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상반기에 읽은 책들 중 베스트가 아닐까 싶습니다. <슈독>과 <스티브 잡스>, <창의성을 지휘하라>등 쟁쟁한 경쟁자들이 있지만요. 저도 한 번 상반기 결산을 해봐야겠습니다.
<숨>, 정말 숨막히게 재밌고, 숨쉴틈 없이 읽었습니다. 감탄하며 읽었고 읽다가 입이 쩍 벌어지는 적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테드 창 그는 좀 더 원숙해졌고 좀 더 깊어졌습니다. 만약 SF작가 중 누군가 노벨문학상을 탄다면 그 누군가는 테드 창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의 단편 하나하나는 모두 하나의 우주이며 보석과도 같은 작품입니다. 과학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써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행복했습니다.
첫번째 단편은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입니다. 이슬람 상인과 이슬람권을 무대로 하고 이슬람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 작품입니다. 시간여행을 소재로 합니다. 작가가 아라비안 나이트를 모티브로 해서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마 <숨> 작품집 중에 영화화가 된다면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아니면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녀는 떠났고, 저는 몇 시간 동안이나 해방의 눈물을 흘리며 거리를 배회했습니다. 그러면서 줄곧 바샤라트가 한 말이 얼마나 옳았는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과거와 미래는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 어느 쪽도 바꿀 수 없고, 단지 더 잘 알 수 있을 뿐이다. 과거로의 제 여행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지만, 그곳에서 제가 배운 것은 모든 것을 바꿔 놓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렇게밖에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이해했습니다. 만약 우리의 인생이 알라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면, 우리는 등장인물인 동시에 관객이고, 우리는 바로 그 이야기를 살아감으로써 그것이 전해주는 교훈을 얻는 것입니다. -p56
그 무엇도 과거를 지울 수는 없습니다. 다만 회개가 있고, 속죄가 있고, 용서가 있습니다. 단지 그뿐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p58
두번째 작품은 <숨>입니다. 감동적이었습니다. 마치 상대성이론과 엔트로피를 발견해내는 과학자의 사고를 보는 듯한 감동과 짜릿함이 있었습니다. 우주를 탐험하는 지각있는 존재인 우리 인간에 대해 감사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과학의 아름다움과 감동을 그려낸 수작이라 생각합니다.
얼마나 먼 미래의 일일지에 대해선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당신들의 사고도 우리처럼 정지하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당신들의 삶은 우리의 삶이 그러했듯, 다른 모두가 그러하듯,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해도, 결국 모든 것은 평행상태에 도달할 것이다.
설령 이런 사실을 자각한다 해도 슬퍼하지 말기를. 나는 당신의 탐험이 단지 저장고로 쓸 수 있는 다른 우주를 찾기 위함이 아니었기를 희망한다. 지식을 원했기를, 우주가 내쉬는 숨으로부터 무엇이 생겨나는지 알고 싶다는 갈망에 의해 움직였기를 희망한다. 우주의 수명을 계산할 수 있다고 해서, 그 안에서 생성되는 생명의 다양한 양태까지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운 건물, 우리가 일군 미술과 음악과 시, 우리가 살아온 삶들은 예측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 어느 것도 필연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우주는 그저 나직한 쉿 소리를 흘리며 평형 상태에 빠져들 수도 있었다. 그것이 이토록 충만한 생명을 낳았다는 사실은 기적이다. 당신의 우주가 당신이라는 생명을 일으킨 것이 기적인 것처럼.
탐험자여, 당신이 이글을 읽을 무렵 나는 죽은 지 오래겠지만, 나는 당신에게 고별의 말을 남긴다. 당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의 경이로움에 관해 묵상하고, 당신이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라.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할 권리가 내게는 있다고 느낀다. 지금 이 글을 각인하면서, 내가 바로 그렇게 묵상하고, 기뻐하고 있기 때문이다. -p87
세번째 단편 <우리가 해야할 일>은 아주 짧은 단편이지만 자유의지에 대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네번째 단편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 는 가장 분량이 긴 중단편으로 인공지능을 양육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인공지능과 인간의 공통점과 차이점들을 철학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이 작품도 영화화 될 수 있을 만한 작품입니다. 잔잔하고 감동적인 드라마가 펼쳐지리라 생각합니다.
인간을 데이터베이스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모든 특성은 예외 없이 경험의 산물이었다. -p234
조건없는 사랑이라는 개념은 바이너리 디자이어가 고객들에게 팔려는 것 못지않은 환상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p237
여섯번째 단편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은 인간의 기억과 기억의 저장매체의 발달에 따른 변화를 그린 작품입니다. 이 역시 우수하고 재밌는 작품입니다.
사람은 수많은 이야기로 이루어진 존재다. 기억이란 우리가 살아온 모든 순간들을 공평하게 축적해놓은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애써 선별한 순간들을 조합해 만들어낸 서사이다. 설령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사건들을 경험하더라도 우리가 똑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특정 순간들을 선별하는 기준은 각자 다르며, 그것은 우리의 인격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우리들 각자는 우리의 주의를 사로잡는 세부 사항들을 인식하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을 기억하며, 그 결과 구축된 이야기들은 우리의 인격을 형성한다. -p301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 옳았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p329
이 외의 단편들 <데이시의 기계식 자동 보모>, <거대한 침묵>, <옴팔로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모두 재밌습니다. <데이시의 기계식 자동 보모>는 양육의 문제를 다룹니다. <거대한 침묵>은 종의 대량멸종을 가져오고 있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경종을 울리는 짧은 우화입니다. <옴팔로스>는 읽으면서 과연 내가 코페르니쿠스 이전에 과학과 신학을 공부하는 학자였다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접했다면 어떤 충격이었을지를 간접체험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은 선택과 평행우주를 다룬 작품으로 영화화 되도 정말 재밌을 거 같은 작품입니다.
<숨>을 보는 내내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테드 창의 전작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다시 읽고 싶어졌습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테드 창의 다음 작품집을 기다리며 그리고 테드 창 작품을 영화로 만나는 그 날을 기다리며 이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