는 눈물을 두고두고 가슴에 새기며 사는 사람은요. 우리는 우리가 즐겨 먹는 고기가 되는 고기소들 아픔과 죽음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우리 밥통으로 들어오는 온갖 남새며 곡식을 생각할 틈도 없습니다. 꾸역꾸역 집어넣기 바쁩니다. 돈을 잘 세서 알맞은 값으로 밥과 고기와 물을 사서 뱃속으로 집어넣습니다.

 문득 드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우리 밥통으로 집어넣는 밥처럼 우리 머리와 가슴에 담고 느끼는 책도 그렇게 보지 않는가 해서요. 그 책 하나를 애틋하게 느끼면서 사는지, 그냥 돈이 있으니까 사는지, 남들에게 교양 있어 보이려고 흐름에 쫓기고 이끌려가면서 사는지...

 책을 책대로 제대로 느끼는 눈이 얕으면 새책방에 가든 헌책방에 가든 도서관에 가든 읽을 책이 없습니다. 맞춤법이 오래된 책이라고, 세로쓰기 책이라고, 낡고 떨어진 헌책이라고 줄거리가 나쁘지 않습니다. 책은 겉껍데기가 아무리 깨끗하여도 줄거리가 엉망이면 책 값어치가 없습니다. 겉껍데기는 걸레와 같다 해도 그 안에 담은 줄거리가 아름답고 알차면 그 책은 아름답고 알찬 값어치를 갖고 대접을 받습니다.

 사람은 어떠할까요. 옷차림새가 말쑥하고 돈이 많아야 참 사람일까요? 말은 번듯번듯 잘하고 또박또박 말을 잘하거나 듣기 좋은 말을 예의바르게 하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사람일까요?

 책을 보는 눈, 사람을 보는 눈, 뭇 목숨을 보는 눈은 다르지 않습니다. 한 흐름입니다. 함께 흘러가는 느낌입니다. 사람을 아끼는 눈과 마음으로 뭇 목숨을 아끼고 보살필 수 있습니다. 뭇 목숨을 아끼고 보살피는 눈과 마음으로 애틋하며 아름다운 책을 골라낼 수 있습니다. 책을 아끼고 보살펴서 애틋하며 아름다운 책을 살필 수 있고 골라낼 수 있는 마음은 새책방이나 헌책방이나 도서관으로 가는 발걸음을 가볍게 해 줍니다.

 책 겉모습이나, 책을 쓴 사람 이름이나, 펴낸 곳 이름이나, 글감에서 자유로울 때 자신에게 알맞고 좋다고 느낄 만한 책이 보입니다. 겉껍데기가 아닌 즐거리를 보고자 책을 삽니다. 겉보기가 아니라 몸에 좋고 맛이 좋은 먹을거리를 삽니다. 보기에만 좋은 아무 먹을거리나 사서 먹을 수 없듯 겉껍데기만 고운 책을 사서 맹탕인 줄거리를 읽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책방에서 사거나 빌려서 읽고 느끼는 책 하나는 우주입니다. 온 목숨입니다. 지구입니다. 삶입니다. 우리 삶입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듯 자신이 골라서 읽는 책 열 권 가운데 빠지거나 모자란 책 하나 없습니다. 헌책방이든 새책방이든 도서관이든 어느 곳에서 만나는 책이든 마찬가지이고요.

 다만. 요새는 날이 갈수록 껍데기만 번들번들 뒤집어씌워서 눈가림과 눈속임으로 책 장사로 팔아치우는 책이 참 많이 늘었습니다.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겉발림 책에 속아넘어갑니다. 씁쓸한 요즘 모습입니다. 아무 먹을거리나 사 먹을 수 없듯 아무 책이나 사 읽을 수 없게 되었거든요.

 잘못하면 거짓되고 치우치고 비틀리며 우리 삶을 눈멀게 하는 `농약에 물들 열매들'과 같은 책을 골라서 살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즐겨 읽을 책이라면 `호박과 같은 책'이어야지 싶습니다. 겉보기는 못생겨도 맛은 좋고 몸에 좋은 호박 말입니다. (2003.2.21. 처음 씀 / 2004.9.9. 고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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