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다시 읽고 있다.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이다. 처음 읽었을 때는 너무나 신기하고 인상적이었는데 다시 읽으니 그 때의 느낌이 안나서 아쉽다.
예전부터 느꼈던 건데 올리버 색스는 책 속에서 자신의 책 이야기를 참 많이 한다. <깨어남>이 많이 언급되서 읽어보고 싶다.
<깨어남>은 어떤 하나의 병으로 인해 발생한 혼돈의 '복구와 재통합'을 묘사한 연구이다. -p24
자체츠키와 P선생은 모두 똑같은 세계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둘 사이의 가장 안타까운 차이는 루리야가 말한 것처럼 자체츠키는 '그 지옥 같은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잃어버린 자신의 능력을 되찾기 위해 끈질기게 싸운' 반면에 P선생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둘 중 어느 쪽이 더 비극적일까? 둘 중 누가 더 지옥 같은 상황에 처한 것일까? 상황을 알고 있는 쪽?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는 쪽? -p40
자체츠키에 대한 설명을 찾아봤는데 못 찾겠다. P선생은 얼굴인식불인증에 걸린 남자다. 시각은 문제가 없다. 세세한 부분을 보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그것을 한 차원 높게 종합해내지는 못한다. 눈, 코, 입, 귀 등 하나하나를 보고 인식할 수는 있지만 그 얼굴을 전체적으로 보고 누구인지 모른다. 더 나아가 얼굴과 모자를 헷갈릴 정도이다. 자신의 잃어버린 능력을 인식하는 쪽과 인식하지 못하는 쪽 어느 쪽이 더 비극적일까?
따라서 P선생의 사례는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에게 던져진 하나의 경고이자 우화일 수도 있다. 판단이나 구체적인 것, 개별적인 것을 등한시하고 완전히 추상적이고 계량적으로만 변해가는 과학이 장차 어떻게 될지에 대한 경고 말이다. -P46
P선생의 사례를 과학에 대한 경고로 인식하는 부분이 좋았다. 학문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통섭이 필요하다.
그들 대부분은 건강 숭배자이거나 비타민제 광신자들로, 비타민B6(피리독신)를 엄청나게 복용한 사람들이다. 현재 몸이 없어진 채 살아가는 환자는 남녀 수백 명에 달한다. -p102
우리는 우리의 몸에 대한 감각이 있다.우리는 눈을 감아도 우리의 손이 어디에 있는지 다리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를 고유감각이라고 한다. 비타민B6를 과다복용하면 이런 감각이 사라질 수 있다고 한다.
신체장애인이 아무리 늦게 어떤 능력의 습득에 나선다 해도 그들에게 놀라운 가능성이 펼쳐진다는 것을 그녀의 사례가 웅변적으로 입증했다. 앞도 보지 못하고 마비 증상까지 있었던 여성, 세상과 단절된 채 무기력하게 일생을 과보호 속에서 지낸 이 여성의 내면에 놀라운 예술적 천성의 씨앗이 숨어 있었고, 그 씨앗이 60년 동안이나 동면 상태로 시들어 있다가 보기 드물 정도로 아름답게 활짝 꽃피우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p119
<매들린의 손>이라는 에피소드도 인상적이었다. 인간의 뇌 가소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게 해준다.
"설득력이 없어요. 문장이 엉망이고 조리도 없어요. 머리가 돌았거나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아요." -p151
<대통령의 연설>이란 에프소드가 가장 재밌었다. 위에 글은 음색인식불능증 환자가 대통령의 연설을 보고 느낀 점이다. 은색인식불능증이란 목소리에 담긴 감정, 희노애락을 판단할 수 없다. 말을 하는 상대방의 얼굴과 태도, 움직임도 볼 수 없다. 때문에 오로지 서술적인 문장만을 이해할 수 있다.
색스가 자주 인용하고 존경하는 신경학자가 있다. 그는 루리야이다. 그가 쓴 두 권의 임상기록이 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는 과잉에 대해서, <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는 상실에 대한 이야기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가 더 재밌다고 한다. 색스의 책말고 그가 추천하는 책을 보고 싶다. 휴, 도서관에 내가 사는 지역의 도서관에 루리야의 저서가 없다. 아쉽다.
레이가 낙담에 빠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틱 증상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다음엔 뭐가 남나요? 전 틱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겁니다." 하고 자신의 심경을 표현했다. -p172
직장에서 근무하는 시간인 주중에는 할돌 덕분에 '성실하고 분별력 있고 반듯한' 사람이 된다. 그의 말마따나 '할돌 인간' 이 되는 것이다. 동작과 판단도 느긋하고 신중해진다. 할돌을 투여받기 이전의 조급한 성격과 성급한 행동도 사라진다. 그러나 즉흥성과 영감도 함께 사라진다. 심지어는 꿈도 완전히 달라진다. (중략) 그토록 민첩하던 두뇌회전도 느려지고 대답도 느릿느릿 한다. -p175
레이의 익살스러움, 음악성, 빠른 반사능력, 뻔뻔함, 용기, 외설스러움 등은 틱 증상과 연관되어 있다. 그의 정체성의 한 부분이다.
다음 에피소드 <큐피드 병>도 레이와 비슷하다. 신경매독에 걸린 89세의 노인은 행복감과 건강함을 느끼게 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기묘한 세상과 접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의 통상적인 상식이 뒤집히는 세계이다. 병리 상태가 곧 행복한 상태이며, 정상 상태가 곧 병리 상태일 수도 있는 세계이자, 흥분 상태가 속박인 동시에 해방일 수도 있는 세계, 깨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몽롱하게 취해 있는 상태 속에 진실이 존재하는 세계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큐피드와 디오니소스의 세계이다. -p187
앞으로 우리는 과학의 발전으로 손쉽게 우리의 행복감을 증가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과연 그럴 때 우리의 선택은?
보르헤스의 <픽션들>에 '기억의 천재 푸네스' 라는 소설이 있는 거 같다. 보고 싶다.
우리가 개가 아닌 인간으로 존재하려면 아마도 억제가 필요할 것이다. -p269
<내 안의 개>라는 에피소드도 상당히 기억에 남았다. 약물 복용으로 후각이 과민해진 남자의 이야기다.
"후각? 그런 건 생각해본 적도 없어요. 보통 때 누가 그런 게 있다는 걸 의식이나 하겠어요? 하지만 막상 후각을 잃고 보니, 눈이 보이지 않는 거랑 똑같았어요. 인생의 맛을 꽤 많이 잃어버렸지요. 사람들은 모를 거예요, 냄새에 얼마나 많은 '맛'이 있는지를. 사람들 냄새를 맡고, 책 냄새를 맡고, 도시 냄새를 맡고, 봄 냄새를 맡지요. 물론 의식하지는 못할 거예요. 그래도 모든 것의 뒤에는 온갖 풍요로운 냄새가 있답니다. 그렇듯 풍요로운 세상이 어느 날 아주 빈곤한 세상으로 돌변해버린 거예요." -p270
나는 오감 중 하나를 잃는다 후각을 선택할 것이다. 그런에 위 글을 읽고 나니 조금 고민이 된다.
아직 100p가 남았다. 내일 마저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