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사진책 - 삶과 이야기가 있는 사진
최종규 지음 / 눈빛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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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책 읽기 372


사진 없는 사진책으로 숲을 배우다

― 내가 사랑한 사진책, 삶과 이야기가 있는 사진
 최종규
 눈빛, 2018.7.9.


사진은 빛그림이기도 한데, 빛그림이란 우리를 둘러싼 모든 빛(모습)을 담은 그림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대로, 또는 눈으로 못 보더라도 자외선이나 적외선 같은 다른 테두리 빛을 기계를 써서 담는 그림입니다. 사진은 ‘빛(모습)’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듯이 나타내는 삶이라 할 텐데요, 사전은 ‘말(생각)’을 바탕으로 그림으로 그리는 삶이라 할 테니, 둘은 ‘그리다’라는 얼거리에서 만납니다. 빛을 그리면서 삶을 나타내거나 나누는 사진입니다. 말을 그리면서 삶을 나타내거나 나누는 사전이에요. (7쪽)


  제가 사진을 처음으로 느낀 때는 열 살 무렵입니다. 그때까지는 누가 사진을 찍거나 말거나 못 느끼기 일쑤였고, 찍든 말든 대수롭지 않았습니다. 아니, 사진이나 사진기를 아예 모르다시피 살았어요. 사진기 앞이라 꺼린다든지, 사진을 찍는다고 해서 얼굴이 굳어질 일도 없습니다.

  열 살 무렵 처음으로 사진을 느낄 적에 ‘스스로 보는 대로 찍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안 쓰느라 놀리는 사진기가 하나 떠올랐고, 필름이 있는가를 살펴서 하늘에 대고 구름을 찍었어요. 4층 툇마루에 기대서서 하늘바라기를 한참 하다가 구름빛이 매우 곱다고 여기면서 구경을 하는데, 끝없이 달라지면서 춤추는 구름짓을 잊지 않고 싶더군요. 마음에 담아도 안 잊겠지만, 구름은 늘 달라지기에 어느 한 가지 모습을 확 붙잡고 싶었어요.


사진을 배우고 싶은 분이라면, 굳이 대학교에 안 가도 됩니다. 구태여 미국이나 유럽이나 일본으로 배움마실을 떠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면 뭘 해야 할까요? 사진을 배우고 싶다면 ‘무엇을 사진으로 찍어서 이야기를 엮고 싶은가?’부터 알 노릇이에요. 무엇을 사진으로 찍겠노라는 생각이 없다면, 그리고 사진으로 어떤 이야기를 엮겠노라는 뜻이 없다면, 우리는 사진을 배울 수 없습니다. (10쪽)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사진’이라고 하면 다큐멘터리·신문·광고·패션·예술, 이렇게 다섯 가지 즈음만 사진으로 여기는 듯합니다. 생활 사진을 사진으로 여기는 생각을 마주하기는 몹시 어렵습니다. 리얼리즘이든 사실주의이든, 이런 이론을 떠나서, 삶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찍는 사진을 아끼는 눈길이 좀처럼 자라지 못합니다. (22쪽)



  열 살 무렵 구름을 사진으로 찍고서 꽤 오래도록 사진을 잊습니다. 국민학교 6학년 졸업사진을 찍을 즈음 개구쟁이 짓이 사진에 담기면 두고두고 재미있겠다고 여겼다가,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다녀올 적에 몇 장 찍어 보는데, 굳이 사진이나 사진기가 있어야 한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돌아보니 그렇습니다. 종이라고 하는 데에 얹지 않아도 마음에 늘 얹기 마련이에요. 마음에 새기는 이야기라면 종이에 따로 새겨야 하지 않습니다. 종이에 따로 새겨서 모으면 짐이 잔뜩 늘어나거든요. 그런데 이런 마음을 넘어선다면, 종이에 따로 새겨서 모을 적에 짐이 늘어나더라도 좋다고 여기는 마음이 된다면, 벽에 붙이고 사진첩으로 건사하며 이웃한테 선물할 사진을 얻고 싶다면, 비로소 두 손에 사진기를 쥘 만하지 싶습니다.


