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투데이 2014.11
월간 해피투데이 편집부 엮음 / 혜인식품(월간지)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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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74



내 이야기를 들으러 온 이웃

― 해피투데이 2014.11. (51호)

 혜인식품 펴냄



  지난달에 서울에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서울에서 전남 고흥까지 먼길을 마다 않고 찾아왔습니다. 서울에서 찾아온 손님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철수와영희 펴냄,2014)이라는 책을 읽으셨고, 이 책을 시골에서 아이들과 살며 쓴 사람이 궁금하다고 했습니다. 멀리서 찾아온 손님인데 제대로 대접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무렵 우리 곁님이 셋째를 막 배어 몸이 많이 힘들었어요. 집 안팎으로 어수선할 때였기에 나도 몸이 고단했지만, 두 시간 남짓 이모저모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서울 손님은 ‘이야기를 들으러 왔다’면서, 우리 집안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해피투데이》라는 잡지 51호(2014.11.)에 실립니다.



.. 그는 아이들에게 ‘국어사전 말풀이’로 말을 가르치지 않는다. 가만히 마음 소리에 귀를 기울인 다음, 마음으로 느끼는 이야기로 말을 들려준다. ‘꽃을 생각하는 동안 내 마음속에 어여쁜 꽃말이 자랍니다. 꽃을 헤아리면서 내 가슴속에 즐거운 꽃 그림이 태어납니다. 꽃을 이야기하니 어느새 내 꿈속에 즐거운 이야기 한 자락이 피어납니다(《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에서).’ … 새로움을 찾고 이야기를 짓는 건 말의 뿌리를 찾는 과정이다. 그것은 또한 말을 만드는 밑거름이기도 하다. 과거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어떻게 말을 지었을까 물으므로, 우리 스스로 우리의 말을 짓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남이 모르는 말을 짓는 게 아니라 처음 꺼냈을 때 다른 사람도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는 말을 짓는 것, 쓰다 보면 익숙해져 그 말을 쓸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  (80, 83쪽/박상준)



  옛날부터 사람들은 누구나 말을 지으며 살았습니다. ‘없는 말’을 억지로 만들며 살지 않고, ‘쓸 말’을 즐겁게 지으며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지구별 어느 곳에서든 누구나 밥과 옷과 집을 스스로 지었어요. 지구별 어느 곳에서나 스스로 삶을 지었습니다.


  ‘삶짓기’를 한자말로는 ‘자급자족’이라 일컫습니다. 삶을 스스로 짓기에 말도 스스로 짓습니다. 아주 마땅한 노릇이에요. 손수 나물을 뜯고 손수 밥을 끓이며 손수 돗자리를 짜고 손수 기둥을 세우며 손수 짚을 엮어 지붕을 얹고 손수 아이를 낳아 손수 지은 배냇저고리를 입히고 손수 기저귀를 갈아 손수 빨래를 하는 …… 삶이니, 삶을 누리면서 쓰는 모든 말을 스스로 짓습니다. 예부터 한겨레가 고장마다 스스로 짓던 말은 ‘고장말’, 곧 ‘사투리’입니다.


  이와 달리 오늘날은 사람들이 스스로 삶을 짓지 않습니다. 밥도 옷도 집도 ‘남이 만든’ 것을 돈으로 사다가 씁니다. 더욱이, ‘남이 만든 것’조차, 남이 스스로 삶을 지으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장에서 똑같이 찍은 것’이기 일쑤입니다. 남이 스스로 지은 것이라면, 이때에는 ‘누군가 스스로 지으며 붙인 이름’이 있지만, ‘공장에서 똑같이 찍은 것’일 때에는 상품이름(상표)만 있어요.


  삶을 녹여서 제대로 지은 이름이 아닌 상품이름만 있을 적에는 광고와 상업주의만 있습니다. 이때에는 ‘상품이름’이 삶에서 우러나지 않기 때문에 ‘고장말’이나 ‘한국말’을 안 쓰기 일쑤예요. 영어를 쓰든 한자말을 쓰든 일본말을 쓰든, 아무렇게나 흐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쓰는 말도 이런 굴레에 갇힙니다.


  이리하여, 나는 “시골에서는 도시와 달리 사람이 살아가는 얼거리나 바탕을 늘 겪으며 살아요. 똑같이 꽃 사진을 찍어도 날마다 다른 이야기를 쓸 수 있어요. 우리 마당에 핀 꽃과, 아이들과 자전거를 타고 가다 본 꽃이 다르거든요. 어떤 사람들은 모두 똑같이 예쁜 꽃만 찍으려 하잖아요. 거기에는 이야기가 없어요. 여기에서는 여러 가지를 보고 듣고 느끼다 보니 저절로 즐거워요.” 같은 말을 들려줍니다. 글을 쓰는 일은 ‘문학 창작’이 아닌 ‘즐겁게 삶을 지으면서 쓰는 글’입니다. 사진을 찍는 일은 ‘예술 창작’이 아닌 ‘즐겁게 삶을 노래하면서 찍는 사진’입니다.


  ‘타성’이라는 한자말을 쓸까 말까 망설이다가, “시골에 살면서 흙을 만지는 일이 타성에 젖으면 고단한 일밖에 안 돼요. 누구보다 나부터 즐겁고 아름답게 살아야 해요. 고단한 사람은 노래를 부르지 않아요. 도시에서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하는 사람 가운데 노래하는 사람이 없어요. 즐거우면 노래가 저절로 나와요. 옛날 시골에서는 무슨 일을 하건 누구나 노래를 불렀어요. 그 노래를 들으며 아이들은 말을 배우고 일을 배우고 삶과 사랑과 꿈을 배웠어요. 그리고 어른 곁에서 스스로 놀이를 만들어 놀았고요. 시골스러운 삶을 찾는 일은 스스로 노래와 이야기를 찾는 일이에요. 학교나 책이 아닌 내가 스스로 생각을 기울여서 찾아야 해요.” 하고도 말합니다. 스스로 삶을 짓는 사람은 스스로 노래를 합니다. 손수 삶을 일구는 사람은 언제나 모든 말을 손수 짓습니다. 아이한테도 손수 이름을 지어서 붙이고, 밥·옷·집을 지으면서 손수 만든 연장에도 손수 이름을 붙여요.


  ‘토박이말을 찾아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스스로 삶을 찾으면 됩니다. 한자말을 안 쓰거나 영어를 몰아내거나 일본 말투를 씻어야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삶을 깨닫고 제대로 바라보면서 즐겁게 가꾸면 됩니다. 서울에서 찾아온 손님한테 말·넋·삶이 어떻게 얽히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 신문과 TV가 보여주는 작금의 세상을 읽다 보면 세상이 과연 진보하고 있는지, 인류가 과거보다 더 지혜롭고 현명한 세상으로 향해 가고 있는지 자못 의심이 들 때가 많다 ..  (11쪽/이희인)



  이제 《해피투데이》 51호가 나옵니다. 내가 서울 손님한테 들려준 이야기를 나부터 가만히 되새겨 읽은 뒤, 다른 이웃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잡지 첫머리에 나오는 이야기를 읽으며 빙긋 웃는데, ‘신문·방송’을 보면 앞날이나 꿈을 느끼기 어려워요. 왜 그러할까요? 오늘날 신문이나 방송은 우리 앞날이나 꿈을 다루거나 건드리지 않아요. 상업주의에 물들고 광고와 시청율에 목을 매달아요. 그러니, 신문이나 방송을 보아서는 “의심이 들” 일만 많습니다.


  신문과 방송을 모두 내려놓고는, 삶을 보아야 합니다. 내 삶을 보고 이웃들 삶을 보아야 해요. 내가 나한테서 꿈을 찾고, 나를 둘러싼 이웃한테서 꿈을 느껴야 합니다.



