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이 과학적으로 젠더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다. 개인적으로 페미니스트 필독서로 권하고 싶은 책이다. 사실에 기반하지 않는 담론은 결국 사실에 의해 붕괴된다. 인류 역사의 수많은 이데올로기가 그러했다. 종교부터 공산주의까지. 젠더 문제도 사실과 과학을 기반으로 이야기, 토론이 이뤄졌으면 좋겠다. 



 여성에게 해를 가하길 꺼리는 심리가 우리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실제 사례가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일어났다. 나치 군대는 소년과 남성을 처형하는 데에는 아무 꺼리낌이 없었지만, 유대인 여성과 어린이에게도 똑같이 하라는 명령을 받자 반항하기 시작했다. 아돌프 아이히만조차도 그 공포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고, 그것이 군인들을 미치게 만들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래서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여기서 그들이 염려한 것이 희생자들의 운명이 아니라, 군인들의 정신 건강이었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가스실이 이상적인 해결 방안으로 고려되었는데, 그러면 가해자가 죽어가는 희생자의 모습을 직접 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방법은 큰 심리적 장벽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이 괴물 같은 혁신이 없었더라면, 홀로코스트는 여성과 어린이, 노인에게까지 확대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피해 규모는 실제로 발생한 규모에 훨씬 못 미쳤을 것이다.  -p279


 굳이 부연 설명하지 않아도 여성에게 해를 가하길 꺼리는 심리는 우리 안에 있다. 



 동거는 여성을 잠재적 위험에 처하게 하는 상황을 만든다. COVID-19로 모든 시민에게 집 안에 머물라는 명령이 내렸던 2020년에 이 효과가 증폭되어 나타났다. 가족들이 평소보다 집 안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자, 중국 허베이성과 그 밖의 장소들에서 가정 폭력이 3배나 증가했다. 예비 보고서들은 전 세계적으로 가정 폭력이 증가했음을 시사한다. -p289 

 

 가정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서 가정 폭력이 증가했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여성이 격리된 상황에서 여성이 폭력에 취약해지는 것은 영장류들의 사회에서도 드러난다. 보노보처럼 암컷들이 항상 함께 있는 사회에서는 암컷들의 연대가 강하고 수컷에 의한 폭력을 막아준다. 


 

 반면에 수컷들의 협력은 보기가 더 어렵다. 수컷들은 평소에 서로 떨어져 지내면서 싸움을 할 때에만 만나는 경우가 많다. 사자와 돌고래, 침팬지처럼 눈길을 끄는 예외가 일부 있지만, 그중에서 진정한 챔피언은 바로 남성이다. 남성들은 놀라울 정로도 쉽게 협력한다. 그들은 큰 짐승 사냥과 전쟁에 나설 때, 동료의 손에 자신의 목숨을 맡길 정도로 항상 협력한다. 남성의 팀워크는 인간 사회의 한 가지 특징이다. -p352


 암컷의 협력은 동물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수컷들의 협력은 보기 드물다. 인간은 남성, 여성 모두 타고난 팀 플레이어다.



 SF 작가 아이작 아시모프는 이렇게 말했다. "과학에서 가장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말, 새로운 발견을 알리는 말은 '유레카!'가 아니라, '그것 참 흥미롭군!' 이다." -p386


 아이작 아시모프가 어떤 의도에서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참 공감가는 말이다. 



 나는 정글짐에서 무리와 함께 털고르기를 하고 있던 롤리타를 불렀다. 롤리타가 내 앞에 앉자마자, 나는 새끼를 가리켰다. 그러자 롤리타는 자신의 오른손으로 새끼의 오른손을, 왼손으로 새끼의 왼손을 잡았다. 이것은 간단한 것처럼 들리지만, 새끼가 자신을 마주 본 채 배에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려면 롤리타는 양팔을 교차시켜야 했다. 그 동작은 사람들이 티셔츠를 벗으려고 단을 잡고 양 팔을 교차시키는 것과 비슷했다. 롤리타는 천천히 새끼를 공중으로 들어올리면서 그 축을 중심으로 빙 돌려 내 눈앞에 보여주었다. 어미의 손에 매달린 새끼는 이제 어미 대신에 나를 마주 보았다. 이 우아한 동작을 통해 롤리타는 내가 새끼의 뒷모습보다 앞모습에 더 관심이 있으리란 사실을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p394 


 머리 속으로 상상해보니 롤리타가 나보다 더 똑똑한 거 같다. 참으로 효율적이고 우아한 동작이다. 