사진은 늘 오늘을 찍습니다. 사진은 늘 모레를 바라보면서 오늘을 찍습니다. 사진은 늘 오늘을 찍는데, 사진에 찍힌 오늘은 곧바로 어제가 됩니다. 오늘을 찍은 사진은 곧바로 어제가 되지만, 어제가 되는 오늘 찍은 사진은 늘 모레로 나아갑니다. 우리 가슴을 적시는 사진은 언제 어디에서나 오늘과 어제와 모레가 한결로 흐릅니다. 어느 한 가지만 똑 떨어진다면, 이것은 ‘작품’은 될 터이나 사진은 못 됩니다. 어느 한 가지만 두드러진다면, 이것은 ‘기록’은 될 테지만 사진은 안 됩니다. 어느 한 가지만 생각해서 찍는다면, 이것은 ‘문화’나 ‘역사’는 될 테지만 사진은 될 수 없습니다. (76∼77쪽)


  《내가 사랑한 사진책》(최종규, 눈빛, 2018)을 써냈습니다. 1998년 가을에 처음으로 제 사진기를 거느리면서 사진찍기에 발을 담갔고, 사진으로 이룬 책은 1994년부터 눈여겨보았습니다. 한국말사전을 짓는 길을 걷는 동안 둘레에서 사진책도 잘 살펴야 한다는 말을 들었고, 1998년 즈음부터 사진책을 하나둘 장만해서 혼자 배우는 길을 걸었습니다.

  따로 대학교 사진학과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대학교는 통·번역 배움길을 가다가 다섯 학기만 마치고 그만두었는데, 신문방송학과 부전공 네 해치 수업을 한 해 동안 몰아서 다 듣는 동안 보도사진 강좌를 한 학기 들어 본 적은 있습니다. 상업사진 스튜디오라든지 내로라하는 사진가 곁에서 배운 적은 없습니다. 혼자 사진책을 읽고, 혼자 사진을 찍으면서 스스로 배우는 길을 걸었어요. 이러면서 사전짓기(한국말사전을 새로 쓰는 일)로 살림을 꾸렸습니다.

  사전을 지으면서 곁에 사진을 두는 동안 ‘사전·사진’이 매우 닮으면서 다르구나 하고 느꼈어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참으로 다르되, 속살은 매우 닮습니다. 담고 싶은 삶을 담는 얼거리가 비슷하고, 눈으로 보이는 그림이나 눈으로 읽는 글이라는 대목이 다릅니다. 나타내고 싶은 마음을 굵고 짧게 나타내는 결이 비슷하고, 기계를 쓰거나 두툼한 종이꾸러미를 쓰는 대목이 다릅니다.



따뜻함을 느끼기에 사진을 찍고, 따뜻함을 느낀 마음으로 사진을 찍습니다. 따뜻함을 나누려고 사진을 찍고, 따뜻한 삶을 이야기하려고 사진을 찍어요. 따뜻한 사랑이 되고자 하며 사진을 찍고, 따뜻하게 어깨동무하는 살림을 짓는 꿈을 노래하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264쪽)

한손을 거들어 살림하면서 사진이랑 삶이랑 사랑을 가꿉니다. 한손은 집안에 즐거움과 기쁨이 감돌도록 힘을 씁니다. 다른 한손은 집안에 이야기꽃이 피어나도록 도란도란 말을 섞고 사진을 찍습니다. 한손을 거들어 밥을 짓고 글을 씁니다. 한손은 너와 나 사이에 흐르는 꿈을 짓고, 다른 한손은 너와 내가 저마다 나아갈 사랑스러운 길을 닦습니다. (277쪽)


