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다시 읽은 하루키 장편 소설. 개정판이 나왔다. 책이 너무 이쁘다. 






















 소설 속 여주인공 스미레가 읽고 있는 책은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와 <외로운 여행자> 였다. <외로운 여행자>는 못 찾겠다. 대신 <다르마 행려>와 <빅 서>가 있다. 하루키 소설 속에 나오는 소설은 대부분 재밌다. 읽어보고 싶은 소설이다.



 아름다운 코는 늠름하게 또 섹시하게 마스크를 부풀렸고, 그것을 본 대부분의 여성 환자들은 얼굴을 붉히며 눈 깜짝할 사이에(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았음에도) 사랑에 빠졌다. -p18  


 스미레의 아버지는 치과의사다. 그리고 매우 핸섬했다.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았음에도' 라는 표현이 웃겨서 책을 읽다 빵터졌다. 이렇게 예측 못하게 터지는 하루키의 유머가 좋다.


 

 그녀는 기치조지의 방 한 칸짜리 아파트를 빌려 최소한의 가구와 최대한의 책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p22 


 단 한 문장으로 스미레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최소한의 가구와 최대한의 책. 대구와 대비가 맘에 드는 표현이다.



 새삼스럽게 생각해볼 것도 없이 비어 있는 시간은 그녀의 주요 자산이었다. -p41 


 난 역시 이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는 거야, 스미레는 그렇게 확신했다. 틀림없다(얼음은 언제나 차갑고, 장미는 언제나 붉다) -p42

 

 좋은 문장들이다.


 

 "거짓말처럼 사이즈가 똑같아. 원피스, 블라우스, 스커트 모두. 허리 사이즈만 약간 크지만 벨트로 조이면 문제없을 정도야. 신발은 마침 뮤와 사이즈가 비슷해서 그녀가 신던 필요 없게 된 걸 몇 켤레 가져왔어. 하이킬, 로힐, 여름용 샌들. 모두 이탈리아 사람 이름이 붙은 것들이야. 게다가 핸드백도, 그리고 화장품도 약간."


"<제인 에어>같은 이야기구나." -p72 

 

 뮤라는 여성은 스미레에게 옷, 신발, 핸드백, 화장품들을 선물해준다. 친구 집에서 유행이 지난 옷을 가져왔다고 스미레에게 말했지만 아마 배려가 아니었을까?



 아마도 그 때문인지 사춘기 중반의 어느 시점부터 나는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긋게 되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든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 거리가 줄어들지 않도록 하면서 상대방의 태도를 지켜보게 되었다. 사람들이 입에 담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다. 내가 세상에 대한 유보 없는 정열을 발견하는 것은 책이나 음악에 한정되었다.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지만 나는 뭐랄까 고독한 인간이 되었다. -p89  


 공감가는 글이었다.


 

 그때 난 이해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멋진 여행을 함께하고 있지만 결국 각자의 궤도를 그리는 고독한 금속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요. 멀리서 보면 유성처럼 아름답게 보이지만 실제 우리는 각자 그 틀 안에 갇힌 채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죄수 같은 존재에 불과해요. 두 개의 위성이 그리는 궤도가 우연히 겹칠 때 우리는 이렇게 얼굴을 마주볼 수 있고 어쩌면 마음을 풀어 합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잠깐의 일이고 다음 순간에는 다시 절대적인 고독 속에 있게 되는 거예요. 언젠가 완전히 타버려 제로가 될 때까지 말이에요." -p188 


 서글픈 글이다. 인공위성은 우리의 상징이다. 완전히 같은 궤도로 항상 같이 움직인다면 그게 사랑이고 행복일까? 때에 따라선 저주가 될지도. 


 

 우리가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물의 이면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거의 같은 정도로 숨어 있는 것이다.

 이해라는 것은 항상 오해의 전체에 불과하다. -p213 

 


 아시겠습니까, 사람이 얻어맞으면 피가 나는 법입니다. -p217

 

 옛날, 샘 페킨파가 감독한 영화 <와일드 번치>가 공개되었을 때 한 여성 저널리스트가 기자회견장에서 손을 들고 질문했다고 한다. "대체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많은 피를 흘리는 묘사가 필요한 거죠?" 출연 배우 가운데 한 사람인 어니스트 보그나인이 난처한 표정으로 그 말에 대합했다. "아시겠습니까, 레이디. 사람이 얻어맞으면 피가 나는 법입니다." 



 "강해지는 것 자체는 나쁜 일이 아니야, 물론.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난 내가 강하다는 사실에 너무 익숙해져서 약한 사람들은 이해하려 하지 않았어. 행복이란 것에도 너무 익숙해져서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이해하려 하지 않았어. 건강하다는 점에 너무 익숙해져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이해하려 하지 않았어. 난 여러 가지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 곤란해하거나 초조해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건 노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했어. 불평을 자주 하는 사람들을 기본적으로 게으름뱅이라고 생각했어. 당시 나의 인생관은 확고하고 실질적인 것이었지만 따뜻한 마음이 넓지 않았던 거야. 그 점에 대해 주의를 주는 사람은 주위에 한 명도 없었어. -p256 


 공감하려면 겪어봐야 한다.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우리는 이렇게 각자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심하게 치명적으로 자신을 잃어버렸다 해도, 아무리 중요한 것을 빼앗겼다 해도, 또는 겉에 한 장의 피부만 남긴 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버렸다 해도, 우리는 이렇게 묵묵히 삶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손을 뻗어 정해진 양의 시간을 끌어모아 그대로 뒤로 보낼 수 있다. 일상적인 반복 작업으로서-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솜씨 있게. 그렇게 생각하자 매우 우울한 기분이 되었다. -p331   

 

 우리는 살아간다. 내면이 어떤 상태일지라도 내색하지 않고. 



 역시 좋다. 역시 재밌다. 하루키 장편 소설 중 가장 오랜만에 다시 읽는 거 같다. 하루키 소설을 2번째로 읽을 때 이 소설을 빼먹은 거 같다. 10년 만에 다시 읽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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