.. 바로 옆으로 흐르는 ‘또 다른’ 모습의 한강을 구경했다. 노을이 지고 있었고, 강에는 파도가 전혀 없었다. 멀리 반대편을 보니 길이 막혀서 갈 수 없는 한강의 저편이 보였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은 한 번도 만진 적 없는 속살 같은 곳. 어지럽게 풀이 엉켜 있어서 가까이 다가갈 수 없던 강변을 멀리서 바라보며, 나는 한강의 오래된 모습을 상상해 봤다. 당시 보이던 낯선 풍경 앞에서 조금 더 집중했더니 예전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들까지 떠올랐다. 나무로 만든 배들이 잔뜩 떠 있거나 아주 깨끗한 물로 가득 찬 뭐 그런 장면들 ..  (46∼47쪽/전진우)



  자가용을 씽씽 달려도 서울에서 한강을 느낄 수 있지만, 자가용에서 내린 뒤 두 다리로 천천히 걷거나 자전거로 슬렁슬렁 달리면, 여느 때에는 못 느끼던 한강을 느낄 수 있어요. 여느 때에 못 느끼던 한강을 새롭게 느낀다면, 아주 깨끗하게 흐르던 냇물과 아주 착하게 살던 사람들 모습을 마치 꿈처럼 눈앞에서 떠올릴 수 있어요.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스스로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리면 참말 얼마나 즐거우면서 사랑스러울까요.


  오늘날 시멘트 문명을 바라볼 노릇이 아닙니다. 굳이 먼 옛날을 되찾자고 할 까닭도 없습니다만, 사람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참답고 착하면서 아름답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면 됩니다. 즐거운 모습을 그려서 스스로 즐거움을 찾으면 돼요.



.. 호두가 나무에 달려 있을 때는 두껍고 딱딱한 녹색의 과육 안에 들어 있다. 그걸 깨면 흔히 알고 있는 갈색 호두가 들어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딱딱한 갈색 껍질은 속껍질인 셈. 갓 딴 호두는 그 갈색 속껍질을 손으로 깰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럽다. 햇빛이 며칠 널어 말리는 새에 달그락 달그락 단단해지는 것이다. 갈색 껍질 속의 호두알 역시 나무에서 갓 따면 아주 얇은 막 같은 껍질을 손쉽게 벗길 수 있는데, 그렇게 나온 호두알은 정말 영양가를 듬뿍 머금은 듯 희고 뽀얗다 … ‘나무에서 바로 따서 먹으면 정말 좋은 열매구나’ 단박에 느껴진다 ..  (52∼53쪽/이후)



  시골사람 이야기를 자주 찾아볼 수 있어 《해피투데이》가 반갑습니다. 이 잡지를 엮는 분들은 서울에서 살 테지만, 그래서 서울 이야기도 많이 나오지만, 서울 이야기만 나오지 않고, 이 나라 골골샅샅 여러 마을 이야기를 조곤조곤 엿볼 수 있어 반갑습니다.


  서울과 경기에서 사는 사람이 이 나라 절반이라 하니까, 서울과 경기 이야기만으로도 잡지 한 권쯤 뚝딱 엮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서울과 경기에 사람이 많이 산달지라도 서울과 경기 이야기만 하면 좀 메말라요.


  생각해 보셔요. 한국은 ‘서울나라’나 ‘경기민국’이 아닙니다. 전라남도 시골 군은 서울이나 경기에 있는 동 한 군데 인구보다 훨씬 적습니다만, 내가 사는 전남 고흥은 기껏 6만 즈음 될까 말까 합니다만, 이곳도 ‘사람이 사는 마을’입니다. 인구가 적다고 해서 이러한 시골사람 이야기를 모른 척하거나 아예 안 다루어도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서울이나 경기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그리 재미없어요. 신문이나 방송에서 넘치는 이야기는 생각을 북돋우지 않습니다.


  호두나무와 호두알 이야기는 얼마나 재미있나요. 갓 딴 호두알을 손으로 살살 벗겨 하얀 단물을 먹는 이야기는 얼마나 싱그러운가요. 호두뿐 아니라 밤도 이와 같습니다. 밤나무에서 갓 딴 밤도 새하얗습니다. 갓 딴 밤은 겉껍질이 아주 보드랍습니다. 손으로도 벗길 수 있지만, 겉껍질째 씹어먹어도 대단히 보들보들 맛나요.


  무슨 소리인가 하면, 사람들이 집집마다 밭이나 숲을 거느리면서 ‘내 집에서 자라는 나무’에서 바로바로 열매를 얻어서 먹으면 누구나 몸이 튼튼하다는 뜻입니다. 아플 일이 없습니다.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농약과 비료와 항생제와 촉진제를 엄청나게 쏟아부어서 더 빨리 더 많이 뽑아내는 ‘대규모 공장 농업’으로 얻은 열매는 겉보기에만 굵거나 예뻐 보이지, 몸에는 도움이 안 되기 일쑤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돈은 많이 벌지만, 몸은 외려 나빠요. 오늘날 사람들은 돈으로 한겨울에도 딸기와 수박을 사다 먹을 수 있지만, 막상 몸뿐 아니라 마음도 많이 아파요.


  《해피투데이》라는 잡지가 앞으로도 싱그러운 시골 이야기를 넉넉히 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앞으로도 ‘손수 삶을 짓는 사람’ 이야기를 알뜰히 실어서 나누어 주기를 빕니다. 4347.10.24.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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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작사계 - 자급자족의 즐거움
김소연 지음 / 모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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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책 읽기 65



시골에서 일하고 노는 예쁜 삶

― 수작사계, 자급자족의 즐거움

 김소연 글·사진

 모요사 펴냄, 2014.9.22.



  도시에 사는 이웃이 나더러 묻습니다. 왜 시골에 가서 사느냐고, 도시에 있으면 일거리도 많을 뿐 아니라, 이름을 날릴 자리도 많을 텐데, 하면서. 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야기합니다. ‘별을 보고 싶어서요.’


  시골에서 만나는 이웃이 나한테 묻습니다. 왜 시골에 왔느냐고, 다들 도시로 가는 판에 거꾸로 시골에 오는 까닭이 무어냐, 하면서.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긴 뒤 이야기합니다. ‘맑은 바람을 쐬고 싱그러운 물을 마시고 싶어서요.’


  도시에서건 시골에서건 이웃들이 더 묻지 않으나, 나는 굳이 덧붙여서 한 마디를 합니다. ‘시골에서 살면 멧새와 풀벌레와 나무가 들려주는 노랫소리가 즐거워서 날마다 웃을 수 있어요.’



.. 두려움보다 즐거움이 더 컸던 것은 만드는 일 자체가 가져다준 기쁨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구든 필요한 물건이든 손수 땀 흘려 만들면서 목수는 만족했다 … 빈집에 들어가 쐐기 모양을 배웠다는 대목에서 나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시골마을이라면 어디나 외딴 곳의 빈집 한두 채는 있게 마련인데, 그런 곳에 들어가 요행히 부패를 면한 나무 등걸을 주워 오거나 부서진 옛날 살림살이를 쳐다보는 것이 목수의 낙이었다 ..  (28, 34쪽)



  우리 보금자리는 퍽 조그맣습니다. 우리 집은 마을에서 꽤 작습니다. 우리는 아직 땅을 넉넉히 누리지 못합니다. 앞으로 돈을 푼푼이 모아서 집을 손질하고 땅도 장만할 생각입니다.


  요즈음 시골로 삶터를 옮기는 분들은 으레 땅이며 집을 넉넉히 장만하지만, 우리는 집만 가까스로 장만해서 들어왔습니다. 돈이 없이 어떻게 시골로 가서 사느냐 하고 걱정하거나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이 많은데, 돈이 있건 없건 사람들은 스스로 살고 싶은 데에서 살기 마련입니다. 도시에 그대로 눌러앉아서 지내는 사람들이 ‘돈이 있어’서 도시에서 살지 않습니다. 그저 도시에서 살 길을 찾으려고 하니까 도시에서 살 뿐입니다.


