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유빠가 되려는 걸까요? 최근에 유시민씨의 책들을 즐겨보고 있습니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헐거운 저의 역사지식을 좀 더 탄탄하게 해주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대부분 제가 부족하다 느끼는 부분과 알고 싶었던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었습니다. 고마운 책이었습니다.

 

 좋은 글들을 소개합니다. 먼저 유태인과 팔레스타인에 관한 글입니다. 유태인의 이스라엘 건국은 정당화 될 수 있을까요?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유태민족이 2천 년 동안이나 극심한 차별을 당한 민족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특히 나치 독일이 저지른 대량학살은 그것을 방조하거나 적어도 방관한 유럽의 다른 민족들에게까지 상당한 죄의식을 안겨 주었다. 유태인이 그같은 박해를 받은 것은 전적으로 부당한 것이며, 유태민족이 모든 박해에 저항하여 평등한 민족적 권리를 찾거나 자기들의 나라를 세우려 노력하는 것은 너무나 정당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팔레스타인에 유태국가를 세웠다. 과연 유태민족에게 그럴 권리가 있는가. 그들 조상의 일부가 2천 년 전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땅이기 때문에 그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결코 그렇다고 할 수 없다. 말세가 되면 황금시대가 팔레스타인에서 열리게 될 것이라는 유태교의 종말론적 예언이 그 땅의 소유권에 대한 유태인의 주관적 확신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더욱이 팔레스타인 땅에 자손을 퍼뜨리고 땅을 경작하면서 나름의 언어와 문화와 역사를 가진 민족공동체를 가꾸어 온 것은 아랍인이었다.

 더욱이 시온주의자들은 자기의 불행한 처지와 고난에 대한 호소와 설득으로 협력을 구하지 않고 그 땅에 살고 있던 원주민을 무력으로 몰아냄으로써 이스라엘을 세웠다. 그 숱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끈질기게 종교와 문화전통을 지켜 온 눈물겨운 과거와, 그들이 이룩한 과학기술의 발전, 내게브사막을 옥토로 가꾼 눈부신 업적과 나름의 민주주의가 아무리 훌륭한 것일지라도,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아랍인이 아무리 몽매하고 그들의 정치체제가 아무리 낙후한 거일지라도, 식민주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아랍 민중이 민족 주체성에 눈떠 그것을 수호하려는 열망을 가진 20세기 중반에 유태인이 휘두른 무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시온주의는 민족주의와 같지 않다. 시온주의는 다른 민족을 물리적인 힘으로 내몰고 그 땅에 순수한 유태국가를 수립하려는 침략적 민족주의기 때문이다. 자기 나라를 세움으로써 수천 년에 걸쳐 당해 온 박해와 불행을 종식시키겠다고 결심한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에게 그 불행을 고스란히 떠넘기는 방법으로 목표를 달성했다. 만일 이러한 행위가 정당하다면 나치의 유태인 박해 역시 전적으로 나쁜 짓이라고 단죄하기 어려울 것이다. -p232-233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현대 중동문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데도 사람들의 관심 밖입니다. 저또한 과거에 그랬기 때문에 무어라 할말은 없습니다만, 다른 민족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우리나라가 일제 치하에 있었을때 다른 나라의 관심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심지어 일제강점기때 어떤 우국열사는 우리나라의 사정을 알리기 위해 다른 나라의 대사관에서 분신자살까지 하였습니다. 침략의 고통을 알고 있는 민족의 일원으로서 안타깝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유태인은 과거 홀로코스트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통해 재현하고 있습니다. 나치가 유태인을 홀로코스트에 가두었듯이 유태인은 팔레스타인민족을 가자지구에 가두고 있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유태인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요? 너무 익숙해져서 무감각해진 걸까요? 

 

 다음은 4.19 혁명때의 서울대 선언문입니다. 4.19혁명은 이승만 정권을 물러가게 한 민주화운동이었습니다. 학생운동이었습니다. 세계사를 빛낸 혁명이었습니다.

 

 긴 칠흑과 같은 밤의 계속이다. 나이 어린 학생 김주열의 참시를 보라! 그것은 가식 없는 전제주의 전횡의 발가벗은 나상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저들을 보라! 비굴하게도 위협과 폭력으로 우리들을 대하려 한다. 우리는 백보를 양보하고라도 인간적으로 부르짖어야 할 같은 학구의 양심을 강렬히 느낀다.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익임을 자랑한다. 일제의 철퇴 아래 미칠 듯 자유를 환호한 나의 아버지, 나의 형들과 같이!

 양심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영원한 민주주의의 사수파는 영광스럽기만 하다.

 보라! 현실의 뒷골목에서 용기 없는 자학을 되씹는 자까지 우리의 대열을 따른다. 나가자! 자유의 비밀은 용기일 뿐이다.

 우리의 대열은 이성과 양심과 평화, 그리고 자유에의 열렬한 사랑의 대열이다. 모든 법은 우리를 보장한다.

-p254, (서울대학교 선언문)

 

 말콤X에 대해 다룬 장도 무척좋았습니다.

