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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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금언이다. 쓸데없는 철학적 논쟁과 철학적 헛소리들을 한 방에 잠재운 금언이다. 물론 이 금언 역시 비판의 여지가 있고 비트겐슈타인의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되기도 한다. 아무튼 철학적 헛소리들이 짜증이 날 때면 머릿속에 이 금언이 떠오른다. 


 에리히 프롬과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에 대해 비판하려고 한다. 에리히 프롬과 이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그냥 지나쳐주시기를. 


 이 책은 아주 오래 전에 읽었다. 그 때는 이 책이 좋았다. 이 책의 핵심 화두에 공감하고 깨달음을 얻어서 좋았다. 핵심 화두는 책 제목 그대로 사랑은 기술이고 능력이라는 것이다. 기술이란 더 나아지기 위해 배우고 연마해야 한다. 사랑도 그렇다. 사랑을 하는 우리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핵심 화두는 참 좋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이 책을 다시 읽으니 비판할 것들이 많았다. 저자의 헛소리와 근거 없는 주장들에 짜증이 났다.


 일단 뭐 대부분의 철학이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기본 전제를 제시하고 거기에 논리를 더해 자신의 생각을 전개해나간다. 그리고 결론에 도달한다. 그런데 만약 전제부터 잘못되었다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논리가 탄탄해도 잘못된 결론에 이르게 된다. 결국 전부 철학적 헛소리가 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이야기가 헛소리고 모든 이야기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만큼 전제는 중요한다.


 이 책에서 예를 하나 들어보자. 저자는 인간은 분리된 존재고 합일을 원한다고 전제한다. 합일에는 반대의 성을 원한다고 전제한다. 플라톤의 사랑에 대한 우화를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원래 한 몸이었는데 둘로 갈라져서 서로 상대방을 찾는다는 이야기. 아무튼 사랑을 이런 전제와 논리로 풀어나가고 결론을 제시한다. 그러다 동성애의 이야기를 하는데, 동성애는 분리된 상태에서 결코 반대의 성과 합일할 수 없기 때문에 잘못되었다? 아무튼 그렇게 결론을 내린다. 개소리다. 

 인간이 분리된 존재라는 전제부터 우리는 의심해 볼 수 있다. 과연 그 전제는 참인가? 얼마나 탄탄한가? 근거는 무엇인가? 당연히 모든 것이 허술하다. 인간은 합일을 원하는가? 합일을 원하지 않는 사례는 없나? 잘못된 전제에서 시작하니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에리히 프롬은 자신의 생각들을 서술하고 있지만 주장만 있을뿐 근거는 부족하다. 철학에 근거가 어딨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만. 


 과거에 에리히 프롬의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를 읽었을 때는 헛소리 때문에 더 화가 났다. 현대인들은 삶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전제하고 삶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문명이 붕괴하고 핵전쟁의 위협에 시달리고 등등 진짜 개소리들을 늘어놓는다. 심지어 잉카, 아즈텍 문명이 붕괴한 이유가 그들이 삶을 사랑하지 않아서란다. 아... 스페인의 침략과 전염병이 아니고요? 그런 논리라면 조선이 일본에 침략당한 이유도 조선인들이 삶을 사랑하지 않아서고... 아 또 화가나려 한다. 릴렉스, 컴 다운.


 에리히 프롬은 시대를 아주 잘 만났다. 프로이트의 이론이 아직 먹히던 시대. 아무튼 개인적으로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과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사라져야할 고전이라 생각하는데 또 그럴 거 같지는 않다. 이 책을 읽고 감명받고 좋다고 하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사랑의 기술> 비판을 더해보자. 에리히 프롬은 휴머니즘, 인류애적 사랑과 이성애적 사랑을 구분하지 못하는 거 같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 사랑만을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현실적인 사랑, 보통의 사랑이다. 물론 이상을 제시하는 건 좋다. 거기까진 좋다. 하지만 이상만이 옳고 이상만을 강조하는 건은 좋지 않다. 책에 심지어 이런 말이 나온다. 인류애적 사랑이 충만한 사람은 이성 역시 상대방이 누구냐에 관계없이 사랑할 수 있다고 한다. 


 음, 이런 그림이 그려진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해. 꼭 너여서 사랑하는 건 아니야." 상대방은 이렇게 답한다. "나도 그래." 

 

 이성애적 사랑에 있어서 정말 상대방이 중요하지 않을까? 예수, 부처와 같은 사람은 아무 이성과 사랑해서 결혼할 수 있는 걸까? 예수, 부처와 같은 사람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 부처가 아니다. 우리에겐 상대방에 따라 사랑이 생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진화론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배우자 선택에 있어서 대부분의 종은 까다롭다. 결코 아무나 선택하지 않는다. 뭐, 우리는 예수나 부처와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에리히 프롬의 이야기가 맞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쓸모있는 이야기는 아닌 거 같다.



 뭐, 여기까지만 하겠다. 앞으로 철학책 읽기가 꺼려질 거 같다. 에리히 프롬은 피하게 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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