  살 길은 어디에서건 찾을 수 있습니다.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살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맨손과 빈주먹으로도 얼마든지 살 길을 찾을 수 있어요. 부탄이나 네팔에 가더라도 살 길을 찾을 수 있어요. 어느 나라이건 대수롭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시골에서 안 사는 까닭은, 시골에 살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어서 시골에서 안 살지 않아요. 돈이 있어도 시골에서 안 사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초·중·고등학교 교육이 오로지 ‘도시에서 일자리 얻어 돈을 벌어 살림 꾸리는 이야기’에 얽매이고, 대학교는 죄다 도시에 있을 뿐 아니라, 대학 교육도 그저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공무원 되기’만 보여줍니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든 시골에서 나고 자라든, 초등학교만 들어가면 모든 아이들이 ‘도시바라기’가 되고 맙니다.



.. 재봉틀을 쓰면 바늘담이 탄탄하고 속도가 붙어서 좋고, 손바느질은 바늘땀의 모양이 정감 있고 직접 손을 놀리는 재미가 있어 좋았다. “만들 수 있는 물건을 굳이 돈 주고 살 필요 없잖아.” … 우리 딸도 저렇게 자라날까? 쪼개진 나무껍질만 봐도 참나무, 밤나무 구분할 줄 아는 사람 … 바느질의 즐거움은 바늘에서 오는 게 아니라 바늘을 쥔 사람의 마음에서 오는 게 분명했다 ..  (83, 91, 93쪽)



  시골살이는 시골살이입니다. 시골살이는 ‘전원생활’이 아닙니다. 시골살이는 시골살이일 뿐, ‘귀촌’도 ‘귀농’도 아닙니다.


  《수작사계, 자급자족의 즐거움》(모요사 펴냄,2014)이라는 책을 쓴 김소연 님은 충청남도 서천에서 보금자리를 가꾼다고 합니다. 《수작사계》 끝자락을 보면, 김소연 님이 시골에서 사는 뜻을 “서해 우리의 집. 필요한 것은 많지 않다. 우리가 일구고 싶은 것은 부나 성공 같은 것이 아니다. 고향이다(327쪽).” 하고 밝힙니다.


  옳고 맞는 말씀입니다. 시골에 뿌리를 내리면서 사는 사람은 누구나 ‘내 집을 고향으로 삼’습니다. ‘스스로 고향이 되’려고 시골에서 삽니다.


  사내 쪽 집안이 시골이라서 시골에서 살지 않고, 가시내 쪽 집안이 시골이라서 시골에서 살지 않습니다. 굳이 사내 쪽 집안과 가까운 시골에 살아야 하지 않고, 애써 가시내 쪽 집안과 가까운 시골에 살아야 하지 않습니다. 한집을 이루는 한솥밥지기가 즐겁게 살림을 꾸려서 보금자리를 이룰 만한 시골에서 살면 됩니다. 즐겁게 노래하고, 기쁘게 춤추면서, 아름답게 사랑을 꽃피울 수 있는 곳이 ‘집’이며 ‘보금자리’이자 ‘고향’입니다.



.. 자그마한 맨발, 동그란 배가 톡 튀어나온 내복 바람. 약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주저없이 토마토 밭으로 향한 아이는 커다란 찰토마토 하나를 뚝 따 쪽쪽 빨고 우적우적 씹는다 … 읍의 살림은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읍은 내가 생각했던 시골과 달랐다. 무엇보다 새소리, 그 소리가 없었다 … 내가 원하는 것은 그냥 쓸 만한 가구가 아니었다. 가슴을 울리는 가구였다 ..  (144, 174, 202쪽)



  우리 집에서 돋는 풀은 바로 나한테 피와 살이 되는 밥입니다. 우리 집에서 자라는 나무는 바로 나한테 숨결과 목숨이 되는 밥입니다.


  예부터 집안에 아기가 태어나면 나무를 심습니다. 한국뿐 아니라 지구별 모든 나라가 아기한테 맞추어 나무를 심고 별자리를 살핍니다. 아기는 나무와 함께 자라고, 아기를 낳은 어버이한테 맞추어 심은 나무는 벌써 우람하게 자랐을 테니, 아기는 ‘어머니 나무’나 ‘아버지 나무’를 타고 놀다가, 제법 나이를 먹으면 ‘내 나무’를 어루만지면서 놀아요.


  아이는 자라고 자라 어른이 되는데, 어른이 된 아이는 ‘먼먼 할아버지 나무’를 베어서 집을 짓습니다. ‘삼백 살 먹은 할아버지 나무’나 ‘오백 살 먹은 할머니 나무’가 바로 ‘새롭게 어른이 된 아이’가 베어서 집을 짓는 기둥으로 삼는 나무입니다.


  고향이라는 곳은 바로 이런 곳입니다. 보금자리라는 데는 바로 이런 데입니다. 내 숨결을 느끼고, 내 어버이 사랑을 헤아리며, 내 삶을 가꿀 수 있는 자리가 바로 집이에요.



.. 아무것도 없는 맹물(감물)만 핥아 먹고도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햇빛은 조금씩 더 진한 색으로 천을 물들였다. 가만히 손을 대 보면 햇빛에 구워진 천이 따뜻했다 … 완성된 옷에 목수가 원한 것이 하나 있었다. “잘 보이는 곳에 꽃수를 놔 줘.” … 밭에서 솜이 난다. 모든 것의 시작은 자연이라는 사실이 나는 여전히 놀랍다 … 가구는 숲에서 시작되므로 그 안에 반드시 숲의 흔적을 담고 있다 ..  (239, 250, 305, 318쪽)



  《수작사계》를 쓴 김소연 님은 “자급자족의 즐거움”을 조그마한 책에서 네 갈래로 나누어 들려줍니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에 맞추어 누리는 삶을 조곤조곤 보여줍니다.


  참말 그렇습니다. 시골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어요. 시골살이는 봄살이 여름살이 가을살이 겨울살이, 이렇게 네 갈래로 나눕니다. 시골사람이라면 봄맞이 여름맞이 가을맞이 겨울맞이, 이렇게 네 철을 듬뿍 누립니다.


  철을 익히고자 시골에서 삽니다. 철이 들면서 시골에서 자랍니다. 철을 알면서 시골사람으로 뿌리를 내립니다. 먹고 입고 자는 삶을 손으로 스스로 돌봅니다. 먹으면서 사랑하고, 입으면서 꿈꾸며, 집에서 잠이 들면서 즐거운 노래가 흐릅니다. 꿈나라를 누리는 우리 집 둘레에서 봄에도 가을에도 멧새와 풀벌레가 노래합니다. 바람이 휙 불어 나뭇가지를 흔들면, 나뭇잎이 파르르 떨면서 재미난 노래잔치가 됩니다.


  전기가 있어야 살지 않습니다. 인터넷이 되어야 살지 않습니다. 자가용을 몰아야 살지 않습니다. 은행이나 극장이나 학교가 있어야 살지 않아요. 관공서나 쇼핑센터가 있어야 살지 않지요.


  숲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들이 있고 냇물이 흘러야 살 수 있어요. 골짜기가 깊고 앞뒤로 멧자락이 이어져야 삶을 꾸립니다. 냇물은 바다로 닿고, 바다는 드넓게 펼쳐집니다.


  사람들은 시골에서 나고 자라야 슬기롭습니다. 사람들은 시골에서 나고 자라며 살림을 스스로 지어서 누려야 슬기롭습니다. 스스로 삶을 짓는 사람은 호미와 낫을 쓸 뿐, 전쟁무기를 만들지 않습니다. 스스로 삶을 이루는 사람은 언제나 노래하고 춤추면서 두레와 품앗이를 나누니, 인문책을 안 읽어도 평화와 민주와 자유와 평등을 삶으로 즐깁니다. 진보정치가 있어야 평화나 민주나 자유나 평등이 퍼지지 않아요. 숲을 품고 들을 안으며 멧골과 바다를 어루만질 때에 아름다운 마을이 태어납니다.