  《내가 사랑한 사진책》은 혼자서 꿋꿋하게 사진을 배우고 사랑하는 길을 걸으면서 ‘배우고 사랑한 이야기’를 다룬 책입니다. 스무 해 남짓 사진길을 걷고 보니, 대학교 사진학과를 굳이 안 다녀도 얼마든지 사진을 즐겁게 찍거나 읽을 수 있다고 깨닫습니다. 한국에서는 ‘어느 대학 사진학과’를 나왔느냐 안 나왔느냐로 줄을 세운다고 합니다. 그 대학 사진학과를 안 나올 적에는 한국 사진밭에서는 따돌림을 받는다고 하는군요. 다만 이마저도 요즈막에서야 알았어요. 대학교도 그만두었고, 사진학과는 아예 한 발도 안 담그며 혼자 사진을 익혔으니, 사진밭에 줄이 그렇게 단단한 줄 알 턱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 곁에는 늘 상냥한 스승이나 벗이 있습니다. 바로 사진책입니다. 화보 같은 사진책도, ‘사진 없이 글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이론서’인 사진책도, 지나간 날을 읽을 수 있는 졸업앨범이라는 사진책도, 나라 안팎 온갖 작가들이 일구어 놓은 사진책도, 독재정권 대통령 비서실 같은 데에서 독재 허수아비를 퍼뜨리려고 내놓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 화보집 같은 사진책도, 만화로 다루는 사진책도, 그림으로 들려주는 사진 이야기가 흐르는 책도, 저마다 다르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승이자 벗이었어요.

  무엇보다도 사진가란 이름으로 작품이나 예술을 해야만 사진책이 아닌 줄 배웠습니다. 사진가란 이름이 없어도, 또 이름이 안 알려지거나 덜 알려진 사진가 한 사람이 일군 사진책도 매우 아름다운 줄 배웠어요. 외려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진가 가운데 쭉정이 사진이 참 많은 줄 배우기도 했습니다.


‘살면서 찍는 사진’하고 ‘구경하며 찍는 사진’은 다릅니다. 골목마을에 살면서 모든 빛과 어둠을 고스란히 바라보면서 봄·여름·가을·겨울을 누리는 몸으로 아침·낮·저녁·밤·새벽을 마주하는 사진이랑, 골목여행을 한다면서 어쩌다가 한 번 찾아와서 한두 시간 쓱 훑고 지나가며 찍는 사진은 사뭇 다르기 마련입니다. (34쪽)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주기에 문화가 될까요? 글로 적어서 책이나 논문으로 선보이면 역사가 될까요? 사진으로 찍지 않고 마음속에 담는 문화는 무엇일까요? 글로 쓰지 않고 책으로 엮지 않는 역사는 무엇일까요? (172쪽)



  사진찍기는 글쓰기하고 같다고 느낍니다. 사진읽기는 글읽기하고 같다고 느끼고요. 사진찍기는 삶짓기하고 같다고 느끼며, 사진읽기는 삶읽기하고 같구나 싶어요. 말을 다루는 길을 걸으며 사전을 지을 적마다‘ 말 = 삶’이라고 뚜렷이 느낍니다. 이 길을 걸으며 사진을 길벗으로 삼으니‘ 사진 = 삶’이라고 똑같이 느껴요.

  저는 《내가 사랑한 사진책》을 ‘사진이랑 책이랑, 사진마실, 사진벗님, 사진누리, 사진바람, 사진노래, 사진빛살, 사진사랑, 사진수다’처럼 아홉 갈래로 나누어서 써 보았습니다. 사진책 쉰 권을 다루었습니다. 퍽 알려진 사진책을 다루기도 했지만, 비매품 사진책을 다루기도 했고, 사진밭에서 이름이 아예 안 알려진 분이 빚은 사진책을 다루기도 했습니다. 사진책마다 어떤 이야기를 다루는가를 놓고서 먼저 한 줄로 갈무리를 하고서 속뜻을 풀어내 보려 했습니다.


