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기원전 480년 테르모필레 지역에서 벌어졌던 페르시아군과 그리스 연합군 사이의 전쟁으로 레오니우스 왕을 비롯한 그리스 연합군 대부분이 크세르크세스 왕이 이끈 페르시아군에게 전멸당하였다.

본문

마라톤 전투(Battle of Marathon, BC 490)에서의 패배 이후 그리스로의 세 번째 침공을 준비하던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1세(Darius Ⅰ, 재위 BC 522~BC 486)가 기원전 486년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Ⅰ, 재위 BC 486~BC 465)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크세르크세스 또한 자신의 아버지만큼 그리스 침공을 위하여 많은 준비를 해나갔다.

기원전 481년 드디어 30만의 페르시아 군사는 그리스를 향해 육로와 바다로 동시에 진격해나간다. 이를 전해들은 그리스 진영(그리스 본토와 에게해의 폴리스들)은 코린토스에 모여 동맹을 맺고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방어태세에 들어간다. 이들은 페르시아의 공격에 대항하고자 테르모필레(Thermopylae)라는 지역을 이용한 군사작전을 세운다.

테르모필레는 마케도니아 해안에 위치한 좁은 골짜기로 그리스로 가자면 꼭 통과해야 하는 지역이었으며 많은 군사들이 동시에 진격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장소였다. 따라서 아테네의 전략가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 BC 528?~BC 462?)는 이곳의 지리적 특성을 이용해 페르시아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동안 해상전투를 통하여 페르시아 해군을 먼저 무찌를 전략을 세웠다. 즉, 테르모필레에서는 육상결투를, 아르테미시온(곶)에서는 해상결투를 통해 페르시아군을 물리치려했다. 

작전에 따라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Leonidas, 재위 BC 487~BC 480)를 총지휘관으로 한 그리스 연합군 7천명은 테르모필레 지역으로 파견된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Herodotos, BC 484~BC 425)는 페르시아 육상 부대를 100만 여 명, 그리스연합군을 만 여 명으로 이야기했으나 오늘날의 연구에서는 지나치게 과장된 것으로 여겨진다.)

테르모필레 지역에 도착한 후 며칠간 그리스 진영을 정찰한 페르시아 군대는 도착 5일째 되는 날 그리스 연합군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테르모필레의 좁은 골짜기로는 대규모의 병력이 한꺼번에 진격하기 어려웠으므로 페르시아 군은 그리스 연합군에게 의해 번번이 저지를 당하고 만다. 그러던 중 그 지역의 한 그리스인이 페르시아 군대에게 그리스 연합군을 뒤에서 공격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있다고 밀고한다. 이에 페르시아 군은 밀고받은 우회로를 이용해 뒤에서 갑작스런 공격을 가한다. 당시 그리스 연합군은 분산 배치되어 있었고 레오니다스의 병력 천명(스파르타 정예군 300명 및 기타 연합군)만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수로 페르시아군대에 맞서야만 했다. 레오니다스와 그의 군사들은 페르시아에 강하게 저항했으나 뒤쪽에서 급습을 받은데 연이어 페르시아 지원부대의 전방 공격까지 받게되자 상당히 불리한 처지에 놓인다. 결국 이 전투로 인해 레오니다스를 비롯한 군사전원 사망하기에 이른다. 이들의 항전과 전사는 훗날 비문("지나는자여, 가서 스파르타인에게 전하라. 우리들 조국의 명을 받아 여기 잠들었노라")과 전설을 통해 널리 숭상되었다. 한편 분산되어 있던 연합군도 곧 페르시아군에게 제압당한다. 테르모필레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 사기가 높아진 페르시아 군은 아르테미시온까지 뚫고 아테네로 진격하였으나  살라미스 해전(Battle of Salamis, BC 480)에서 그리스군에게 크게 패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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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300'의 전투가 바로 테르모필레 전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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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야 [, The Twelfth Night]

요약
영국의 극작가 셰익스피어의 5막 희극.
대본작가 셰익스피어
국적 영국
구성 5막
초연연월 1601년 1월 6일
초연장소 엘리자베스 여왕 궁정
본문

1600년의 작품. 십이야란 크리스마스로부터 12일째에 해당하는 1월 6일을 의미하는데, 이 희극은 1601년 1월 6일 이탈리아의 오시노 공작을 환영하기 위하여 엘리자베스 여왕 궁정에서 초연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탈리아 계통의 설화에서 취재한 것으로, 똑같이 닮은 남녀 쌍둥이인 세바스찬과 바이올라는 배가 난파하여 서로 헤어지게 된다. 바이올라는 남장()을 하고 오시노 공작의 집에서 일을 하게 되는데, 사랑의 사자가 되어 일리야 성의 올리비아 백작부인에게 심부름을 가게 된다. 올리비아는 바이올라를 남자로 알고 사모의 정을 보낸다.

그러나 바이올라는 오시노 공작을 은근히 사랑한다. 이윽고 바이올라의 쌍둥이 형제인 세바스찬이 나타나자 올리비아는 그를 바이올라로 잘못 알고 결혼식을 올힌다. 마지막에는 모든 일이 판명되고 결국 바이올라는 공작의 아내가 된다. 극 중에서 청교도적 위선자인 말볼리오를 주정뱅이 노기사 토비 벨치 등이 조소를 퍼붓는 멋있는 장면이 있다. 셰익스피어의 대표적인 희곡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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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쉬즈 더 맨'의 원작이 바로 셰익스피어의 '십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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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메니데스 [BC 515?~BC 445?]

