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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 외 ㅣ 세계문학의 숲 5
다자이 오사무 지음, 양윤옥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잠이 오질 않는다. 잠이 오지 않을때 내가 택하는 것은 보통 2가지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잠자리에 누워 오만가지 잡생각을 하다가 결국 이 책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불면을 일으키는 소설이다.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라니 정말 너무하지 않은가. 이런 문장을 쓰는 작가라니 너무하다. 사실 이 문장은 이 책에 나오는 문장은 아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다른 소설에서 나오는 구절이며, 영화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에서 나오는 문장이다. 그 문장은 영화 속 유서에 등장한다. 다자이 오사무는 몇 번의 자살시도 끝에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작가이다.
이 소설. 너무나 절망적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었을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변신>은 프란츠 카프카의 자전적 소설이며, 자살하기 얼마전에 쓴 소설이다. 유서와도 같은 소설인 것이다. 그리고 이 <인간실격>또한 다자이 오사무가 자살하기 직전에 남긴 자전적 소설이다. 카프카의 <변신>에서는 어떤 희망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너무나 절망적이었다. <인간실격> 역시 마지막에 아주 어렴풋하게 희망은 아니고 자조적인 위안이 조금 느껴지긴 했으나 역시나 너무도 절망적이었다. 두 소설 모두 입구는 존재하지만 출구는 없다. 결국은 막다른 벽에 막히고 만다.
정말 너무한다. 이런 소설을 남기고 자살을 해버리면 남겨진 인간들은 어쩌란 말인가? 이 소설은 '인간실격'에 대해 이야기 한다.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이 인간실격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심히 드려다보면... 진짜 인간실격인 사람들은 주인공이 아닌 주변인간들이다. 주인공은 인간실격인 인간들 속에서 제정신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비열하고 천박하고 사악한 인간들 틈에서 질식할 것만 같은 것이다. 자살을 함으로써 "나도 너희들도 모두 인간실격이야!" 라고 말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정말 그렇다. 만약 우리가 도덕적인 인간이라면 모두가 광화문에서 혹은 시청 앞 광장에서 분신을 했을 것이다. 전태일이 그러했던 것처럼. 용산참사를 잊고, 세월호사건을 잊고 살아가는 우리가 과연 인간으로서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도덕적이지 않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자격미달이기 때문에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책도 읽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도대체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세월호사건에서 나는 현정부와 국가에 실망했다. 그리고 내안에 애국심이란 감정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세월호사건 관계자들은 모두 무릎 꿇고 국민 앞에 백번 사죄했어야 했다. 잘못과 무능에 책임을 지고, 유가족들을 보둠었어야 했다. 결코 그런식으로 대우해서는 안되며, 그리고 유가족을 욕하고 비하하는 댓글러들은... 모두 정말 인간실격이다.
그래서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과연 그들을 비판할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나는 무엇을 했는가? 기껏 노란 리본을 가방에 달고 위안을 삼았던 것은 아닌가?
내가 도덕적이지 않음에 감사해야겠다. 그것을 인정함으로써 나는 계속 살아갈 수 있으니. 슬픈일이지만, 나또한 인간실격이다. 아니 어쩌면 인간에게 너무 큰 기대를 부여한 것은 아닐까? 인간이란 모두가 알듯이 그렇고 그런 존재아닌가? 진부하지만 '너무 맑은 물에서는 고기가 살 수 없다.' 라고 위안을 삼아야 하는 건가?
그런면에서 볼 때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는 출구가 있다. 인간의 밑바닥을 보여줬다가도, 한줄기 여명의 빛이 비치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인류를 구원해준다. 그래도 우리 인간에게 인간성이 있음을, 구원의 길이 있음을, 한줄기 희망이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에게는 비열함도 있지만, 순수함도 순결함도 있다. 악마성이 있지만, 선함도 신성도 있다. 파렴치함과 천박함도 있지만 숭고함도 있다. 도스토옙스키가 혹은 많은 작가들이 그걸 보여준다. 수많은 결함 투성이지만, 그래도 인간은 살아갈 가치가 그리고 사랑할 가치가 있음을 알려준다. 인간을 사랑함으로써 우리도 살아갈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잃으면 인간은 살 아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