  물질문명만 가득하면서 매캐한 도시에 숲이 퍼질 수 있기를 빕니다. 고속도로를 걷어치우고 숲을 되살릴 수 있기를 빕니다. 학교마다 강당이나 체육관은 없애도 되니, 숲을 가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국회의사당도 법원도 병원도 모두 숲으로 바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수작사계》에도 나오지만, 아이들은 들과 숲에서 나는 먹을거리를 가장 맛있고 즐거우면서 재미나게 먹습니다. 숲을 먹는 아이들은 숲을 지키면서 숲마음이 되어요. 4347.10.23.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숲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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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초 편지 - 출간10주년 개정판 야생초 편지 1
황대권 글.그림 / 도솔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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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86



풀 한 포기와 나누는 사랑

― 야생초 편지

 황대권 글

 도솔 펴냄, 2002.10.1.



  어제 낮에 집부터 면소재지까지 걸어갑니다. 2킬로미터 길이니 가깝습니다. 잰걸음이라면 삼십 분이면 갈 만합니다. 그러나 굳이 서두르지 않습니다. 천천히 걷습니다. 가을내음을 맡습니다. 아무도 들에 없기도 하지만, 들길을 걸어가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에 맞춰 살랑살랑 춤을 춥니다.


  깊은 가을로 접어들기에 살그마니 꽃을 피우는 환삼덩굴을 봅니다. 환삼덩굴꽃이 이렇게 생겼구나 하고 새삼스레 들여다봅니다. 이제껏 나물로 신나게 뜯어먹기만 했을 뿐, 정작 환삼덩굴꽃은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쑥꽃을 본 지 몇 해 안 되었습니다. 시골에서 살며 우리 보금자리 한켠에 쑥대를 그대로 두었기에 비로소 쑥꽃을 볼 수 있었어요.


  햇볕은 알맞게 따스합니다. 바람은 알맞게 시원합니다. 시골 논둑길이 예전처럼 흙길이라면 훨씬 싱그럽겠지만, 시멘트 논둑길도 그리 나쁘지는 않습니다. 시골마을이 예전처럼 농약 없는 들길이라면 한결 아름답겠지만, 비가 한 차례 지나간 들길인 터라 농약내음은 얼마 안 납니다.



.. 오늘 비디오를 보면서 영화로도 사람을 얼마든지 고문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무엇보다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주윤발이나 유덕화, 왕조현 등과 같은 톱스타들이 그토록 저질영화에 무분별하게 출연한다는 사실이다 … 교도소가 왜 이리 삭막해지는지 모르겠어. 풀 한 포기 없이 삭막해야만 잘 돌아간다고 여기는 건가? 심지어 구 척 담장 밑에 한 줄로 쪼로니 피어난 제비꽃마저 깨끗이 뽑아 버리니 말이야 ..  (27, 57쪽)



  환삼덩굴꽃을 한참 바라보는데 풀뱀 한 마리가 옆으로 슬슬 지나갑니다. 풀꽃을 보다가 풀뱀을 봅니다. 풀뱀은 나를 보았을가요. 풀뱀은 내 발자국이나 몸짓을 느꼈을까요.


  뱀은 사람을 무서워 합니다. 뱀은 사람이 무섭습니다. 사람은 옛날부터 뱀을 잡아서 먹었고, 뱀을 잡아서 죽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뱀을 끔찍하게 잡거나 죽입니다. 참말 뱀은 깃들 곳이 없습니다. 논밭에 하도 농약을 쳐대니 개구리나 도룡뇽뿐 아니라 작은 풀짐승이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뱀은 먹이가 자꾸 사라져서 괴롭습니다. 뱀은 지구별에서 사라져야 할까요? 뱀이 지구별에서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요?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논둑길은 조용합니다. 그러나 저 먼 큰길을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는 퍽 멀리까지 울립니다. 몇 킬로미터쯤 떨어져야 자동차 소리를 안 들을 만할까 헤아려 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는지 돌아봅니다. 자동차 바퀴소리가 우리 삶을 살찌울는지, 풀벌레와 멧새 노랫소리가 우리 삶을 북돋울는지 가만히 생각합니다.


  어떤 소리를 들어야 할까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할까요. 방송과 인터넷에서 흐르는 대중노래가 우리 마음을 살찌울 만한가요. 사람들은 저마다 이녁 삶에 맞추어 스스로 노래를 지어서 부를 수 없는가요. 먼먼 옛날 누구나 일을 하며 노래를 불렀듯이, 놀이를 하며 노래를 즐겼듯이, 일노래와 놀이노래는 이제 어디로 갔을까요. 삶을 가꾸는 삶노래는 어디에 있을까요.



.. 우리는 이미 박통 시절에 이런 생태적 재앙을 겪었다. 바로 통일벼에 의한 싹쓸이 경작이 그것이지. 이 통일벼 심기는 새마을 운동과 결합되어 생태적 재앙뿐 아니라 우리 농촌에 문화적 재앙까지 몰고 왔다 … 우리 산야에 자라나는 풀꽃들의 이름은 참으로 예쁘고 친근한 것들이 많다. 그 많은 풀들에 일일이 그런 예쁜 이름을 붙여 준 우리 민중들의 슬기에 감사드리고 싶다 ..  (106, 114쪽)



  황대권 님이 교도소에 갇혀서 지내야 하던 때에 쓴 짤막한 글을 모아서 엮은 《야생초 편지》(도솔,2002)를 읽습니다. 2002년에 처음 나온 이 책은 2012년에 새롭게 옷을 입고 다시 나왔습니다. 새로운 옷을 입은 책에 붙은 띠종이를 보면, “야생초는 단순한 풀이 아니라 새로운 문명을 여는 상징입니다”와 같은 글월이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을 기울입니다. “단순한 풀”은 무엇이고 “새로운 문명을 여는 야생초”는 무엇일까요. 한국말사전을 펼칩니다. ‘야생초(野生草)’는 “산이나 들에서 저절로 나서 자라는 풀”이라 합니다. ‘야초(野草)’는 “들에 저절로 나는 풀”이라 합니다. ‘산초(山草)’는 “산에 나는 풀”이라 합니다. ‘잡초(雜草)’는 “= 잡풀”이라 합니다. 그러면 ‘풀’은 무엇일까요? 한국말사전은 ‘풀’을 “초본 식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 풀이합니다.


  요즈음 사회에서는 이런저런 한자말을 쓰는데, 이런저런 한자말이 이 나라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모든 사람이 알 수 있습니다. 1950년대 시골에서 ‘야생초·야초·산초·잡초’ 같은 말을 썼을까요? 1900년대 시골이나 1800년대 시골이나 1500년대 시골이나 1000년대 시골이나 500년대 시골에서 이런 한자말을 썼을까요? 기원전 시골이나 단군 무렵 시골에서 이런 한자말을 썼을까요?


  턱없는 소리입니다. 고작 쉰 해 즈음 앞서만 해도 이런 한자말을 쓸 사람이나 쓰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지난날 시골사람은 누구나 ‘풀·들풀·멧풀·김(지심)’이라는 한국말을 썼어요. 여기에 ‘풀·나물·남새·푸성귀’라는 한국말을 썼습니다.


  2012년에 새로운 옷을 입고 나오는 《야생초 편지》라 한다면, “풀 편지”나 “들풀 편지”처럼 제대로 된 이름으로 고쳐서 제대로 내놓을 수 있기를 바랐는데, 글쓴이와 출판사 모두 풀이름 하나 제대로 살피지 못합니다.



.. 이담에 내가 살 집의 마당은 아마도 야생초 전시관이 될 거다. 어디 갔다 올 때마다 하나씩은 파올 테니까. 그러자면 마당을 아주 넓게 잡아야 하겠지, 그렇게 십여 년 가꾸다 보면 아마 자식놈은 꽃만 보고도 책 한 권 분량의 야생초 이름 정도는 줄줄 외워댈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집안엔 늘 야생초차 향기가 가득할 것이구 … 안동교도소 청소부는 야생초에게뿐만 아니라 내게도 천적과 같은 존재이다. 도대체가 풀이 좀 자라서 뜯어먹을 만하면 어느샌가 와서 엎어 버리니 ..  (155, 166쪽)



  풀이 없으면 사람은 죽습니다. 풀이 없으니 사람이 미칩니다. 풀이 없기에 사람이 싸우거나 다툽니다.


