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질 것 같은 세계의 말 -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소수언어에 대하여
요시오카 노보루 지음, 니시 슈쿠 그림, 문방울 옮김 / 시드페이퍼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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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말은 사라졌다. 한국말은 안 사라질까?
― 사라질 것 같은 세계의 말
 요시오카 노보루·니시 슈쿠/문방울 옮김
 SEEDPAPER, 2018.3.12.


[루루흐] 열매가 풍성하게 열리다. 농작물이 많이 자라난 모양
농사는 자연과의 대화. 열심히 한다고 언제나 결실이 약속되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풍작은 누구에게나 기쁨을 주고, 웃음 짓게 합니다. 와, 올해는 옥수수가 ‘루루흐’로구나!
- 아야쿠초·케추아어 (90만 명, 페루) : 케추아어족에 속하는 케추아어파 남케추아어군 가운데 두 번째로 규모가 큰 언어이다. 페루 남부 산악 지대의 아야쿠초주와 우앙카벨리카주, 아푸 리막주 서부에서 사용하며 아야쿠초어라고도 한다. (15쪽)


  《사라질 것 같은 세계의 말》(요시오카 노보루·니시 슈쿠/문방울 옮김, SEEDPAPER, 2018)은 앞으로 이 지구별에서 사라지겠구나 싶은 말을 어느 곳에서 얼마나 쓰는가를 다룹니다. 쓰는 사람이 100만이 못 되는 말을 하나하나 짚는데, 맨끝에는 쓰는 사람이 0이 된 말을 다룹니다. 고작 3∼5사람만 쓰는 말이라든지, 10사람 즈음 쓰는 말을 다루기도 합니다.

  이 책을 읽다가 ‘마지막 야히’사람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설 무렵, 그곳에서 텃사람으로 살다가 차츰 삶터를 잃다가 마침내 딱 한 사람이 남았고, 마지막 한 사람이 ‘야히 인디언 박물관’에서 ‘박물관사람’으로 있다가  조용히 죽은 일이 있어요. 마지막 야히사람은 숲에서 스스로 살아가는 길을 흰둥이한테 몸으로 보여주고, 야히사람이 쓰던 야히말을 ‘사전으로 엮을 수 있도록’ 이이가 아는 모든 낱말을 들려주고 뜻을 밝혀 주었다고 합니다.


[오이본] 얼어붙은 호수나 강의 수면에 난 구멍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얼음에 난 구멍에서 건져 올리는 생활. 낚은 물고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을 만큼 혹독하고 기나긴 겨울이지만 천연 저장고 덕분에 풍요롭게 날 수 있어요.
- 사하어 (45만 명, 러시아) : 튀르크어족에 속한다. 사하족의 언어로 러시아 사하 공화국의 공용어이기도 하다. 약 48만 명 정도 되는 사하족 대부분이 사하어를 사용한다. 사하족은 과거 야쿠트족이라고 불렸지만 지금은 스스로 사하족이라고 부른다. (27쪽)


  박물관을 짓고 사전을 엮는다면 말이 글로 바뀌어 남을 수 있습니다. 다만 말이 살아남는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말이란, 소리에 담은 생각을 사람 스스로 머리를 움직여 입으로 터뜨려야 말일 테니까요. 종이에 남은 그림은 글일 뿐, 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사전을 알뜰히 남기더라도, 입으로 말을 할 적에는 높낮이나 길이가 있어요. 느낌을 담아서 낱말 하나하나를 소리내고, 다시 느낌을 담아서 낱말을 주렁주렁 엮어 월을 이야기하기에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에서 쓰는 말은 어떠할까요? 한국사람은 5천만이라는 숫자가 넘으니, 또 북녘이 있고, 일본·중국·중앙아시아에서 살아가는 한겨레가 있으니, 한국말은 사라질 일이 없을까요? 참말로 한국말은 사라지지 않을 만하다고 여겨도 될까요?


[보한타이오흐트] 기분 전환 하거나 잡담을 나누러 집을 방문하는 일
잠깐 잡담이라도 나누러 갈까. 웬만해선 행동의 목적이 되기 어려운 잡담을 일부러 하겠다고 누군가를 찾아가는 건 좋은 일이겠지요. 신빙성도, 요점도 없는 이야기를 나누러 오는 친구는 소중합니다.
- 아일랜드어 (13만 8000명, 아일랜드) : 인도·유럽어족 켈트어파에 속한다. 아일랜드 전역에서 사용하지만 모국어로 사용하는 인구는 15만 명이 채 되지 않는다. (47쪽)


  《사라질 것 같은 세계의 말》을 읽으면, 머잖아 사라지겠구나 싶은 여러 겨레 말을 짚으면서 낱말 하나를 가만히 보여줍니다. 이 말을 쓰는 겨레가 어떤 살림을 어떤 소리값에 담아서 ‘말’로 지어서 생각을 나누었는가를 들려줍니다.

  그러니까, 말이란 그냥 소리값이 아닌 살림을 밝힌 소리값인 셈입니다. 살아가는 결이나 흐름이나 모습이나 이야기를 소리에 얹어서 드러내기에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리를 흉내내기에 말한다고 하지 않아요. 살아가면서 생각이나 뜻을 소리로 밝히기에 말한다고 합니다. 마음 없이 뱉는 소리는 말이 되지 않아요. 마음을 담아 터뜨리는 소리이기에 비로소 말이 되어요.

  바로 이 대목을 헤아릴 수 있다면, 우리 한국말이 나아갈 길을 살짝이나마 어림할 만합니다. 무늬로만, 겉으로만, 껍데기로만, 시늉으로만 살아남을 말이 될는지, 아니면 속알맹이를 야물게 건사하거나 다스릴 줄 아는 말이 될는지, 우리 두 손에 달린 일입니다.


