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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모두의 적 - 해적 한 명이 바꿔놓은 세계사의 결정적 장면
스티븐 존슨 지음, 강주헌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1년 6월
평점 :
이 책의 저자인 스티븐 존슨의 '탁월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오는가'와 '원더랜드', '미래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를 인상적으로 읽어서 이 책도 일단 기대부터 갖고 손에 들게 되었는데, 제목인 인류
모두의 적은 헨리 에브리라는 영국 출신의 해적으로 그가 어떻게 세계사를 바꾸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를 흥미롭게 추적하고 있다.
헨리 에브리가 좀 과장되지만 '인류 모두의 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1695년 수라트 서쪽 인도양에서
무굴제국의 보물선을 습격해 배에 실렸던 보물을 탈취하는 건 물론 배에 타고 있던 여자들을 강간하고
죽인 끔찍한 사건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이전에는 헨리 에브리라는 해적도, 위 사건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는데 이 당시 불법적인 해적과 합법적인 사략선 선장은 그 경계가 모호했다. 스페인의 무적
함대를 처부수는 큰 업적을 남긴 프랜시스 드레이크도 원래는 해적 출신이었지만 결국 영국의 영웅이
되었으니 당시로서는 해적이라고 무조건 적대시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저자는 해적이 현대적 의미의
테러를 최초로 이용한 집단이라고 보는데, '테러'라는 영어 단어는 대혁명 이후 공포정치가 횡행하던
때에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였던 제임스 먼로가 토머스 제퍼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이 책에선 1695년 9월 11일 헨리 에브리 선장이 이끄는 팬시호가 무굴제국의 배를 습격하여 약탈하기
까지의 과정과 그 이후 벌어진 일들을 차근차근 밝혀내고 있는데, 전에 읽었던 '무굴 황제'라는 책이
떠오를 정도로 무굴제국의 역사도 간략하게 정리하고 일등 항해사였던 헨리 에브리가 반란을 선동해
배를 탈취하고 머나먼 인도양까지 가게 된 사연이 흥미진진하게 그려진다. 흥미로운 건 무지막지할
줄 알았던 해적에게도 선상의 민주주의와 권력 분립, 공평한 보상 계획, 심각한 부상을 입은 경우에
대한 보험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자유, 평등과 복지가 보장되었다는 점이다. 암튼 팬스호가 무굴제국의
건스웨이호를 약탈해 엄청난 재물을 탈취한 것도 화제가 되었지만 무엇보다 무굴제국 황제 아우랑제브의
손녀(?)가 타고 있었는데 그녀를 포함한 여자들을 강간살해했으니 무굴제국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무굴제국과의 무역으로 큰 이익을 보고 있던 영국 동인도 회사도 에브리 일당의 난데없는 만행에
날벼락을 맞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직접 무장을 하게 되면서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무굴제국을
무너뜨리고 인도를 식민지화하게 된다. 영국 정부가 에브리 일당을 처벌하기 위해 나름 노력하지만
결국 에브리는 무사히 천수를 누리게 되는데 역사상 최초의 국제 현상수배범이라 할 수 있는 에브리
선장은 요즘 국제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테러범들의 효시라고도 할 수 있었다. 역시 이야기꾼답게
남들이 주목하지 않던 해적 에브리 선장이 일으킨 평지풍파를 다양한 관점에서 풍성한 자료를 바탕으로
새로운 해석을 끌어낸 스티븐 존슨의 역량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책이었는데 해적의 돌발적으로 일으킨
무모한 행동이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잘 보여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