사랑·꿈으로 오래도록 품을 들인 ‘골목이웃’ 사진 ― 골목안 풍경 전집
우리 곁 고운 이웃을 바라보는 손길 ― 우편집배원 최씨
옛 서울 냇가로 마실을 가다 ― 시간 속의 강
신호등 없던 이쁜 서울을 그린다 ― 변모하는 서울
작은 사진에 담는 작은 꿈 ― 배다리 사진 이야기, 창영동 사는 이야기
곁에 있는 사랑을 사진으로 찍는다 ― 풍경소리에 바람이 머물다
바로 오늘, 처음 한쪽을 넘긴다 ― 예스터데이, 추억의 1970년대



  《내가 사랑한 사진책》은 사진 없는 사진책입니다. 사진을 오직 글로만 풀어낸 사진책입니다. 굳이 사진을 곁들이지 않은 사진책입니다. 사진을 제대로 바라보자면 때로는 사진을 모두 걷어내고서 글만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사진을 그려 보아야 한다는 줄거리를 다루는 사진책입니다.
  《내가 사랑한 사진책》은 ‘사진기 사랑’이 아닌 ‘사진 사랑’을 말하려는 사진책입니다. 이 책은 ‘사진학과 연줄’이 아닌 ‘사진을 사랑하는 사람’을 말하려는 사진책입니다. 그리고 ‘이름난 작가라는 허울’이 아닌 ‘아름다운 삶을 짓는 알맹이’를 함께 들여다보면서 나누자고 하는 마음을 드러내려 하는 사진책입니다.


개구리 노랫소리와 풀벌레 노랫소리를 담고 싶어요. 소리를 어떻게 사진으로 담느냐 궁금해할 분이 있을 테지만, 참말 소리도 사진으로 담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개구리 노랫소리 들으며 사르르 녹는 즐거움이 사진 한 장 찍으며 천천히 깃듭니다. 풀벌레 노랫소리 들으며 살살 퍼지는 즐거움이 사진 두 장 찍으며 시나브로 뱁니다. (59쪽)


  저는 사진을 배우면서 사진기나 렌즈를 장만하려고 이태나 세 해쯤 목돈을 모으곤 했습니다. 오늘 여기에서 더 나은 사진기나 렌즈를 살 수 있는 돈이 없으면, 돈이 없는 대로 아주 값싼 사진기나 렌즈로 마음을 담아내자고 여겼습니다.

  필름을 사려고 적금을 들지요. 더 나은 필름스캐너를 장만하려고 적금을 들고요. 한 발자국씩, 더디지만 씩씩하게 사진길을 걸으려 했습니다. 번쩍거리는 서울 한복판 갤러리에서 사진을 걸지 않아도 좋다고 여겼습니다. 골목마을 담벼락에 사진을 걸어도 즐거웠고, 헌책집 책시렁에 누름못으로 사진을 걸쳐도 재미있었어요.

  제가 찍는 사진에 오롯이 들어와 준 사람이나 집이 있으면, 반드시 사진을 종이에 앉혀서 나중에 갖다 드리려 했습니다. 찍혀 주는 사람이나 집이 있기에 찍을 수 있는 눈이나 손이 발돋움할 수 있구나 싶었어요. 정갈하면서 아름다이 살아가는 숨결이 이웃에 있으니, 언제나 새롭게 바라보거나 마주하면서 사진을 찍는구나 싶었습니다.