[스카마] 태양이 떠오르지 않는 계절
수십 일간 지속되는 춥고 어두운 겨울. 사람들은 별빛과 달빛에 의지하며 생활해요. 눈이 하얀 건 이 시기에 조금이라도 빛을 얻게 해 주려는 배려일지도 모릅니다. 고요한 하늘 가득 오로라가 장엄하게 펼쳐지는 것도 즐거움이지요.
- 사미어 (3만 5000명, 스칸디나비아 반도·핀란드·콜라 반도) : 우랄어족 사미 언어에 속한다. 언어 사용자는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러시아에 걸쳐 분포해 있다. 사미족의 민족어로 사용자 수는 그들 인구의 약 절반 정도이다. (63쪽)


  곰곰이 따지면 한국에서도 사라진 말이 많습니다.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일까요? 한국에서도 사라진 말이 있다니? 그러나 한국에서도 사라진 말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서울말’이 사라졌습니다. 매우 뜬금없다고 여기실 분이 있을는지 모르나, 참말 그렇습니다. 한국에서 표준말 아닌 서울말이 어느 말보다 일찌감치 사라졌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우리가 서울이란 고장에서 쓰는 말은 ‘국가 표준말’일 뿐, 서울이라는 고장에서 오랜 나날 텃사람으로 살아오던 사람이 쓰던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서울말 자국은 어디에 남았을까요? 1980년대 첫무렵에 ‘뿌리깊은 나무 민중자서전’이란 책이 나온 적 있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제 텃마을에서 거의 벗어난 적이 없고, 신문이나 방송이나 책을 본 일이 거의 없으며, 다른 고장 사람하고 거의 말을 섞은 적이 없는, 그야말로 ‘텃마을 텃사람’을 찾아서 이야기를 듣고, 고스란히 소리값으로 옮긴 책이지요. 이 책에서 ‘서울 텃사람’이 한 분 있는데, 이 서울 텃사람이 입으로 들려준 서울말은 오늘날 ‘국가 표준 서울말’하고 사뭇 다릅니다.

  이런 얼거리로 보면, 우리는 서울말을 비롯해 인천말, 부천말, 안산말, 시흥말, 고양말, 광주말(경기 광주), 수원말 같은, 수도권을 이룬 고장에서 쓰던 말은 모두 사라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 제주말을 쓰는 분이 퍽 많으나, 제주말도 살림자리나 문학이나 신문이나 학교 같은 곳에서 널리 쓰지 않는다면, 자취로만 남고 사라질 수 있습니다. 대구말, 부산말, 광주말(광역시)도 지역 신문이나 방송이며 학교에서 두루 쓰지 않으면, 몇 가지 낱말이나 높낮이(억양)만 남을 뿐, 대구말답거나 광주말다운 고장말은 자취를 감출 수 있어요.


[이요만테] 곰을 바치는 제사. 곰의 영혼을 신의 세계로 돌려보내는 의식
새끼 곰(곰의 모습을 한 신)을 잡아 마을에서 일정 기간 정성껏 기르다가 마을사람 모두가 기도하며 곰의 고기를 감사한 마음으로 먹고 그 영혼을 신의 세계로 돌려보내는 제사. 신은 인간 세계에 내려올 때 동물의 모습으로 변신해 살과 가죽을 사람을 위한 선물로 가져온다고 합니다.
- 아이누어 (5명, 훗카이도) : 계통적 고립어이다. 전국의 아이누족 인구는 10만 명 정도이지만 유창한 아이누어 사용자는 훗카이도에 3∼5명뿐이다. (111쪽)


  말이란 언제나 삶입니다. 삶을 고스란히 담는 말입니다. 말이 사라진다고 할 적에는, 말만 사라지지 않고 ‘말로 담아낸 삶’이 나란히 사라집니다. 한국에서 서울말이 사라졌을 적에는 서울이라는 고장에서 손수 살림을 짓던 얼거리가 나란히 사라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서울에서 소비생활을 하던 모습’이 아닌 ‘서울에서 자급자족을 하던 삶’이 사라지면서 서울말이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아주 깊은 시골자락에서 사는 분은 드문드문 읍내에 다니기도 하고, 텔레비전을 보기도 하지만, 스스로 살림을 짓는 길을 가기에 오랜 고장말을 입에 달고서 살아갑니다. 제 살림이 있기에 제 말이 있는 얼거리입니다. 손수 짓는 삶이 있기에 오랜 텃말이 몸에 익숙합니다.

  한국은 5천만을 웃도는 숫자가 되니 ‘표준 한국말’은 사라질 일이 없을 만합니다. 다만 한국을 이루는 여러 고장마다 다른 살림을 나타내던 고장말은 가뭇없이 사라질 만합니다. 그리고 표준 한국말은 살아남더라도, 속알이 야문 한국말이 아니라 번역 말씨나 일본 한자말에 휘청거리는 모습으로 살아남을 수 있어요.

  지구별 곳곳에서 숱한 말이 사라진 까닭은 의사소통 때문입니다. 영어를 써야 의사소통에 좋다고 하면서 매우 많은 나라에서 텃말이 사라졌습니다. 일본 훗카이도에서 아이누말이 사라지려는 까닭도 ‘표준 일본말을 써야 의사소통에 좋기’ 때문입니다.

  의사소통이 나쁘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다만 의사소통만 앞세워 삶이나 살림을 잊거나 등진다면, 의사소통만 앞세우면서 생각을 깊고 넓게 다스리거나 갈고닦는 길을 잊거나 놓친다면, 한국말 앞날은 어떻게 될까요? 2018.4.10.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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