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마음을 함께 느끼니 책이 좋다
 [책이 있는 삶 1] 우리 가슴을 울리는 책을 찾아보자


 지지난달 밤, 《마더 존스 자서전》(평민사,1978)을 다 읽었습니다. 참 좋은 책인데 여러 달에 걸쳐서 아주 천천히 읽었습니다. 몸이 고단한 날은 책을 읽다가 곯아떨어지기도 했고, 어느 날은 책을 읽느라 다른 일을 못하기도 했습니다. 마더 존스란 사람은 1830년에 태어나 1930년까지, 꼭 100 해를 산 분입니다. 이름은 ‘메어리 존스’이고, 미국 노동운동에서 가장 훌륭한 일을 했다고 해서 이름 앞에 ‘어머니(마더,mother)’란 말을 붙였다고 해요. ‘마더 데레사 수녀’처럼 말이에요. 우리 나라에는 전태일 님 어머님한테 이런 이름을 붙여 ‘이소선 어머님’이라 합니다.

 그 마더 존스가 1923년 어느 날, 버지니아 지사를 찾아갔답니다. 이 버지니아 지사는 지사로 지낸 스물세 해 동안 미국에서는 ‘가장 서민을 생각하는 정책’을 펼친 사람이라고 하는군요(마더 존스 말로는). 찾아간 까닭은 감옥에 애꿎게 갇힌 노동자들 때문입니다. 그저 ‘파업’을 했다는 까닭만으로 경영주들이 고용한 사설 보안관과 군인에게 붙잡혀 옥살이를 여러 달째 하는 가녀린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그네들에게 무언가 도움을 주어야겠다며 지사를 찾아갔대요(그때 나이는 93살이었겠군요).


.. “지사님 들어 보세요. 무슨 소리가 들리지요?”
그는 잠깐 귀를 기울였다.
“아뇨, 아무 소리도 안 들립니다.”
“난 들려요. 난 여자들, 사내애들, 계집애들이 밤에 흐느끼며 우는 소리를 들어요. 그들의 아버지가 감옥에 있어요. 아내와 어린애들은 먹을 것도 없이 울고 있어요”
“조사해 보겠읍니다.”
 그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고 나는 그가 약속을 지킬 것임을 알았다 ..  〈236쪽〉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사람이 모두 풀려났답니다. 지사로서는 그런 일이 ‘돈 많은 경영주’들이 몰래 하는 짓이라 하나하나 알아채기 어려웠겠지요. 하지만 그런 애꿎은 소식을 들으면 곧바로 풀어 주려 애썼답니다.

 아무튼 버지니아 지사도 지사이고, 마더 존스도 마더 존스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눈물이 핑 돌았어요. 마더 존스가 “난 들려요. 난 여자들, 사내애들, 계집애들이 밤에 흐느끼며 우는 소리를 들어요” 하는 대목에서요. 거짓말이 아니라 참말로 들었거든요. 그런 목소리를 들었기에, 울음소리를 들었기에 아흔셋이라는 참으로 늙은 할머니 몸으로도 그네들을 돕고자 나서거든요.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참 젊은 나이이고, 참 할 수 있는 일도 많으며, 돈도 퍽 넉넉하다고 할 수 있어요(한 달에 50만 원 넘게 번다면). 그런데 우리들은 무얼 하나요? 무슨 소리를 듣나요?

 그리고 누군가가 “난 들려요. 난 여자들, 사내애들, 계집애들이 밤에 흐느끼며 우는 소리를 들어요” 하고 우리에게 이야기를 걸 때, 그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어 주고, 똑바로 눈을 맞대고 들으면서, 함께 일을 풀자고 다짐할 수 있는가요?

 책 한 권을 읽어도 온몸과 온마음을 다해서 읽어야 좋은 까닭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소리를 듣는 거예요. 울음과 웃음을 듣는 거라고요. 이 세상 곳곳에 있는 울음소리를 듣고 웃음소리를 듣는 거지요. 그래서 나 혼자만 잘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함께 잘 살아갈 삶을 생각하는 겁니다.


 〈밥 한 그릇〉

 나더러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서슴없이 한마디로 대답하리
 밥 한 그릇 먹을 수 있는 일이라고.
 병들어 본 사람은 알리
 병들어 밥을 먹지 못해 본 사람은 알리
 밥 한 그릇 삭혀서 똥을 눌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
 그게 얼마나 눈물겨운 행복이라는 걸.
 사랑도 싸움도 그 다음이다
 밥 한 그릇 먹을 수 있게 해준
 밥 한 그릇의 소중함을 뼈에 사무치도록 알게 해준
 놀랍고 큰 힘,
 그 힘에 대해 고마워할 줄 앎은
 그 다음이다.
 나는 믿는다 그 힘을.
 그 힘 앞에 깨끗이 무릎 꿇는다.