값비싸거나 값진 장비나 기계가 있어야 ‘아이 사진’을 더 잘 찍지 않습니다. 더 뛰어난 장비나 기계를 어깨에 걸쳐야 ‘곁님이나 사랑님 사진’을 더 잘 찍지 않아요. 중형사진기나 대형사진기쯤 있어야 ‘내가 사랑하는 풍경 사진’을 더 잘 찍지 않지요. 사랑으로 다가서려는 마음이 있을 적에 비로소 즐겁게 찍는 사진입니다. 즐겁게 찍고 사랑스레 찍는 사진이라면, 이렇게 찍은 사진은 모두 ‘잘 찍은 사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사랑으로 다가서면서 찍는 사진에는 늘 이야기가 흐르니까요. (108쪽)

사진에는 좋거나 나쁜 빛이 없습니다. 어떻게 찍든 모두 사진입니다. 스스로 살아가는 모습을 담는 사진이고, 스스로 살아가는 대로 담기는 빛입니다. (155쪽)



  사진은 예술인가 아닌가 하는 말다툼이 꽤 오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말다툼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면서 참 덧없이 다툼질을 하는구나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은 예술이면서 예술이 아니니까요. 사진은 사진 그대로 언제나 예술이지만, 예술이라는 이름에 갇히려 하면 예술일 까닭이 없습니다.

  사진을 사진으로 바라보며 다루면 언제나 ‘사진이면서 예술’이에요. 그러나 사진을 예술품이나 전시품이나 재산으로 삼으려 하면 언제나 ‘덧없는 허수아비’이지 싶습니다.

  몇 가지 보기를 들 수 있습니다. 비싼값에 팔려는 속셈으로 금소나무를 함부로 벤 사진가 아무개가 있습니다. 비싼값에 작품을 파는 앞모습 뒤에서는 성추행을 일삼은 사진가 아무개가 있습니다. 다른 나라 사진가 작품을 흉내내거나 베끼는 사진가 아무개도 있어요. 공모전이나 협회나 학벌로 금을 그으면서 권력이 되는 사진가 여럿도 있고요.

  다만 사진은 사진일 뿐입니다. 얄궂은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얄궂게 찍은 사진은, 그대로 얄궂은 사진입니다. 참한 마음으로 마주하면서 참하게 찍은 사진은, 그대로 참한 사진, 곧 참사진입니다.


사진을 사진답게 찍을 때에 비로소 사진답다고 합니다. 그럴듯한 모습을 찍으면 그저 ‘그럴듯할’ 뿐입니다. 멋있어 보이게 찍는다면 그저 ‘멋있어 보일’ 뿐이지요. 이렇게 만지작거리거나 저렇게 꾸민다고 해서 사진이 빛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붙이거나 저렇게 자른다고 해서 사진이 도드라지지 않습니다. (332쪽)

사진가는 으레 ‘찍는 사람’으로 여기기 마련이지만, 사진가라고 하는 자리는 숱한 사람을 오랫동안 꾸준히 자꾸자꾸 다시 마주하는 동안 ‘배우는 사람’이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즐거움을 배우면서 즐거움을 사진에 담고, 아름다움을 배우면서 아름다움을 사진에 담으리라 느껴요. 사랑을 배우면서 사랑을 사진에 싣고, 기쁜 꿈을 배우면서 기쁜 꿈을 사진에 실으리라 느껴요. 맑은 눈짓을 배우면서 맑은 눈짓을 사진으로 옮기고, 밝은 웃음을 배우면서 밝은 웃음을 사진으로 옮기리라 느낍니다. (395쪽)



  한국에는 사진가라는 이름으로 사진을 찍는 분이 무척 많습니다. 값지거나 값비싼 사진기도 매우 많이 팔렸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은 사진책이 거의 안 나올 뿐 아니라, 애써 나온 사진책이 거의 안 팔리기 일쑤입니다.

  비싼 사진기를 어깨에 걸친 사람은 많은데, 단돈 1∼2만 원짜리 사진책은 거들떠보지 않는다면, 이이는 사진가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이가 쓰는 사진가라는 이름은 무엇일까요?

  오백만 원짜리 렌즈는 가볍게 장만하고, 이천만 원이나 오천만 원짜리 장비도 거뜬히 장만하지만, 5만 원짜리 사진책은 비싸다고 말한다면, 이이는 어떤 사진가일까요? 오백만 원짜리 렌즈 하나를 덜 장만한다면, 5만 원짜리 사진책을 100권 장만할 수 있습니다. 이천만 원짜리 장비 하나를 덜 산다면, 2만 원짜리 사진책을 1000권 장만할 수 있습니다.

