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썼던 글이 날아가버렸습니다. 이또한 무바지하고 무작위적인 운명의 바퀴일 것입니다.


 스티븐 제이 굴드의 에세이 너무 좋습니다. 아직 3분의 2 정도 뿐이 못 읽었지만 19장 '만 번의 친절'이 가장 좋았습니다. 




 수명 연장은 대체로 영양과 위생을 이해하게 된 탓이지, 질병을 '치료'한 탓은 아니었다. -p303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학의 발달로 인해 인간의 평균 수명이 획기적으로 늘어났다고 오해합니다. 인간의 평균 수명 연장에 의학의 발달이 끼친 영향을 생각보다 훨씬 적습니다.



 나를 한심한 낭만주의자라고 해도 좋다. 어쨌든 우리 고생물학자들은 연속성을 진지하게 받는다. 가느다란 계통으로 이어진 연약한 연속성이 우리에게 존속이라는 보상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지금 이곳에 인간이 있는 것은 우리의 계통이 한 번도 꺾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우리가 지워질 수 있는 대목이 수십억 지점쯤 있었지만, 그 어디에서도 꺾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p324


 어느 하나의 시각으로 포괄하기에는 인생은 너무나 풍요롭고 다면적이다(신에게 감사할 일이다). 나는 진리에 관한 한 결코 상대주의자가 아니다. 하지만 진리라는 그 잡기 힘든 가치를 추구하는데 최적의 전략이 무엇인가 묻는 점에서, 나는 다윈주의자다. 나는 나와는 극단적으로 다른 T.H.클라크의 견해에서 교훈을 얻었다. 어쩌면 빌라도가 예수에게 던진 질문에는 궁극의 답이 없을지도 모른다. "진리가 무엇이오?" 라고 빌라도는 물었고(요한복음 18장 38절), 예수는 그 질문에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지혜는 다르다. 지혜는 옛말마따나 나이 먹을수록 늘어나는 것이고, 다각도에서 답을 찾아보는 것이다. 지혜야말로 진정 '붙잡는 이에게 생명의 나무' 다. -p335


 나는 활발하게 활약한 박해자들에게는 조금도 동정심이 들지 않지만, 사회적으로 표준에 가까웠던 의견을 수동적으로 수용한 개인들까지 맹비난하지는 못하겠다. -p381


 마지막으로, <비글호 항해기>에서 노예제를 다룬 장에 등장하는 다윈의 문장을 하나 더 음미하자. 


 가난한 자들의 비참이 자연의 법칙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제도에 의한 것이라면, 우리의 죄는 얼마나 큰가. 

-p390  



 인간 본성의 무게중심은 우리의 일상을 규정하는 친절하고 정상적인 만 번의 행동들에 있다. 에베레스트 산처럼 웅장한 이 온화함이 하필이면 뾰족한 봉우리를 땅에 댄 채 거꾸로 섰다는 것, 우리의 일상적인 본성과 정반대되는 드문 사건들에 의해 쉽게 거꾸러진다는 것, 그런 드문 사건들이 우리 역사를 만든다는 것. 이것이 실로 비극적인 구조적 역설일 뿐이다. 깊은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는 우리에게 합당한 몫을 받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인간의 비탄에 대한 해결책은 '본성'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다. '심각한 비대칭'을 바로잡아서 우리의 일반적인 성향이 일상을 인도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 하지만 대체 어떻게 해야 상식을 역사의 운전석에 앉힐 수 있을까? -p403  


 

 인간의 가지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가느다란 듯하고, 역사적 운에 훨씬 많이 의존했던 것 같다(사다리의 연속된 발판들처럼 필연적 운명을 밟아온 것이 아니었다). 우리 생각보다 덜 필연적이었으며 더 연약했다. 당당하게 행진하듯 진보하는 모형이 인간 진화의 표준적 도상처럼 되어버렸지만 실상 인간의 진화 역시 생명의 작은 농담이었을 뿐이다. -p421


 종들은 현재의 편익을 위해서만 진화하고, 미래의 운명은 행운의 바퀴에 맡긴다. -p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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