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을 기다리는 사람
박시하 지음, 김현정 그림 / 알마 / 2016년 12월












 좋은 문장들이 많았다. 더 많이 건져냈어야 하는데, 후반부는 급하게 읽어서 그러지 못했다. 역시 시인은 글을 참 잘 쓴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았던 글들을 기록해본다. 박시하시인이 쓴 쇼팽의 삶과 음악이야기다. 시처럼 음악처럼 쓰인 산문이다.


 "음악의 이미지. 쇼팽의 이미지들은 흰색에 가깝다. 그의 음악이 하늘의 별처럼 검은 바탕 위에 하얀 빛으로 흩뿌려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빛나는 음, 하얀 발로 검은 모래 위를 걸어가는 것. 선율이 그리는 그림" -p19


 앙드레 지드는 "쇼팽은 제안하고, 가정하고, 넌지시 말을 건네고, 유혹하고, 설득한다. 그가 딱 잘라 말하는 일은 거의 없다" 고 말했다. -p19


 "그러나 기다리는 마음처럼 굳건한 것이 또 있을까. 기다림의 기쁨은 대상이 왔을 때의 감격에 있기보다는, 오히려 기다린다는 행위의 그 끈질김에 있는 것 같다. 기다릴 무언가가 있을 때, 비로소 행복하다. 그 대상에 집중하며 모든 감각이 깨어나고, 모든 권태가 사라지고, 세계가 서늘하게 선명해진다." -p36


 아직 오지 않은 삶의 묘연한 순간들은 얼마나 많은가. 아직 내가 만나지 못한 나의 문장들, 나의 시를 기다린다. 쇼팽이 기다렸듯이, 하나하나의 빗방울들이 공중에서 맺혔다가 이윽고 땅으로 떨어지듯, 그렇게 나에게 다가올 많은 순간들을, 마치 "삶 속의 어린아기" 같은 순간들을. 


 온기가 빠져나간 사랑에 미련을 갖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이별은 사람으로 하여금 끝나버린 사랑의 장소에 다시 서 있게 만든다. 이별의 일은 그런 일이다. 이미 내려왔고 다시는 오를 수 없는 사랑의 언덕 주변을 끊임없이 서성대는 것. 한때는 늠름하고 무성하게 자라났지만, 모든 꽃을 떨어뜨리고 열매도 맺지 못한 채 이제는 죽어버린 나무에게 또다시 물을 주고, 소용없을 줄 알면서도 그 나무를 자꾸만 찾아가는 것. 다시는 잎이 돋을 리 없는 앙상한 나뭇가지를 한없이 쓰다듬는 것. -p104

 

 이 글이 가장 마음에 와닿고 좋았다. 이별의 일은 사랑의 언덕 주변을 끊임없이 서성대는 것. 


 "이별의 일은 슬픔의 골짜기를 헤매면서 버려진 나를 구원하는 일이었다." -p108


 안개를 통해 보이는 저 풍경 즐겁지 않은가.

 창공에 별 태어나고, 창마다 불이 켜지고, 

 강물 같은 검은 연기 하늘에 솟아오르고,

 파리한 달빛 흘리듯 쏟아진다.

 나는 이렇게 봄 그리고 여름 그리고 또 가을들이 오는 것 보리라.

 그리고 단조로운 눈이 내리는 겨울이 오면,

 온 방의 덧창을 닫고 휘장을 내려

 밤 속에 내 동화 같은 궁전을 세우리                                    -p116


  보들레르가 밤을 찬양한 시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시다. 창공의 별. 파리한 달빛. 동화 같은 궁전. 이미지가 그려지는 아름다운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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