  사진가는 참으로 많고, 사진기도 참으로 많이 팔려서 쓰는데, 왜 한국사람은 한국이라는 터전을 스스로 새로이 바라보거나 마주하면서 사진으로 사랑스레 담아내어 나누는 길에는 좀처럼 서지 못할까요? 작품이나 예술이 되려는 사진이 아닌, 수수한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하는 삶이나 살림을 사랑하려는 사진은 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울까요?

  그리고, 사진이론이나 사진비평은 왜 하나같이 일본 한자말에 번역 말씨로 덮어씌워야 하고, 아예 영어로 가득 채워야만 한다고 여길까요? 문학하는 분들은 시집에 붙은 비평(시평)이 매우 딱딱하고 어렵다고들 말하는데요, 사진비평은 문학비평보다 훨씬 딱딱하고 어려운 말로 뒤집어씌우기 일쑤입니다.


사진기라는 기계는 평등하면서 평등하지 않습니다. 사진기라는 기계가 평등하다면, 대학교 사진학과를 나왔든 나오지 않았든 이 기계를 손에 쥐는 사람은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어린이도 할머니도 젊은이도 얼마든지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사진기라는 기계가 평등하지 않다면 값에 따라 값어치가 달라서, 더 돈을 치르면 해상도가 더 빼어난 기계를 손에 쥘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대학교 사진학과라든지 사진밭 여러 어른 뒷줄에 서서 이름을 펴기도 합니다. (421∼422쪽)


  삶으로 스밀 수 있기에 비로소 문학이요 사진이라고 느낍니다. 살림을 짓는 살림지기 손끝에서도 넉넉히 태어날 수 있을 적에 비로소 문학이요 사진이지 싶습니다. 어느 대학교 사진학과를 나와서 전문가 노릇을 해야만 찍거나 읽는 사진이 아닙니다. 부엌일을 하는 살림지기 손으로도 찍거나 읽을 수 있을 때에 사진입니다.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하고도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면서 새롭게 생각을 지필 적에 사진입니다.

  우리는 두 손을 펴서 두 손가락을 모아 네모틀을 짜면서 ‘눈사진(눈짓을 하며 찍는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때로는 손가락을 둥글게 붙여서 둥그런 눈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사진에 황금분할이 있다고 말합니다만, 황금분할보다는 ‘즐거운 마음’하고 ‘사랑스러운 눈길’이 먼저 있을 적에 아름다우리라 느껴요. 즐거운 마음이기에 작품이란 이름도 따르고, 사랑스러운 눈길이기에 예술이란 이름도 찾아오지 싶습니다.

  이름값이나 학교줄이나 장비병이란 말이 사진밭에서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이 나라 사진밭에 작가나 독자나 평론가 사이에서 “내가 사랑한 사진책” 이야기가 피어나기를 바랍니다. 저는 2007년 4월에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사진책도서관’을 열었습니다. 이 사진책도서관을 2011년에 전남 고흥으로 옮겨서 ‘사전 짓는 책숲집 숲노래, 사진책도서관+한국말사전 배움터+숲놀이터’로 바꾸어서 꾸립니다. 사진 곁에 사전이 있다고 느껴, 두 갈래 도서관으로 꾸리는데, 사진하고 사전 곁에 숲도 함께 있을 적에 비로소 아름다이 어우러지는구나 싶어서 ‘시골숲 사전·사진 도서관’을 꾸려요. 《내가 사랑한 사진책》은 ‘사진책도서관 + 사전도서관 + 숲도서관’ 열두 해를 사진 없는 말로 지어서 얻은 작은 열매입니다. 2018.7.27.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사진비평/사진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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