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좀 생각합시다 36
왜 안 만들고 짓는가
미처 살피지 못할 적에는 제때나 제자리에 제대로 쓸 낱말을 모릅니다. 서두르지 않으면서 꾸준히 살피려 할 적에는 제때나 제자리에 제대로 쓸 낱말을 알 수 있습니다. 말을 알맞게 잘 하는 사람이 있다면, 꾸준히 살피고 받아들이면서 배운다는 뜻입니다. 말을 아직 알맞게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직 꾸준히 살필 줄 모르거나 엉성한 매무새 그대로 살아간다는 뜻이에요.
제가 하는 일을 ‘사전짓기’라고 말합니다. 사전이라고 하는 책은 으레 ‘엮다’를 써야 어울리지만, 저로서는 한국에서 새로운 사전을 쓰는 길을 가기에 ‘사전엮기’ 아닌 ‘사전짓기’입니다.
‘짓다’라는 낱말은 아직 없는 것을 처음으로 나타나도록 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국립국어원을 비롯한 여러 사전을 살피면 ‘짓다’라는 낱말을 ‘만들다’라는 낱말로 엉뚱하게 풀이합니다. 두 낱말은 결이 다른데 정작 한국말사전은 이 대목을 놓치거나 안 짚습니다.
한국말사전뿐 아니라 사람들 입이며 책이나 방송이며 “밥을 만들”고, “요리를 만들”고, “빵을 만들”고, “책을 만들”고, “영화를 만들”고, “사진을 만들”고, “작품을 만들”고, “집을 만들”고, “옷을 만들”어요. ‘만들다’는 공장에서 기계로 똑같은 것을 척척 내놓는 자리에 써야 알맞습니다. 틀대로 줄줄이 내놓는 모습이 ‘만들다’입니다. 그리고 ‘주어진 틀이나 연장이나 밑감에 따라 맞추어 이루는’ 때에 ‘만들다’를 써요. 밥도 책도 집도 옷도 ‘짓’습니다. 책은 때로 ‘엮’고, 빵은 ‘구우’며, 영화나 사진은 ‘찍’습니다. 작품은 ‘짓’거나 ‘이루’거나 ‘빚’습니다.
자리에 따라 쓰는 말이 다릅니다. 그냥 있는 자리가 아닌 살아가는 자리인 터라, 살림새에 맞추어 우리가 쓰는 말이 다르기 마련입니다. 오늘날에는 기계로 척척 찍는 아파트에 옷에 자동차에 가공식품에 떠밀리니 하나같이 ‘만들다’일는지 모르나, 손수 일구고 스스로 가꾸는 ‘지음길’을 아는 ‘지음벗’이 그립습니다. 2018.3.27.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