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폭력을 행사하는가? - 일상에 스며 있는 차별과 편견의 폭력
정윤수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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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210


평화를 아끼지 않으니 폭력이 춤춘다
― 인간은 왜 폭력을 행사하는가?
 인권연대 기획, 정윤수·정주진·최영은·박윤경·오창익·정창수
 철수와영희, 2018.5.8.


사회가 발달할수록 직접적 폭력은 줄어드는 대신 문화적 폭력은 증가합니다 … 신문·방송에 등장하는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 눈밖에 난 사람들, 자신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처벌하고 싶었던 겁니다 … 문화를 통제하면 사람들의 생각도 지배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었을까요? (71쪽)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세상에 전쟁이나 각종 폭력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그만큼 평화를 아끼고 그곳에 에너지를 투자하는 사람들이 적기 때문이다”라고 말이죠. (76쪽)


  《인간은 왜 폭력을 행사하는가?》(인권연대, 철수와영희, 2018)를 읽으면서 참말로 궁금합니다. 우리는, 사람은, 한겨레는, 또 지구별 뭇나라는, 왜 폭력을 안 멈출까요? 주먹다짐이나 싸움질을 왜 안 그칠까요? 이 책에서 말하듯 우리 스스로 ‘평화에 힘을 안 쏟기 때문’에 평화보다 전쟁이나 폭력으로 나아갈까요?

  사회에 몸을 담근 어른은 사회폭력으로 고단합니다. 한국에서 여성은 성폭력으로 고달픕니다. 때로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성폭력으로 괴롭습니다. 학교를 다니는 어린이·푸름이는 학교폭력으로 시달리는데, 대학입시도 마치 주먹다짐과 같으니 ‘시험폭력·입시폭력·졸업장폭력’ 같은 이름을 붙여 볼 만합니다.

  그런데 가정폭력이 있고, 정부가 앞장서는 국가폭력이 있어요. 지자체에서도 이른바 ‘토호·유지’라는 이름으로 텃힘을 부리는 짓이 있지요. 가만히 보면 정규직하고 비정규직으로 가르는 일터도 폭력인 얼개입니다. 이주노동자를 놓고도 폭력이 있고, 이주가정한테도 폭력이 있어요.


한국사람들 중 대부분은 국민이 권리를 가지고 있고, 국가는 의무를 지고 있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잘 모릅니다. 학교에서도 ‘국민의 의무’만 달달 외우게 합니다. 그래서 인권에 대해 알고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167쪽)


  평화에 힘을 쏟는 사람이 적어서 평화보다는 전쟁이나 폭력에 기운다고 하는 대목을 읽고 한동안 책을 덮었습니다. 이 한 줄을 두고두고 곱씹어 보려고 책을 한동안 안 읽었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주먹다짐으로 무엇이 있는지 하나씩 떠올립니다. 그런데 우리 삶자리 어디에나 주먹다짐이 있습니다. 집, 마을, 학교를 비롯해서 지자체, 중앙정부에다가 사회, 정치, 일터, 군대 …… 게다가 ‘데이트폭력’마저 있어요.

  아니, 우리는 왜 이렇게 주먹다짐에 뒤덮인 채 살아갈까요? 우리는 주먹다짐을 좋아하는 삶일까요? 우리는 조금만 힘이 있어도 우리보다 여린 사람을 괴롭히는 재미로 살아가나요?


일자리가 부족한 게 누구 탓인가에 대해 우리 헌법은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바로 국가 탓입니다 국가가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려면 일자리 만드는 데 더 많은 세금을 쓰면 됩니다. 북유럽의 복지국가들은 인구 대비 20퍼센트 가까운 숫자를 국가가 직접 고용하고 있는 데 반해, 한국의 인구 대비 공공기관 채용 비율은 겨우 3퍼센트 남짓에 불과합니다. (169쪽)


  《인간은 왜 폭력을 행사하는가?》라는 책은 폭력하고 맞물려 평화나 인권이라는 틀로 우리 삶터를 읽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눈길을 우리한테 더 부드럽고 쉽고 따스하게 들려주려 합니다. 그래요. 그렇지요. 우리가 어릴 적부터 평화하고 인권을 배우고 누리고 나누고 함께하고 펴고 즐기는 하루라 한다면, 이때에는 폭력이라는 말을 모를 만해요. 평화로운 삶을 짓고 나누는 동안 평화를 마음에 담으니, 이때에는 누가 누구를 괴롭히거나 따돌릴 일이 없습니다.

