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수 시인이 추천한 <아홉살 인생>을 읽었습니다. 예상외로 좋아서 정말 기쁘게 읽었습니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읽는듯한 즐거움이었습니다. 한국의 <자기 앞의 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리뷰로 다시 쓰겠지만 간단히 책 소개를 하자면 위기철 작가의 소설로 달동네 꼭대기집에 사는 아홉살 어린아이로 본 세상이야기입니다. 가난, 우정, 사랑, 이상, 현실, 가족 등을 재미있고 감동적이게 그려냈습니다. 좋은 구절들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좀 길더라도 양해바랍니다.
윤희 누나는 잠시 뭔가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떡였다.
"맞는 말이야. 누구를 좋아한다는 건 몹시 귀찮은 일이지. 공연한 참견쟁이가 되고, 남의 인생 때문에 속상해하곤 하지. 그러면 내 인생은 엉망진창이 되고 말아."
"맞아요, 엉망진창이 돼요."
"참 이상한 일이야. 뭔가 아쉽기 때문에 사랑을 하는데, 사랑을 하면 더욱 아쉬워지게 되거든, 그래서 때때로 악당이 되어 버리지. 공연히 트집을 잡고 공연히 화를 내고......."
"정말 그래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아무리 좋아해도 상대방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는 사실이야. 저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저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속만 부글부글 끓이다가 그것 때문에 자존심 상해하지."
"맞아요. 난 결코 우림이가 맞는 걸 비웃은 게 아닌데...... 그건 하늘에 맹세할 수도 있어요."
"사랑을 하면 기대하는 것이 많아지기 때문에 그만큼 아쉬운 것도 많아지고, 그래서 공연한 투정도 부리는 건데, 상대방은 결코 그걸 이해하려 들지 않아. 단지 못된 성깔을 가졌다고만 생각하는 거야."
"누나의 마음 저두 이해해요."
윤희 누나는 한숨을 포오 내쉬었다. -p163
이 대화를 읽으면서 나는 나의 지난 사랑을 떠올렸다. 나는 상대방의 투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할 능력이 없었다. 모르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으리. 그 사실이 아직까지 나를 괴롭힌다. 이 구절을 읽으며 나는 생각했다. "내가 이 책을 미리 읽었더라면... 그녀의 투정을 빨리 이해할 수 있었더라면..." 미련과 후회는 아무리 덜어내고 떨쳐내도 끈질기게 남아있다. 첫사랑은 실패하기 마련이고, 후회는 오래가기 마련이다.
아버지는 붉은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슬프게 중얼거렸다.
"죽음이나 이별이 슬픈 까닭은, 우리가 그 사람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줄 수 없기 때문이야. 잘해주든 못해 주든, 한 번 떠나 버린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지....... 사랑하는 사람이 내 손길이 닿지 못하는 곳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슬픈 거야......" -p173
저자는 이별이 슬픈 이유를 아주 잘 설명해준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것, 그것이 이별이다. 아니 이별이 슬픈 까닭이다.
골방철학자에게 있어서 골방이 그러했든, 내게 있어도 숲 또한 단지 방랑의 장소일 뿐 피난처도 은둔처도 휴식처도 되어 주질 못했다.
인간은 도대체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어서, 황홀하든 끔찍하든 세상과 더불어 살아갈 도리밖에는 없는 것이다. 고단한 세상살이를 피하고 피하고 또 피해 저 혼자 아무리 고고하고 우아해지려 애써도, 세상은 결코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는 법이 없다. 내 낭만적인 숲 속의 방랑에도 어찌나 훼방꾼들이 많던지! -p242
이 구절을 읽으면서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이 떠올랐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이 작품의 주제가 잘 들어난 구절이라 생각한다.
역시 김형수 시인의 추천작다웠다. 아주 재미있고 감동적인 소설이었다. 이 소설이 앞으로도 꾸준히 읽히고 많은 사랑을 받았으면 한다.
p.s 책 초반부와 어투가 바뀌었네요. 존댓말로 시작했는데 글을 인용하면서 반말로 바뀌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