 

 나의 것과 마틴 루터 킹 박사의 비폭력 행진은 접근방식은 다르지만 목표는 항상 같아서, 그 목표는 무방비상태의 흑인들에 대한 백인의 만행과 죄악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나라의 인종적 풍토에서, 흑인문제에 대한 접근방식의 '두 극단'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가, 즉 '비폭력' 의 킹 목사인가 아니면 소위 '폭력적' 이라는 나인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p327 

 

 여전히 인종차별은 지구를 뒤덮고 있습니다. 인류 전체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사견이지만 말콤X와 마틴 루터 킹 박사는 다른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다른 방식과 태도를 취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말콤X는 마틴 루터 킹 박사를 흑인 몸뚱아리에 백인 대가리를 달아 놓은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은 비교적 안정된 목사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된 '성공한 흑인' 이었습니다. 간디의 사상에 감명을 받고 비폭력 흑인 민권운동을 이끌었습니다. 그에 반해 말콤X의 삶은 비참했습니다. 잠시 말콤의 삶을 살펴봅시다.

 

  말콤은 1925년 5월 19일 미국 중부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침례교 목사로서 선조의 고향인 아프리카로 귀향해야 한다는 것을 설교하고 다녔다. 이 때문에 말콤 아버지의 다섯 형제는 광신적인 백인 우월주의 폭력단체인 KKK 단원들에게 참혹하게 살해되었다. 6남매의 네 번째 아이인 말콤도 일곱 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백인들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백인 주인에게 겁탈된 흑인 노예에게서 태어나 외모가 백인과 비슷했던 어머니 루이즈 리틀은 남편을 잃은 충격과 뒤어어 닥쳐 온 생활고 때문에 미쳐버렸다. 루이즈는 자기를 닮아 피부가 적살색이고 붉은 고수머리를 가진 말콤을 구박했다.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 겁탈자 아버지를 지독하게 미워했기 때문이다. 주 복지국 직원들이 루이스를 정신병원으로 데려갔고 말콤의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져 남의 집에 맡겨졌다.                              -p314

 

 말콤X의 아버지와 다섯형제는 백인들에게 살해당했습니다. 그리고 말콤의 어머니 루이즈는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백인 겁탈자로 인해 태어났습니다. 루이즈는 남편이 죽자 미쳐버립니다. 루이즈는 정신병원에 수감되고 말콤과 그의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이후 말콤은 문제아가 되고 사회적 차별에 모욕감을 느끼고 마음의 벽을 쌓게 됩니다. 할렘가에서 타락과 방황, 도박과 범죄로 세월을 보내다 감옥에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이슬람교를 접하고 흑인의 역사에 대해서 공부하게 됩니다. 거짓말처럼 담배를 끊었으며 죽는 날까지 술, 담배, 마약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과연 말콤X에게서 비폭력 평화주의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평생을 분노와 증오로 얼룩진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불행의 원인은 단 하나 입니다. 그가 흑인이고 그의 부모가 조부모가 흑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말콤X는 한 쪽 뺨을 맞고 나서 다른 쪽 뺨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저항하고 분노했습니다. 그를 과연 비난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최근에 <이기적 유전자>를 보았습니다. 만약에 모든 사람이 '한 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을 내밀자.' 라는 행동규칙을 지키면 분명 평화로운 사회가 형성될 것입니다. 복수의 연쇄반응을 끊을 수 있을테니까요. 하지만 만약 그 사회에서 뺨을 때리기를 좋아하는 돌연변이가 발생하면, 그는 그 사회에서 엄청난 혜택을 얻게 되고, 그의 유전자는 사회에 퍼쳐나갈 것입니다. 물론 그런 뺨 때리기 좋아하는 유전자가 그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면 결국 그 사회는 절멸할 것입니다. 때문에 적정한 안정된 균형을 유지하는 전략으로 고정되어 갈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전략을 가진 일원이 대다수를 차지할 것입니다. '상대가 내 뺨을 때리지 않으면 나도 때리지 않는다. 하지만 상대가 내 뺨을 때리면 나도 때린다."

 간디와 마틴 루터 킹, 그리고 그리스도와 달라이 라마의 비폭력주의 저도 존경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비폭력주의를 관철할 수 없습니다. 성인이나 되어야 관철할 수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 특히 증오와 분노를 가진 사람에게는 무리입니다. 말콤X는 흑인들에게 "그만 뺨을 맞아라!" 라고 외친 인물입니다. 흑인들에게 뺨을 맞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뺨을 맞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뺨을 때리는 놈들이 나쁜놈들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흑인들 서로가 서로를 지켜줘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흑백분리운동을 펼쳤습니다.

 

 

 말콤X와 마틴 루터 킹, 어떤 방법이 옳은 방법일까요? 저는 이성적으로는 마틴 루터 킹을 지지하고 싶습니다만, 감정적으로는 말콤X를 지지하고 싶습니다. 부당하게 뺨 맞으면 화를 내야지, 반대쪽 뺨을 내밀어선 안됩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신나서 양쪽 뺨을 흥겹게 두들겨 댈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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