  우리가 먹는 밥이란, 쌀알이고, 쌀알이란, 벼이며, 벼란, 풀이요, 쌀알이란, 풀알, 곧 풀 열매입니다. 풀 열매인 풀알이 없으면 사람은 모두 굶을 뿐 아니라 죽습니다. 밥으로도 풀알을 먹지만, 사람이 먹는 돼지이든 소이든 닭이든 풀을 밥이나 모이로 삼아서 먹고 자라요. 예부터 한겨레가 먹은 고기란, 그냥 살점이나 살덩이가 아니라 ‘풀을 먹고 자란 고기’입니다. 고깃덩이를 먹어도 고기가 아닌 ‘풀로 이룬 살점’을 먹은 셈입니다.


  풀이 있기에 나무가 살 수 있습니다. 나무가 있기에 둘레에서 풀이 씩씩하게 자랍니다. 숲은 풀과 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우거진 곳입니다. 풀과 나무가 어우러져 숲이 될 때에, 사람들은 숲에서 나무를 얻어 집을 짓고 장작을 패며 다리를 놓습니다. 풀에서 실을 얻어 옷을 짓습니다. 풀이 없으면 밥도 못 먹지만 옷도 못 입습니다. 풀이 있기에 싱그럽게 바람이 붑니다. 나무뿐 아니라 풀이 지구별 온누리에 싱그러운 바람을 일으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온누리에 돋는 풀을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썼어요. 첫째, 먹는 풀입니다. 둘째, 옷을 짓는 풀입니다. 셋째, 지붕이나 울타리로 삼는 풀입니다. 넷째, 약으로 쓰는 풀입니다. 다섯째, 그대로 지켜보면서 푸른 바람을 얻도록 해 주는 풀입니다.



.. 문명이란 그 풀 냄새를 점차로 지워 없앤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야채가 그것이지. 야생의 풀 냄새를 제거하고 인간의 미각에 맞추어 특정한 맛만을 선택하여 육종, 발전시킨 것이 오늘의 야채이다 … 어제 이감을 오는데 대구 시내에 들어서서 다시 화원읍으로 빠지는 길이 마침 퇴근 시간과 겹쳐서 어찌나 밀리던지. 호송차의 창 틈 사이로 간신히 보는 풍경이었지만, 저 엄청난 차와 매연과 시멘트덩이 속에서 어찌들 살아가고 있는지. 참으로 나로서는 엄두가 나질 않는다. 괴물이 아니고서야 저런 환경 속에서 어찌 사나 싶었다 ..  (176, 194쪽)



  《야생초 편지》라는 책에 나오듯이 “풀내음을 자꾸 지워서 없애는 오늘날 사회요 정치이고 문화이며 교육이자 과학”입니다.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풀을 끔찍하게 미워할 뿐 아니라, 없애느라 바쁩니다. 왜 풀밭에 농약을 칠까요? 곡식이나 남새를 망가뜨리는 풀일까요? 아니에요. 나물을 뜯을 줄 모르고 약풀을 건사할 줄 모르니 함부로 농약을 칩니다. 요즈음 시골에서 모시풀을 함부로 베어 없애거나 태워 없애는 까닭은, 지난날처럼 모시에서 실을 얻어 모시옷을 짓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골에 모시풀이 많이 돋는 까닭은 지난날 어느 시골에서나 모시풀에서 실을 얻어 옷을 지었기 때문이에요.


  풀을 모른다면 시골에서 살 수 없습니다. 풀을 아끼지 않는다면 농사를 짓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풀을 알려 하지 않는다면 인문학 지식이 아무리 넘쳐도 바보스러운 삶으로 나아가고 맙니다. 풀을 가까이하지 않는다면 채식도 육식도 무엇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풀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지구별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풀 한 포기에서 평화가 자랍니다. 모든 꽃은 풀줄기에 달립니다. 풀씨에서 풀뿌리가 내리고, 풀씨에서 풀줄기가 오르며, 풀씨에서 풀잎이 돋아야, 비로소 꽃망울이 맺히고 꽃봉오리가 터져서 꽃잎이 벌어집니다. 4347.10.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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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왜? - 우리 동식물 이름에 담긴 뜻과 어휘 변천사
이주희 지음 / 자연과생태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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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84



풀이름을 읽는다

― 내 이름은 왜?

 이주희 글

 자연과생태 펴냄, 2011.7.20.



  시골에서 사는 분들은 시골일을 합니다. 시골일은 으레 흙을 만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시골사람이 하는 일이란 흙일이라 할 만합니다. 시골사람은 시골을 지키니 시골지기라 할 수 있고, 시골지기는 흙을 만지는 일을 하면서 흙을 보살피거나 지키니까 흙지기라 할 수 있습니다.


  흙은 어떻게 지킬 수 있는가 하고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울타리를 세우면 흙을 지킬까요? 울타리를 높게 쌓아서 빗물에 흘러넘치거나 쓸리지 않게 하면 흙을 지킬까요?


  오늘날 시골을 보면 어디에서나 농약을 엄청나게 씁니다. 오늘날 시골을 살피면 어디에서나 비료를 가볍게 많이 씁니다. ‘유기질’이라는 이름을 붙인 거름을 흙에 뿌리는 시골이 차츰 늘어나는데, 정부에서 돈을 들여 마련해서 시골 흙지기한테 나누어 주는, 아니 싼값에 파는 ‘유기질은 무엇일는지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돼지나 소를 키우는 곳에서 거둔 돼지똥이나 소똥일까요? 돼지똥이나 소똥이라면, 돼지나 소는 무엇을 먹고 어떤 똥을 눌까요? 아마 사료를 먹고 사료내음 가득한 똥을 누겠지요. 항생제를 먹고 나서 항생제 기운이 가득한 똥을 누겠지요.


  이제는 풀 먹는 소가 거의 없습니다. 이제 시골에서는 풀을 먹고 자라는 소가 매우 드뭅니다. 왜냐하면, 이제 시골에서는 풀이 몹시 드물기 때문입니다. 시골에서 풀밭 찾기란 아주 어렵습니다. 시골에 풀밭이 있으면, 누군가 풀밭에 농약을 뿌립니다. 농약으로 풀을 태워 죽입니다.



.. 함경도 지방에서는 황새를 한새라고 하며, 한새봉이나 한새골처럼 지명에 한새가 들어간 곳도 모두 황새와 관련 있다 … 누런색을 제외한 다른 색깔 한우가 사라지게 된 것은 1920년대 말부터 일제가 우리 소를 누런색으로 통일하려는 운동을 펼치면서다 … 박쥐가 복을 상징하기 때문에 우리 나라 전통 공예품이나 가구 및 건축 장식에 박쥐 문양이 많이 들어간다 ..  (15, 18, 184쪽)



  농약 머금은 풀이라면 돼지나 소한테 먹일 수 없습니다. 농약 머금은 풀을 먹다가는 돼지도 소도 아프거나 죽겠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농약 듬뿍 쳐서 키운 쌀과 남새를 먹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먹는 능금이나 배나 포도나 복숭아나 딸기 따위에 농약을 얼마나 많이 치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퍽 드뭅니다.


  도시에서는 학교급식을 합니다. 학교급식은 거의 한국쌀을 씁니다. 그러면, 학교에서 급식으로 먹이는 쌀은, 한국쌀은 얼마나 깨끗할까요? 우리는 급식이라는 제도를 마련한 뒤, 아이들한테 ‘농약쌀’을 마구 먹이지는 않나 궁금합니다.


  게다가, 시골에서 흙에 뿌리는 유기질은 싱그러운 거름이 아니기 일쑤입니다. 화학약품 가윽한 사료를 먹고 자라는 돼지나 소가 눈 똥으로 만든 유기질을 흙에 뿌리니, 농약을 한 방울조차 안 썼다 하더라도, 무엇을 믿어야 할는지 아리송할 뿐입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수천만에 이르는 사람을 먹여살릴 만한 ‘정갈하고 아름다우며 착한’ 곡식이나 남새나 열매는 거의 없다고 할 만합니다. 이 나라 오천만 사람을 먹여살리는 곡식과 남새와 열매는 그예 농약덩어리요, 화학약품덩어리입니다.