 

 수컷 보노보는 동족 보호 성향을 매우 강하게 표출하기도 한다. 매우 인상적인 사례는 샌디에이고동물원에서 일어났다. 그 당시에 보노보 야외 사육장은 물이 채워진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다. 사육사들은 해자의 물을 빼내고 청소를 한 뒤에 다시 물을 채우려고 급수 밸브를 틀기 위해 부엌으로 갔다. 그런데 밸브를 틀기 전에 알파 수컷인 카코웨트가 사육사들을 무례한 방식으로 방해하고 나섰다. 카코웨트는 부엌 창문 앞에 나타나 소리를 지르며 팔을 마구 흔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린 보노보 여럿이 물을 빼낸 해자 속으로 뛰어들어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만약 사육사들이 예정대로 물을 흘려보냈더라면, 새끼 보노보들은 모두 익사하고 말았을 것이다. -p413  


 참으로 감동적인 일화다. 영장류는 물에 빠진 새끼나 동료를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들기도 한다고 한다. 



 사람의 마음에 관한 킨제이의 생각은 옳았다. 우리는 기호를 사용하는 종이어서 모든 것을 나타내는 단어가 있다. 언어는 우리에게 세계를 깔끔한 범주들로 자르고 쪼개게 해주는 반면, 가능한 범주들의 혼합에는 눈을 감게 만든다. 그것은 자연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과 정반대이다. 미국 생식생물학자 밀턴 다이아몬드는 "자연은 다양성을 사랑한다. 불행히도 사회는 그것을 싫어한다." 라는 말을 자주 했다. -p450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떠오르는 문단이었다. 자연은 연속성, 다양성, 혼합성으로 이뤄져있다. 우리는 그것을 분류하려고 하고 때론 실패한다. 



 그러니 위의 질문을 바꾸어 말해보자. 동성애 행동이 어떻게 진화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것은 잘못된 접근법이다. 그런 접근법은 우리가 사람의 실제 행동뿐만 아니라 유전학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의심스러운 이분법을 옳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더 나은 질문은, 사람과 다른 동물이 생식으로 이어지지 않는 성적 활동을 자주 한다는 사실에 놀랄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진화론은 그런 성적 가능성을 허용할까?

 물론 당연히 허용한다. 동물계에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진화했지만 다른 이유로도 쓰이는 특성이 차고 넘친다. -p454 


 깨달음을 주는 문단이었다. 일부 개인이 동성과 섹스를 추구한다고 해서 생식이 위험에 처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한다. 자신을 레즈비언이나 게이라고 부르는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아래는 이 책의 마지막 문단이다. 


 나는 생물학자이지만 인간 문화의 힘을 굳게 믿는다. 나는 젠더 관계가 나라마다 얼마나 다른지 직접 경험했다. 일정한 한계 내에서 젠더 관계는 교육과 사회적 압력, 관습, 본보기에 영향을 받는다. 심지어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젠더의 몇몇 측면조차도, 한 젠더에게서 다른 젠더와 동일한 권리와 기회를 박탈할 핑계가 되지 않는다. 나는 젠더 사이에 정신적 우월성이나 선천적 지배성이 있다는 개념을 참을 수가 없으며, 그런 개념을 버리길 희망한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상호 사랑과 존중, 사람은 평등하기 위해 똑같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의 이해에 달려 있다. -p475  


 마지막 문장이 특히 마음에 든다. 인종차별을 피하기 위해 흑인, 백인, 황인의 차이를 무시할 필요가 있을까? 차이를 없는 척하면 평등이 더 쉽게 달성되나? 성차별을 피하기 위해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없앨 필요는 없다. 



 두꺼운 책이지만 이틀 만에 읽었다. 이미 프란스 드 발의 책을 두 권 읽어서 겹치는 내용들이 있어 더 술술 읽혔다. 글도 잘 쓰시고 재밌다. 앞으로 그의 책을 더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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