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에 내린 빗물에 젖은 억새풀



  늦가을비가 내린 날, 겨울을 앞둔 억새풀은 옅붉은 빛으로 물든다. 아니, 물든다기보다 시든다고 해야 맞으나, 빗물을 흠뻑 뒤집어쓴 억새풀은 발그스름하달지 옅붉달지 새삼스러운 빛깔로 천천히 몸을 바꾼다. 어느 풀포기는 노랗거나 노르스름하고, 붉은 기운이 섞인 노랑이기도 하다. 아직 푸른 빛이 가시지 않은 풀포기도 있다. 저마다 서로 어우러지면서 늦가을 빛깔을 한껏 뽐낸다. 이런 풀잎이 얼마 앞서까지 짙푸른 잎사귀 빛깔이었던가 하고 새삼스러워서 자꾸 쳐다본다. 늦가을비는 겨울을 앞둔 풀포기더러 얼른 겨울잠을 자든지 흙으로 돌아가라고 재촉한다. 4348.11.12.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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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다르기에 고운 찔레꽃



  온누리 모든 꽃이 똑같다면, 꽃을 보고 곱다고 말하기 어려우리라 느껴요. 봄이 무르익을 무렵부터 여름에 접어들 무렵까지 피어나는 찔레꽃도, 일찍 피는 아이와 늦게 피는 아이가 있습니다. 같은 꽃이어도 피는 철과 날과 때가 다릅니다. 우리 삶을 이루는 꽃도 모두 다르기에 그야말로 사랑스럽습니다. 바람이 불어 이쪽을 살그마니 건드리면 이쪽 꽃송이가 춤을 추고, 바람이 불어 저쪽을 가만히 건드리면 저쪽 꽃송이가 춤을 춥니다. 찔레꽃은 유채꽃하고 다르고, 유채꽃은 탱자꽃하고 다르고, 탱자꽃은 장미꽃하고 다르고, 장미꽃은 괭이밥꽃하고 다르고, 괭이밥꽃은 곰밤부리꽃하고 다르고, 곰밤부리꽃은 붓꽃하고 다르고, 붓꽃은 모과꽃하고 달라, 그야말로 모든 꽃은 저마다 달라서 곱습니다. 4348.11.10.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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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비를 맞는 나무



  늦가을을 적시는 비가 내린다. 가을 내내 거의 들지 않던 빗물이 땅을 적신다. 겨우내 잎을 내놓는 나무는 이 가을비를 맛나게 먹고, 겨우내 잎을 떨구는 나무도 이 가을비를 고마이 먹는다. 땅을 촉촉히 적시는 빗물은 겨울잠을 자야 할 풀한테도 어서 쉬렴, 이제 흙으로 돌아가렴, 하고 노래한다. 늦가을에 이르러 꽃을 피우는 풀한테는, 자 일어나렴 기운내렴 꿈을 꾸렴, 하고 노래한다. 흙에 씨앗이 깃들고, 흙에 빗물이 찾아들며, 흙에 따순 손길이 어리어 나무가 자라고 숲이 된다. 4348.11.9.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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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고들빼기꽃



  가을에 가을 고들빼기꽃을 본다. 고들빼기꽃은 가을에 핀다. 꽃이 필 무렵 더는 잎을 훑을 만하지 않아서 내 마음에서 살며시 떠나고 마는 고들빼기이다. 어찌 보면 고마우면서 미안하다. 봄부터 가을 어귀까지 잎사귀를 신나게 베풀어 준 고들빼기인데, 꽃이 필 때부터 ‘꽃 구경’조차 안 하고 지나쳐 버리니까.


  나로서는 ‘뜯어서 먹는 풀’한테 눈길이 더 가니까, 아무래도 꽃이 피는 풀한테는 눈길이 덜 갈는지 모른다. 가을이 되면 사람들은 국화라든지 코스모스 같은 꽃에 깊이 눈길을 두지, 이 작고 멋진 고들빼기꽃은 좀처럼 들여다보지 않기 일쑤이다. 어쩌면 고들빼기꽃인지 아닌지도 모를 테고, 고들빼기를 뿌리까지 캐서 김치로 담가서 먹는 ‘반찬 모습’만 보았을 뿐, 고들빼기잎을 먹은 적도 없어서 고들빼기라는 풀에 꽃이 피는 줄 모르기도 하리라.


  가을로 접어들어 고들빼기풀에 꽃대가 오르면 잎사귀가 줄어드는데, 이때에 잎사귀를 또 바지런히 뜯으면 고들빼기풀이 나한테 마음속으로 외친다. ‘그동안 많이 뜯어먹었잖아. 이제 그만 좀 뜯어. 나도 꽃을 피워서 씨앗을 퍼뜨려야지. 이듬해에는 안 먹을 생각이니?’ 4348.11.5.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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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앞에 서서



  논둑길을 걷다가 코스모스밭을 본다. 누가 이곳에 코스모스 씨앗을 뿌리거나 심었다고도 할 만하지만, 바람을 타고 이곳저곳에 하나둘 퍼진다고도 할 만하다. 꽃잎을 활짝 벌린 채 가볍게 춤을 추는 코스모스를 보면 으레 걸음을 멈추고 들여다본다. 저절로 눈이 간다.


  코스모스를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긴다. 다른 들꽃을 볼 적에도 늘 걸음을 멈추었잖아? 코스모스만 보려고 걸음을 멈추지는 않잖아? 늘 보는 꽃을 다시 볼 적에도 걸음을 멈추고, 집 둘레에 흐드러진 꽃을 길가에서 보더라도 저절로 고개가 그쪽으로 가잖아?


  유채꽃은 한껏 무리지어 한들거려야 비로소 아이들 눈에 뜨인다. 봄까지꽃이나 코딱지나물꽃도 어마어마하게 무리지어서 피어야 비로소 아이들이 알아챈다. 그런데 코스모스처럼 소담스러운 꽃송이를 내놓으면, 아이들은 한 송이만 피어도 곧장 알아채고는 하하하 웃음을 터뜨린다. 이리하여, 아이들하고 들마실을 할 적에 코스모스밭에서 한참 서성인다. 4348.11.5.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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