.. 우리 나라는 스스로 생물을 조사하고 분류학적으로 정리한 역사가 짧다. 그래서 생물학의 후발주자인 우리 학자들이 우리 나라 생물 이름을 지을 때 어쩔 수 없이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학명이나 이미 다른 나라 학자들이 붙인 이름을 많이 참조했다 … 멧토끼는 우리 나라 고유종으로 한반도 전역에 분포한다. 남한 지역에서는 멧토끼만 볼 수 있다. 그래서 예전부터 토끼라고 하면 멧토끼를 일컫는 것이다. 멧토끼가 생물학적인 정식 우리 말 이름이기는 하지만, 민간에서는 산토끼라고 더 많이 부른다. 실제로 많은 종류의 국어사전에는 멧토끼라는 말은 없고 산토끼라는 말만 있다 ..  (25, 166쪽)



  이주희 님이 쓴 《내 이름은 왜?》(자연과생태,2011)라는 책을 읽습니다. 풀이름, 나무이름, 벌레이름, 새이름, 짐승이름을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이주희 님은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이 나라 ‘이웃님’ 이름을 하나씩 살펴봅니다.


  그렇습니다. 이웃님입니다. 멧토끼도 이웃님이고, 고라니와 고니도 이웃님입니다. 해오라기도 이웃님이요, 박쥐도 이웃님이에요. 도룡뇽도 지렁이도 이웃님입니다.


  예부터 한겨레는 까치가 우는 소리를 듣고는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다는 뜻으로 여겼습니다. 까치가 우는 소리를 그냥 소리가 아닌 아름답고 즐거운 노래로 받아들였어요.


  예부터 한겨레는 제비가 봄에 찾아올 적에 몹시 반겼습니다. 제비집을 허무는 짓이란 아주 나쁜 짓이라고 여겼습니다. 제비집에서 제비똥이 쏟아질라치면 똥받이를 달았어요. 한집을 이루는 제비를 우리와 같은 님이요 이웃이요 동무로 삼으면서 언제나 즐겁게 마주했습니다.



.. 해는 태양에서 유래해 희다는 뜻을 갖게 되었으며, 그렇게 본다면 해오라기는 ‘흰 오리 같은 새’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 예전 사람은 고니보다 백조란 말을 더 많이 썼다. 지금도 생물에 관심 없는 많은 사람에게는 백조란 이름이 더 익숙하다. 그런데, 이미 잘 알려졌듯 백조는 일본인이 만든 한자어다 … 오랜 언어 순화 노력에도 별자리 중에 백조자리를 ‘고니자리’라고,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고니의 호수’라고 고치자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 ..  (45, 198∼199쪽)



  학자가 이런 이름이나 저런 이름을 붙이기 앞서, 모든 이웃님한테는 이름이 있습니다. 학자는 모르겠지요. 고장마다 우리 이웃님을 어떤 이름으로 불렀는지 잘 모르겠지요.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아야 하는 아주 작은 것이라면 모르되, 우리 곁에 있는 나무나 풀이나 꽃이나 벌레나 짐승이나 새라면, 아주 마땅히 어느 고장에서든 이 이웃님을 가리키는 이름이 있어요.


  그런데, 한국에서 학자로 일한 이들은 이웃님 이름을 살피거나 알아보려고 그리 나서지 않았습니다. 일본 학자가 붙인 이름을 슬그머니 따랐습니다. 얼토당토않다 싶은 이름을 학자 마음대로 붙이기도 합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자가 이 나라 마을과 고을에 엉뚱한 한자 이름을 마구 붙였듯이, 이 나라 학자는 이 나라 이웃님한테 터무니없는 이름을 붙이기 일쑤였어요.



.. 고려 시대에 이르러 잦은 전란과 사회적 혼란을 겪으면서 새로 건물을 짓거나 축대를 쌓는 데 많은 목재가 필요했다. 급기야 고려 말에 이르러서는 목재로 쓸 만한 곧게 자란 느티나무를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느티나무를 대체할 목재로 소나무를 선택한 것이다 … 고라니는 우리 나라와 중국 동북부 지역에만 사는데, 중국에서는 심각한 멸종위기에 놓여 법으로 엄격히 보호하고 있다. 눈에 많이 띈다고 흔하다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며, 실제로 흔하더라도 지금처럼 인간의 간섭으로 심각하게 왜곡된 자연생태계에서 어떤 계기로 일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  (76, 178쪽)



  마늘은 왜 ‘마늘’일까요? 박은 왜 ‘박’일까요? 흙은 왜 ‘흙’일까요? 나무는 왜 ‘나무’일까요? 아마 어느 누구도 말밑을 못 알아내리라 생각합니다. 누가 맨 처음에 이런 이름을 지었는지 알 길이 없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고장마다 고을마다 마을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서로 엇비슷한 이름을 썼어요. 옛날에는 인터넷도 자동차도 학교도 없는데, 다 다른 고장에서 태어나서 그 고장을 떠날 일이 없는데, 풀이건 짐승이건 벌레이건 나무이건, 고장이나 마을마다 사뭇 비슷하거나 아예 똑같기까지 한 이름을 썼습니다.


  풀이름을 읽습니다. 미나리를 읽고 쑥을 읽고 냉이를 읽고 꽃다지를 읽습니다. 흙을 만지며 숲을 사랑한 우리 옛사람이 저마다 어떤 사랑을 품고 어떤 꿈을 키우면서 이런 이름을 즐겁게 지어서 썼을까 하고 가만히 되뇝니다.


  이웃님한테 이름을 붙여서 부른 옛사람이라면, 이웃님을 해코지하거나 괴롭히는 일이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와 달리, 오늘날은 시골에서 사는 사람이 아주 드물고, 흙을 만지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이웃님과 가까이에서 만나면서 살갑게 어울려 지내는 사람은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이웃님이 아니니, 이름을 제대로 모르고, 이름을 제대로 모르는 이웃님이니, 그저 경제개발과 막공사를 일삼습니다.


  풀이름을 읽어요. 우리 함께 풀이름을 읽어요. 목소리에 사랑을 실어 풀이름을 읽어요. 즐겁게 노래하고, 아름답게 춤추어요. 삶을 노래하고, 하루를 누려요. 4347.9.21.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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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 인터뷰
로렌스 R. 스펜서 엮음, 유리타 옮김 / 아이커넥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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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79



슬기롭게, 아름답게, 사랑스레

― 외계인 인터뷰

 로렌스 R. 스펜서 엮음

 유리타 옮김

 아이커넥 펴냄, 2013.10.31.



  1962년에 《조용한 봄》(Silent Spring, 침묵의 봄)이라는 책이 미국에서 나왔습니다. 《조용한 봄》이라는 책을 쓴 레이첼 카슨 님은 1958년 1월 12일에 〈보스턴 해럴드〉라는 신문에 난 글을 읽고 나서 이 책을 쓰기로 다짐했고, 네 해에 걸쳐 자료를 모으고 갈무리해서 책을 내놓습니다. 그러고는 1964년에 숨을 거둡니다.


  레이첼 카슨 님이 1962년에 《조용한 봄》을 내놓기 앞서 미국에 있는 수많은 ‘농약 회사’는 엄청난 돈과 힘을 들여 이 책이 나오지 못하도록 막으려 했고, 글쓴이를 비아냥거리거나 깎아내리는 짓을 일삼았습니다. 그렇지만, 미국에서 이 책은 1962년부터 1964년 사이에 100만 권 즈음 팔렸다고 합니다. 시골을 농약으로 뒤덮을 뿐 아니라, 도시는 살충제로 뒤엎으려고 하는 물결이 드세었어도, 이런 물결을 아랑곳하지 않고 ‘참’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려는 사람은 꽤 많았습니다.