요약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엘레아학파의 시조. 존재와 비존재, 존재와 사유라는 철학의 중대문제로 출발했다. 이성()만이 진리이며 이에 반해 다수() ·생성·소멸 ·변화를 믿게 하는 감각은 모두가 오류의 근원이라 주장했다. 존재론() 및 인식론()에 영향을 주었다.
원어명 Parmenidēs
별칭 존재의 철학자
국적 그리스
활동분야 철학
출생지 고대 그리스 엘레아
주요작품 《자연에 대하여》
본문

엘레아 출생. 철학시 《자연에 대하여》가 약 160행 남아 있으며, 그 사상의 중심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립하는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만이 있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하는 근본사상으로부터 ‘존재하는 것’의 성질을 논리적으로 연역()하였다.

그것은 불생불멸()이고, 불가분()인 것이며, 불변부동()의 것으로서 완결된 둥근 구()처럼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 ‘존재하는 것’을 나타내는 사유(), 즉 이성()만이 진리이며, 이에 반하여 다수() ·생성() ·소멸 ·변화를 믿게 하는 감각()은 모두가 오류의 근원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 감각의 세계는 ‘존재하는 것(빛)’과 ‘존재하지 않는 것(어둠)’을 병치()하며, 이 두 요소로부터 모든 것을 합성하는 데서 발생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존재와 비존재, 존재와 사유라는 철학의 중대문제를 시사하고, 후에 대두하는 존재론() 및 인식론()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존재의 철학자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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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자주 언급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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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자유화운동이다. 이 운동을 막기 위하여 불법침략한 소련군의 군사개입사건을 포함하여 '체코사태'라고도 한다.
본문
"프라하의 봄"광장 / 프라하 시 중심부에 있는 "프라하의 봄" 혁명광장으로 알려진 바츨라프 광장. 대로 양 옆으로 상점, 은행, 카페가 줄지어 있다. 중세기에는 말(馬) 시장이었다.

1956년 소련 내에서 스탈린 격하운동이 있은 후에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스탈린주의자 노보트니 정권의 보수정책이 계속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의 민주 ·자유화의 열망이 점차 고조되어 갔으나, 노보트니 정권은 이를 외면한 채 소련만을 추종하였다.

1960년대 이에 반발한 체코슬로바키아의 지식층이 중심이 되어 민주 ·자유화의 실현을 위한 조직적인 운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이 물결에 밀려 마침내, 1968년 1월 노보트니 당 제1서기가 물러나고, 개혁파의 둡체크가 당 제1서기를, 체르니크가 수상을, 온건파 스보보다가 대통령직을 각각 맡았다.

이들 개혁파는 1968년 4월 체코슬로바키아공산당 중앙위 총회에서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 즉 민주 ·자유화노선을 제창하는 강령을 채택하였다. 그 내용은 재판의 독립, 견고한 의회제도의 확립, 사전검열제의 폐지, 민주적인 선거법제도의 창설,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보장, 국외여행 및 이주의 자유보장, 경찰정치의 부활저지, 경제계획의 추진,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동등한 권리에서의 연방제로의 이행, 자주독립에 대한 대외정책 추진 등이다. 따라서 사실상 검열제가 폐지되고 많은 정당 ·정치단체가 부활되었으며, 의회는 활발한 논의와 비판의 광장이 되었다.

이러한 자유화를 위한 정책적 변화가 있자 온 국민은 ‘프라하의 봄’이라 하여 공산체제로부터의 탈바꿈을 환영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이러한 체코사태가 동유럽 공산국가들에게 미칠 영향을 우려하여, 이 체제변화를 ‘마르크스 ·레닌주의로부터의 이탈’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불법으로 무력침공을 감행하였다.

1968년 8월 20일 소련군을 비롯한 바르샤바조약기구 5개국군 약 20만 명을 동원하여 침공함으로써, 이 자유화운동을 일시에 저지하고, 개혁파 주도자들을 숙청하였다. 1969년 4월 소련은 둡체크를 강제 해임시키고 후임 서기장후사크를 임명하였으며, 개혁파를 추종한 50여만 명의 당원을 제명 또는 숙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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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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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속악한 것, 가짜 또는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난 사이비 등을 뜻하는 미술 용어.
원어명 Kitsch(독)
본문

키치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1870년대 독일 남부에서였는데, 당시에는 예술가들 사이에서 ‘물건을 속여 팔거나 강매한다’는 뜻으로 쓰이다가 갈수록 의미가 확대되면서 저속한 미술품, 일상적인 예술, 대중 패션 등을 의미하는 폭넓은 용어로 쓰이게 되었다.

19세기 말에는 유럽 전역이 이미 급속한 산업화의 길을 걷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대중문화의 파급 속도도 빨라 중산층도 그림과 같은 예술품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에 따라 미술품이나 그림을 사들이려는 욕구가 강해졌다. 키치는 바로 이러한 중산층의 문화욕구를 만족시키는 그럴 듯한 그림을 비꼬는 의미로 사용하던 개념이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면서 고급문화나 고급예술과는 별개로 대중 속에 뿌리박은 하나의 예술 장르로까지 개념이 확대되어 현대 대중문화·소비문화 시대의 흐름을 형성하는 척도를 제공하기도 한다.

1970년대 한국에서 유행한 촌티패션을 비롯해 1990년대의 뚫린 청바지, 배꼽티, 패션의 복고 열풍 등도 하나의 키치 문화로 보는 경우가 많다. 키치 현상을 보편적인 사회현상, 인간과 사물 사이를 연결하는 하나의 유형, 일정한 틀에 얽매이지 않고 기능적이며 편안한 것을 추구하는 사회적 경향 등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출처-네이버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는 미학적 이상을 키치라 했다.(p285)

   '키치란 존재와 망각 사이에 있는 환승역'(p316)이라고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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