 교사이자 시인이었던 정영상 님이 죽은 뒤 나온 유고시집 5《물인듯 불인듯 바람인듯》(실천문학사,1994)에 나오는 시 하나입니다. 저는 이 시 하나 때문에 이 시모음 한 권을 샀어요.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며 무릎을 쳤고, 시인과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어 봅니다.

 우리가 먹는 밥 한 그릇은 돈 몇 푼으로 얻을 수 있는 밥 한 그릇이 아니에요. 농사지은 분들 피땀이 서려 있습니다. 해와 물과 바람과 땅이 어우러져 있어요. 나락에게는 자기 몸을 바치는 아픔이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먹고 있어요. 돈을 먹는 게 아니라 생명을 먹으며 우리 생명을 이어가요.

 아. 시 하나를 읽으며 이런 걸 느낄 수 있다니. 그래서 이런 시를 듬뿍 담은 시모음을 만나서 찬찬히 읽는 맛은 그 무엇과도 견주기 어렵습니다.


 [엄마] 으아아앙!
 [아이] 왜 울어 엄마? 무슨 일 있는 거야?
 [엄마] 지난 여름에 비해 올해는 체중이 너무 늘어서 비키니를 입으면 흉측해 보여!
 [아이] 지구 인구의 반은 먹을 게 없어서 단지 1그램도 살찌지 못하는 판국에, 엄마는 부끄러워서 위로 받으려고 그런 말이나 하고…… 너무한다는 생각 안 들어?


 어젯밤 ‘끼노’란 아르헨티나 만화가가 그린 《마팔다》(아트나인,2004) 7권을 보았습니다. 7권을 여는 만화 가운데 둘째 편에 “엄마가 비키니 수영복을 못 입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초등학교 다니는 꼬마 마팔다는 엄마가 살쪄서 비키니를 못 입는 걱정보다는, 가난한 나라에서 굶고 있는 가녀린 사람들 걱정을 하라고 한 마디 툭 쏩니다.

 《마팔다》란 만화는 1964년∼1973년에 아르헨티나 만화잡지와 일간지에 이어실렸다고 합니다. 무정부주의, 인본주의, 세계평화, 사랑과 믿음과 평등, …… 여러 가지를 말한다고도 말할 수 있지만, 그런 사상보다는 ‘한 칸 한 칸에 담는 뼈있는 이야기’가 이 책을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합니다.

 “지난 여름에 비해 올해는 체중이 너무 늘어서 비키니를 입으면 흉측해 보여!”까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고, 연속극이나 영화에서도 흔히 나오는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그 다음에 어떤 말을 넣으면 좋을까요?

 참 좋다고 할 만한 책, 읽어서 가슴 뿌듯하다고 말할 수 있는 책이라면 그 다음 대목, 마지막 넷째 칸에서 우리 가슴으로 파고들거나 뒷통수를 칠 뿐 아니라, 우리가 옳고 착하고 아름답게 생각하며 살아갈 길을 밝혀 줍니다. 이런 데에서도 책을 읽는 맛을 담뿍 느낄 수 있어요.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책을 읽는 일이란 어떤 일일까요?

 미처 몰랐거나, 제대로 몰랐던 일을 알아가면서 ‘아, 내가 너무 나만 생각하면서 편하게 살았구나’ 하는 걸 깨닫고 팔을 걷어부칠 줄 아는 일은 아닐까요? 콩 한 쪽도 나눠 먹듯 조그마한 힘이라도 보태고 나누는 일은 아닐는지요?

 머리속에 지식만 집어넣는 일은 ‘책읽기’가 아닙니다. 그건 용두질(자위행위)이라고 생각해요. 책읽기란 지식을 익히는 일을 넘어서 우리 마음에 살뜰하고 아름다운 생각을 아로새기는 일이에요. 생각을 아로새기기만 할 게 아니라 우리 삶에 받아들여서 자기 깜냥대로 실천할 수 있는 길을 찾아가는 길이고요. 그래서 저는 책읽기를 좋아하고 즐깁니다. 목소리를 들으려고요, 울음소리와 웃음소리를 들으려고요. 가슴으로 파고드는 한 마디를 듣고, ‘어, 지금 내가 뭘하고 있지? 어디에 있지?’를 느끼려고요. (2004.6.11.처음 씀 /2006.12.26.고쳐 씀)

***
요즘 “책을 안 읽는다”는 말이 많고 “책을 읽자”는 운동도 합니다. 그런 여러 가지 일도 나름대로 까닭이 있고 좋기도 하지만, 중요한 본질을 놓치지 싶어요. 그냥 무턱대로 “책을 읽자”고 하기보다는, 책을 읽으니 이렇게 좋더라, 이런 것을 함께 나누는 책을 읽자고 넌지시 이야기를 들려주면 더 좋으리라 생각해요. 그런 뜻에서 이런 기획글을 꾸준하게 써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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