  한국에서는 1974년, 1976년, 1991년, 2002년에 《조용한 봄》이 한국말로 나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미국에서만큼 이 책이 읽히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미국에서처럼 이 책을 읽고 생각을 깨뜨리거나 마음을 여는 사람이 좀처럼 늘지 않습니다. 농약과 살충제가 흙을 어떻게 망가뜨리는가를 낱낱이 밝힐 뿐 아니라, 농약과 살충제가 사람을 어떻게 무너뜨리는가를 샅샅이 알려주는 책이 어엿하게 있으나, 이러한 책을 제대로 읽으면서 생각을 가꾸는 사람이 퍽 드뭅니다.


  시골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들과 숲에 농약을 뿌립니다. 도시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곳곳에 살충제를 뿌립니다. 시골에서 모깃불을 태우는 사람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시골에서도 도시와 똑같이 살충제를 뿌립니다.



.. 무지와 비밀 유지가 보호하는 것은 단 하나, 다른 사람들을 구속하는 권력으로 그들의 사적인 의도를 숨기는 것이었습니다 … 나는 ‘내’가 내 몸이 아니라는, 단순하지만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 모든 피라미드 문명은 무지와 두려움과 무력으로 인류의 노예화를 지속시키기 위한 통제 방법으로 종교를 이용합니다 … 도대체 어떤 이유로 그렇게 많은 자원을 낭비하며 그렇게 많은 쓸모없는 건조물들을 세웠을까요? 신비스러운 환영을 창조하기 위해서지요 ..  (42, 98, 152, 159쪽)



  한국에서는 1970년부터 새마을운동 물결이 쳤습니다. 독재권력을 앞세운 이들이 이 운동을 펼쳤습니다. 새마을운동은 이름 그대로 새로운 마을을 만들겠다는 운동이라고 하지만, 새로운 마을은 어디에서도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독재정권이 만든 새로운 마을은 ‘어린이와 젊은이가 모두 빠져나간 시골’ 모습이 됩니다. 독재정권이 세운 새로운 마을은 ‘석면(함석, 슬레트) 지붕’과 ‘시멘트 고샅’과 ‘기름 먹는 농기계’가 어우러진 시골입니다.


  새마을운동이 밀어닥치기 앞서까지, 한국 시골에는 쓰레기가 거의 없었습니다. 새마을운동이 밀어닥치면서 한국 시골에는 쓰레기가 엄청나게 생겼습니다. 첫째, 석면 지붕입니다. 둘째, 농약과 농약병입니다. 셋째, 비닐입니다. 넷째, 비료 푸대입니다. 다섯째, 농기계가 내뿜는 배기가스와 석유 찌꺼기입니다. 여섯째, 도시에서 흘러든 박카스 빈병과 텔레비전 따위입니다.


  그런데, 지난 2013년에 유네스코에서는 ‘새마을운동 기록물’을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올렸다고 합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온갖 쓰레기를 불러들였고, 시골을 무너뜨렸으며, 독재정권을 버티는 밑힘이 된, 이런 무시무시한 짓을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올렸습니다.


  아마, 세계기록이 될 만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빨리 어느 한 나라를 수렁에 빠뜨리는 짓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빠르게 어느 한 나라를 더럽히거나 망가뜨리는 짓은 아주 드물기 때문입니다.



.. 우주에는 소리를 전달하는 공기가 없기 때문에 우주선 조종사는 그런 기관이 필요없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몸에 소리를 담당하는 감각 기관이 없고 음식을 섭취할 필요가 없어 입도 없었습니다 … 에어럴은 몸을 살아서 기능하게 하는 그녀만의 ‘에너지’를 스스로 공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 몸은 영적 존재인 그녀에 의해서만 살아 움직였습니다 … “우주에는 세균이 없다.” … “당신 우주선은 어떤 방식으로 비행하는가?” “‘마음(MIND)’으로 통제한다. ‘생각 명령’에 반응한다.” ..  (53, 54, 56, 57쪽)



  새마을운동을 앞세운 지난 독재정권은 군대힘을 곁들여 사람들 입과 귀와 눈과 코를 모조리 틀어막았습니다. 요즈음 시골에서는 ‘석면 지붕 철거’를 중앙정부에서 돈을 뒷받침해서 맡아 합니다. ‘석면 지붕’이 얼마나 나쁜 줄 이제서야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다만, ‘석면 지붕 철거’를 해 준다고 하면서도 시골에 있는 늙은 할매와 할배한테 ‘석면’이라는 낱말은 안 쓰고 ‘슬레트’나 ‘함석’이라는 낱말만 쓸 뿐이며, 왜 이러한 지붕을 철거하는지 안 밝힙니다. 그리고, 지난날 새마을운동을 벌이면서 왜 이러한 지붕으로 바꾸라고 닦달하면서 괴롭혔는지 뉘우치지 않습니다. 죽은 독재자도 산 독재자도 이를 또렷이 밝히거나 뉘우친 일이 없습니다. 아주 ‘조용히’ 석면 지붕을 없앨 뿐입니다.


  그런데, 석면 지붕을 없앤다 하더라도, 이 지붕을 어떻게 없애는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땅에 파묻는지 중국에 내다 파는지, 바다에 버리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모든 일은 ‘조용히’ 이루어집니다.


  오늘날 시골에서는 비닐쓰레기를 마을에서 태우지 말도록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새마을운동 때문에 길든 시골사람은 집집마다 따로 비닐을 태웁니다. 논둑이나 밭둑에서 비닐을 태웁니다. 군청에서 비닐쓰레기를 커다란 짐차에 가득 실어 가져가기도 하는데, 비닐쓰레기를 가져가서 어떻게 하는지도 알 길이 없습니다. 아마, 소각장에서 태우거나 쓰레기매립장에 파묻겠지요. 한국에서는 이런 일밖에 더 할 줄 모르니까요.


  한국은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었습니다. 한국에는 미국 군대가 있습니다. 한국 정부는 미국 정부가 시키는 일을 고분고분 따릅니다. 베트남에 군대를 보내라 하면 굽신굽신 군대를 보냅니다. 소말리아나 동티모르에 군대를 보내라 하면 넙죽넙죽 군대를 보냅니다. 이라크에 군대를 보내라 하면 바로바로 군대를 보냅니다. 그렇지만, 미국에서 그렇게 눈길을 받은 《조용한 봄》이라는 책에 깃든 이야기는 한국 사회에서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고, 살피지 않습니다.



.. “당신들은 어떤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 “질서, 힘, 항상 미래, 통제, 성장.” … 외계인은 그들과 소통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녀를 두려워하거나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나는 그녀에 대해서 그리고 그녀한테서 가능한 한 모든 것을 너무 배우고 싶었고, 그건 나를 설레게 했습니다 … 마침내 나는 외계인은 외관이 아니라 말하자면 ‘성격’에 의해 식별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당신이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라면 왜 자신을 여성적으로 언급하는가?” “나는 창조주다, 어머니/근원이다.” … “다른 사람은 안 된다, 배워야 한다/알아야 한다/이해한다.” ..  (60, 66, 72, 75, 80쪽)



  생각해 보면, 《조용한 봄》이라는 책이 나오지 못하게 막으려 했던 미국 농약 회사와 재벌과 다국적기업과 중앙정부입니다. 그러니, 한국 중앙정부도 《조용한 봄》 같은 책이 널리 읽히기를 안 바라리라 느낍니다. 이런 책이 읽히더라도 ‘도시에 있는 지식인이 교양도서로 읽어서 지식으로 머릿속에 가두도록 이끌’ 뿐이리라 느낍니다.


  《조용한 봄》 같은 책을 읽고 나서, 파리약이나 모기약을 버리는 도시사람이나 지식인은 얼마나 될까요. 이런 책을 읽은 뒤, ‘농약을 쓴 먹을거리’는 안 사서 먹겠다고 외치는 도시사람이나 지식인은 얼마나 될까요. 이런 책을 읽고 나서, ‘조용한 시골’로 삶자리를 옮겨, 농약과 비료와 항생제와 비닐과 농기계가 아닌 내 손과 몸으로 흙을 살찌우고 숲을 가꾸면서 삶을 짓겠다고 씩씩하게 웃고 노래하는 도시사람이나 지식인은 몇이나 될까요.


