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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을 위한 윤리학 - 왜 우리는 동물을 도덕적으로 대해야 하는가?
최훈 지음 / 사월의책 / 2015년 5월
평점 :
동물에게 도덕적인 권리가 있는가? 이또한 주요한 철학적 질문, 철학적 논쟁대상 중에 하나이다. 동물에게 직접적인 권리가 있는가? 아니면 간접적인 권리만 있는가?
과거의 철학자들은 간접적인 권리만을 인정했다. 데카르트 선생은 동물은 그냥 자동인형, 기계정도로 생각했고 주인의 소유물로 생각해서 간접적 권리만을 가진다고 보았다. 칸트선생 역시 동물은 간접적 권리만을 갖는다고 보았다. 동물을 함부로 대하면 사람도 함부로 대할 우려가 있고, 우리의 인성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에 동물해방이나 동물의권리를 옹호하는 철학자들은 동물이 직접적인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그 주장의 근거로 이익 평등의 원칙과 감응력을 든다. 이익 평등의 원칙은 비슷한 것들은 비슷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이고, 감응력은 고통에 대해 반응하는 능력을 말한다. 인간도 고통을 싫어하고 동물도 고통을 싫어하기 때문에 둘은 비슷하니깐 비슷하게 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여기에 반박하는 철학자들은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엄격하게 구분한다. 이성이라던가, 언어사용 등등 다양한 근거로 동물과의 차이점에 주목한다. 이들은 종차별주의를 정당화시킨다. 여기서 또 동물해방론자들은 종차별주의에 대한 반박으로 '가장자리 인간'을 공격한다. 가장자리 인간이란 인간의 종에 속하지만, 식물인간이나 치매, 어린아이 등 동물보다 지능이나 여러면에서 떨어지는 인간을 말한다. 1~2살 이하의 유아는 성인 침팬지들보다 지능이나 인식능력 등이 떨어진다. 식물인간이나 치매노인, 정신이상자는 말할 것도 없다.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는 철학자들의 주장은 가장자리 인간은 동물보다 이성이나 언어사용 등에 있어서 뛰어나지 않지만,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처럼 동물들의 권리도 인정해줘야 한다는 주장이다.
나는 동물의 권리는 옹호하는 입장의 주장과 그 근거를 들어보고 싶었다. 얼마나 탄탄한 근거가 있는지 나 자신이 설득되면 다른 사람도 설득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는 주장을 받아들이고 싶지만 최대한 비판적인 입장에서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의 어리석음과 철학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이 부족하기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내 눈에는 그들의 주장의 근거가 너무도 빈약해보였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주장일 뿐 진리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리처드도킨스의 <지상최대의 쇼>를 읽을 때도 최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진화론에 대해 반박하는 입장에서 책을 읽었다. 하지만, 너무도 논리정연해고 탄탄한 근거들로 인해서 어느 한 구석도 반박할 수 없었고 오히려 탄복했다. 하지만, 최훈씨의 책은 내가 보기에는 꼬투리 잡고 싶은 것들이 너무도 많이 보이고 그의 주장에 반박하고 싶은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내 눈에는 빈틈투성이로 보였다.
이런 논쟁적인 책을 읽으면 참 아쉽다. 다른 사람들과 토론해보고 싶고, 저자에게 수없이 질문을 던지고 싶지만, 그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피터 싱어씨의 책은 무언가 더 나은 점이나 다른 점이 있는지 꼭 보고 싶다.
나의 견해를 이야기해보자면, 일단 왜 인간과 동물의 공통점으로 감응력만을 들고나왔는지 하는 점이다. 이것은 이미 취사선택이다. 무수히 많은 선택지들 중에서 오로지 감응력만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감응력이 가장 강력한 공통점이긴 하다. 하지만, 다른 부분들도 미세하게 조금씩 조금씩 고려하다보면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은 부각될 것이다. 그리고 감응력만을 선택하면 감응력이 조금 떨어지는 동물들은 굉장히 서운할 것이다.
가장자리 인간 논증은 이런 식으로 반박해보고 싶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 이것은 DNA적으로 볼 때도 친족유사성을 크게 띄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에게 우선순위는 가족, 친족, 민족의 순으로 나아가는 듯 보인다. 만약 누군가에게 자신의 자식과 전혀 모르는 한 사람과의 생명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한다면 100이면 100 자신의 자식을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 한 명과 침팬지 한 마리의 생명 중에 하나를 선택하야 한다면 100이면 98은 인간의 생명을 선택할 것이다. 그것이 가장자리 인간이라 할 지 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가장자리 인간또한 누군가의 자식이며 부모이며, 사랑하는 다른 인간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 인간에게는 인간이 침팬지보다 가까워보인다. 뚜렷한 종의 경계선을 감응력하나만 가지고는 무마시킬 수 없어 보인다. 이는 분명 종차별주의일 것이다. 동물해방론자들의 주장대로 인종차별주의, 여성차별주의가 정당화 될 수 없듯이 종차별주의도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일까? 이또한 그 근거가 희박해보인다. 그럼 인종을 차별하면 안된다고 해서 모기의 생명도 차별하면 안될까?(불교에서는 차별하지 않지만) 인종차별과 종차별은 유사하지만, 결코 같지는 않아보인다.
물론 나도 동물의 권리를 인정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대의 잘못된 관행이나 기업적 사육, 동물실험, 밀렵 등등은 축소되거나 다른 방식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물에게 권리가 있는지 아니면 생명존중사상으로 동물을 보호해야하는 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의 주장과 그 근거는 너무 빈약해보이고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 우리가 동물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감성만으로 접근하는 방식은 부족하다. 왜냐하면 우리와 같은 감성을 가지지 않은 사람을 설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물의 권리에 대해서 철학자들이 더 좋은 이론과 근거를 들어서 많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많은 것을 알수록 괴롭다. 예전에는 당연하게 먹었던 고기들도 이제는 먹을지 말 지 선택을 하고 먹어야 한다. 나는 고기를 좋아한다. 고기를 먹는 것이 악이라면 나는 악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모기를 죽이는 것이 악이라면 나는 언제나 악을 택할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육식은 분명히 문제점이 굉장히 많다. 사회적으로나 건강학적인면에서도 요즘같은 사육방식에서는 육식보다 채식이 좋다. 육식을 줄이고 채식을 늘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선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