  우리 보금자리부터 평화롭고 평등할 적에 마을이 평화롭고 평등하겠지요. 위아래가 없이, 신분도 계급도 없이, 돈이나 이름이나 힘으로 가르지 않을 적에, 비로소 폭력이란 말을 멀리 내보내면서 평화로운 학교, 평등한 집, 민주인 나라, 아름다운 마을, 사랑스러운 일터, 즐거운 고장 같은 이름이 샘솟으리라 봅니다.


여성가족부가 인권 걸림돌이라거나 여성들만 챙겨 주느라 남성의 인권이 침해된다는 등의 이야기도 곧잘 들립니다. 그런데 누군가의 인권을 챙겨 주는 일은 결코, 어떤 경우에도 다른 누군가의 인권침해로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자존감을 갖지 못한 일부 남성들의 괜한 푸념일 뿐입니다. 대한민국 헌법이 제32조의 노동권에 이어 제34조에서도 여성을 특별히 꼽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인간다운 생활을 하는 것이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훨씬 더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181쪽)


  우리는 평화를 배우지 못한 채 자라기에 평화하고 멀어질 만합니다. 우리는 평등을 누리지 못한 채 자랄 뿐 아니라, 학교에서 입시교육으로 바쁜 터라 평등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나머지 평등을 잊을 만합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평화나 평등을 잊거나 모르는 채 살던 어린이·푸름이가 군대에 가서 민주를 누리거나 느끼기란 어려워요. 갓 스무 살 나이에 일자리를 얻은 풋풋한 젊은이가 위계질서에 매여 힘겨운 하루라면 언제나 폭력이라는 굴레에 갇힐밖에 없습니다. 이러면서 젊은이 사이에서도 데이트폭력이 끊이지 않을 테고, 갖가지 성추행하고 성폭력도 불거지겠지요.

  사람다이 살아 보지 못한 나날이란, 평화도 평등도 민주도 누리지 못한 나날입니다. 눌린 채, 억눌린 채, 짓눌린 채, 꾹꾹 밟힌 채 입시에 시달리는 하루를 보내야 한다면, 이 아이들 앞날이 ‘폭력 아닌 평화’이기는 매우 어려우리라 느낍니다. 그리고 여느 때 여느 자리에서 어머니 아버지가 사이좋게 집살림을 가꾸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한다면, 또 어머니 아버지 아이가 다 같이 힘을 모아 집살림을 돌보는 길을 걷지 못한다면, 어린이·푸름이가 나중에 평화롭거나 평등하거나 민주다운 마음을 품기도 어려우리라 느껴요.


우리나라 지원 사업은 실제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에게 돌아가는 게 별로 없습니다. 사회간접시설에 투자하거나 무슨 공단을 만드는 식으로 간접 지원을 하기 때문이에요. (223쪽)

해마다 늘리고 있는 일자리 예산도 마찬가지예요. 전부 기업에 줍니다. 노동자들에게 직접 주면 포퓰리즘이니 뭐니 하면서 난리가 나잖아요. 이런 식의 국가 지원은 아주 오래되었어요. 박정희 시대의 방식이 지금껏 이어오고 있어요. 지금 우리나라 예산은 경제개발을 중시했던 1970년대 예산 구조를 고스란히 이어오고 있어요. 경제개발 예산이 20퍼센트를 차지합니다. (225쪽)


  평화로운 나라는 나라살림을 평화로운 정책에 씁니다. 평화롭지 못한 나라는 나라살림을 엉뚱하게 씁니다. 경제개발을 앞세울 적에는 평화하고 멉니다. 성장율이라는 숫자에 매인 개발정책은 평등하고 멉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태 성장율에 목을 매는 터전이었고, 학교에서도 이렇게 가르쳤어요. 평화하고 평등을 아끼고 북돋우는 길에는 힘을 거의 안 쏟거나 못 들이며 살아왔다고 할 만합니다.

  이제 이 길을 돌려야지 싶어요. 앞으로 이 길을 바꾸어야지 싶어요. 경제개발 아닌 다 같이 아름다운 터전을 헤아려야지 싶어요. 전쟁이나 폭력 아닌 평화를 바라보아야지 싶어요. 부드러이 손을 내밀어 함께 걷고, 어깨동무를 하며, 삶을 사랑으로 노래할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2018.5.14.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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