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책 아닌 이웃책을 읽는 나들이
― 숲에서 온 이야기를 새로 읽는다


  곁님 어머니를 모시고 일본 오사카로 배움마실을 나왔습니다. 아침 여덟 시에 길손집을 나선 뒤, 전철을 타고 스미노에타이샤(住吉大社) 역으로 갑니다. 이곳에 있는 blu room에 들러서 아침 아홉 시부터 낮 열두 시까지 배우고, 가까운 밥집에 들러 오붓하게 배를 채운 뒤에는, 스미노에타이샤 공원에서 두 시간 즈음 풀밭에 드러누워서 낮잠을 자거나 나무 그늘에서 싱그럽고 시원한 바람을 누려요.

  일본 오사카는 전남 고흥보다 온도가 높고 습도까지 높아요. 어느 가게나 건물에 들어가도 에어컨을 틀어놓습니다. 그런데 공원에 있는 우람한 나무를 찾아가서 그늘 밑에 앉거나 서면 등판을 옴팡 적셨던 땀이 곧 말라요. 참 대단하지요. 나무 그늘이란, 나무 그늘에서 맞이하는 바람이란, 에어컨은 견줄 수 없이 아주 시원할 뿐 아니라 싱그럽습니다.

  한여름에 모두 펄펄 끓는다고들 말하는데, 집이나 건물마다 에어컨을 켜기보다는 나무가 우람하게 자라서 그늘을 드리우는 곳에서 지내거나 일한다면 더위를 모르면서 이 여름을 날 만하지 싶어요. 냉방시설을 갖추느라 애쓰기보다 숲정이를 가꾸는 길을 헤아려야지 싶어요.

  공원 숲에서 쉬면서 모기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뿐 아니라 적잖은 사람들이 풀밭에 홀가분하게 앉거나 누워서 쉬어요. 매미를 잡으려고 애쓰는 일본 아이들이 많습니다. 송사리하고 금붕어를 구경하려고 시냇물이나 연못을 맴도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게다가 ‘바비큐 금지’라는 알림글이 있는데 고기를 구워먹는 일본사람이 있네요! ‘낚시 금지’라는 알림글이 붙은 곳에서 버젓이 금붕어를 낚는 일본사람도 있어요!

  깜짝 놀랍니다. 아니, 일본사람이라면 질서나 규칙을 빈틈없이 지키기로 이름이 높은데, 이곳에서는 질서나 규칙을 슬그머니 어기면서 노는 어른이 꽤 많군요!

  그나저나 일본 공원숲은 매미 노랫소리가 매우 우렁찹니다. 그냥 우렁차지 않아요. 귀가 쩌렁쩌렁 울릴 만큼 어마어마합니다. 매미 허물은 얼마나 많은지요. 땅에서 오랫동안 잠자고 깨어난 매미 애벌레가 낸 구멍이 참 많습니다. 이 많은 구멍으로 빠져나와서 바위에도, 건물 벽에도, 걸상에도, 풀줄기에도, 나뭇줄기랑 나뭇잎에도, 허물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 두 아이는 매미 허물 찾느라 바쁩니다. 저쪽으로 달려갔다 싶으면 어느새 두 손 가득 매미 허물을 모았고, 이 허물을 한 자리에 쌓습니다. 때때로 길바닥에 덜어진 매미를 집어서 풀밭으로 옮겨 줍니다. “밟힐 뻔한 매미야. 우리가 알아보고 풀밭으로 옮겨 주니 고맙대.” 매미를 살며시 집어서 옮기면서 마음으로 이야기를 하는 아이들입니다. 저도 맨발로 풀밭에 서서 나무하고 이야기를 해 보기로 합니다. 어른 둘이 아름으로 안을 만큼 커다란 나무한테도 마음으로 말을 걸어 보기로 합니다.

  바람이 상냥하게 붑니다. 우리뿐 아니라 이 공원을 찾아온 모든 사람한테 싱그러우면서 시원한 손길이 되어 줍니다. 그리고 공원뿐 아니라 건물에 있는 사람한테도, 살림집에서 살림을 가꾸는 이웃한테도 상냥한 바람결이 찾아갈 테지요.

  이 여름에 종이책을 못 읽더라도 이웃책을 읽어 봅니다. 바람이라는 이웃책을 읽습니다. 구름과 나무 그늘이라는 이웃책을 읽습니다. 그리고 오래된 공원이라는 이웃책을 읽어 볼 뿐 아니라, 한국 곁에 있는 섬나라 일본이라는 이웃책을 읽어 봅니다. 왜가리는 사람이 2미터 앞에까지 다가가도 얌전히 마주봅니다. 매미를 잡으려다가 놓친 아이들이 일본말로 뭔가 외칩니다. 아마 아쉽다고 외친 말일 테지요.

  책은 종이에도 있고, 종이가 되어 준 나무한테도 있습니다. 우리는 종이책을 펴면서 이 여름을 시원하게 나기도 하고, 종이책이 비롯한 너른 숲에서 피어난 싱그러운 바람을 읽으면서도 이 여름을 시원하게 즐깁니다. 2018.7.21.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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