  책은 광이 아닙니다. 책은 헛간이나 창고가 아닙니다. 책은 몸을 움직이도록 이끄는 힘입니다. 책은 우리 마음이 몸을 슬기롭게 움직이도록 기운을 북돋아 주는 길동무입니다.



.. 200년 전 미 합중국 헌법 제정자들이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이래 우리는 많은 영어 표현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 “에어럴은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돈키호테》 《천일야화》라고 말하더군요. 그녀는 이런 이야기를 쓴 작가들은 위대한 기술이나 권력보다 위대한 영혼과 상상력을 갖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 “나는 질문에 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구를 안전하게 지키고 보존하는 것은 내 임무의 일부이기 때문에 나는 인류를 구성하고 있는 불멸의 영적 존재들의 안위에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정보를 당신에게 제공할 것이고, 그것은 지구 환경과 모든 무수한 생명체의 생존을 도와줄 것입니다. 모든 지각 있는 존재는 불멸의 영적 존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  (86, 97쪽)



  나는 시골에 살면서 늘 귀를 기울입니다. 내가 어떤 소리를 듣는지 귀를 기울입니다. 하루 내내 여러 가지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소리란 무엇일까요. 주파수일까요, 파동일까요. 또는 노래일까요, 가락일까요. 또는 이야기일까요, 빛일까요. 또는 삶일까요, 사랑일까요. 또는 아무것도 아닐까요. 또는 모든 것일까요.


  오늘날 한국 사회를 살피면, 어느 시골을 가든 농약바람이 드세게 붑니다. 농약을 안 치는 시골을 찾아보려면 손가락을 꼽아야 합니다. 도시사람은 거의 모르고, 지식인은 아예 모릅니다. 시골마을에 보금자리를 두면서 지내는 도시사람이 없으니, 또 시골마을에 삶자리를 가꾸면서 대학교수를 하든 작가를 하든 기자를 하든 전문직을 하든, 이런 사람이 없기 때문에 다들 모릅니다.


  겉으로 보기에 시골은 아주 평화로운 듯 여길 만합니다. 가을을 앞둔 팔월 끝자락 시골 들판을 보면 벼이삭이 알알이 맺히면서 볏포기가 살몃살몃 고개를 숙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시골에는 소리가 없습니다. 쥐가 죽은듯이 조용합니다.


  오늘날 한국 시골에는 개구리 노랫소리가 없습니다. 요즈음 한국 시골에는 풀벌레 노래잔치가 없습니다. 아주 사라지지는 않았어요. 거의 몽땅 자취를 감추었을 뿐입니다. 농약바람을 안 맞은 곳에서 개구리 몇 마리와 풀벌레 몇 마리가 가까스로 살아남습니다. 농약바람을 맞았어도 씩씩하게 살아남는 녀석들이 더러 있습니다.


  농약이 훑고 지나간 들에는 새조차 없습니다. 참새도 왜가리도 제비도 없습니다. 요즈음 시골에서는 제비 구경조차 아주 어렵습니다. 봄에 기껏 태평양을 가로질러 한국에 왔어도, 봄을 지나 여름을 거쳐 가을 문턱에 이르기까지, 무엇보다 농약바람에서 살아남아야 하는데, 이 일이 몹시 어렵습니다. 온 시골이 농약바람이니, 제비가 잡아먹을 벌레가 죄 사라집니다. 제비는 굶어서 죽거나 자동차에 치여서 죽거나 농약을 마시고 죽어야 합니다.



.. “역사라는 것을 이해하기에 앞서 시간이라는 것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합니다. 시간은 공간에 있는 사물들의 움직임을 측정하는 임의의 수단일 뿐입니다. 공간은 선형적인 것이 아닙니다. 공간은 사물을 볼 때의 이즈비의 관점에 의해 결정됩니다 … 에이럴은 이즈비들이 우주의 시작 그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들을 ‘불멸의 존재’라고 부르는 이유는 ‘영(spirit)’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죽을 수도 없지만 ‘무엇이고/무엇인가 될(is-will be)’ 것이라는 하나의 개인적으로 인식된 지각 안에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 사실상 물질은 퇴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파괴되지 않습니다. 물질은 형태를 바꿀 수는 있지만 절대로 파괴되지 않습니다 … 모든 형태와 실체는 결코 퇴화하지 않는 동일한 기본 물질로 이루어집니다 ..  (107, 108, 111쪽)



  새마을운동은 시골을 무너뜨리는 짓을 하면서, 이와 함께 도시를 일그러뜨리는 짓을 합니다. 시골은 시골대로 바보스러우면서 우악스러운 굴레에 갇히도록 내모는 새마을운동입니다. 도시는 도시대로 서로 다투고 짓밟으면서 돈에 사로잡힌 노예가 되도록 내모는 새마을운동입니다. 시골을 떠난 사람이 죄 도시로 갔으니, 도시에는 사람이 넘칩니다. 부속품이 되어 회사나 공장을 움직일 일꾼이 넘칩니다. 이러다 보니, 도시로 몰린 사람들은 제대로 대접을 못 받습니다. 실업자가 넘치고 비정규직이 그득하니까, 서로서로 이웃으로 여길 수 없습니다. 두레나 품앗이는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남을 밟고 올라서는 솜씨’를 갖추도록 학원과 학교에 집어넣어 들볶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사랑이나 꿈을 말하지 않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숫자와 점수와 돈만 말합니다.


  아이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어버이가 드뭅니다. 돈이나 권력을 써서 군대에서 빼내는 바보들 말고, 군대를 없애 이 나라에 평화가 찾아오도록 애쓰는 어버이가 드물다는 뜻입니다. 군대가 있으면 무엇을 할까요? 전쟁훈련을 하지요. 전쟁훈련을 하면 무엇을 할까요? 전쟁을 합니다. 아주 마땅한 노릇이에요.


  오늘날 학교는 무엇을 하나요? 시험공부를 합니다. 시험공부를 하면 무엇을 할까요? 입시지옥에 스스로 갇히지요. 아주 마땅한 노릇입니다.


  평화를 가꾸지 않는 나라이니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삶을 가르치지 않는 학교이니 사랑스러울 수 없습니다. 평화를 가꾸려면 군대와 경찰이 모두 사라져야 합니다. 평화를 가꾸려면 대통령과 국회의원 같은 이들이 모두 사라져야 합니다. 평화를 가꾸려면 시장이나 군수 같은 이들도 모두 사라져야 합니다. 이런 자리는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잘 생각해 볼 노릇이에요. 우리가 스스로 평화롭게 지낸다고 하면, 군대나 경찰이나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시장이나 군수 같은 자리가 있을 까닭이 있을까요?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두레와 품앗이를 나누면서 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삶을 가꾼다고 하면, 대학입시가 있을 까닭이 있을까요?



.. 삭제하는 기억은 한 몸이나 한 생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그 이즈비의 정체성은 물론이고 거의 무한에 가까운 과거의 축적된 경험 전부를 지우는 것입니다 … 그들은 마음을 잃은 로봇 같은 비존재가 되도록 제압당하는 겁니다 … 구 제국이 아주 오랫동안, 아마 수백만 년 이상 지구를 그들의 ‘감옥 행성’으로 사용해 왔다는 사실 … 각 이즈비는 자신이 지구에 존재할 특별한 목적을 지녔다는 말을 듣긴 하지만 감옥에 있어야 할 목적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 전자 그물망에 걸리면 이즈비는 자신이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있는지 기억해 낼 수 없기 때문에 아예 탈출이 불가능합니다 … 개인은 불멸의 영적 존재가 아니라 그저 생물학적 육체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강화시키는 데 사제나 간수들을 이용했습니다 … 자신이 한 창조와 자신의 생존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 져야 할 의무에 대한 책임을 외부로 돌리기를 스스로 선택하는 한, 그는 노예입니다 ..  (115, 116, 117, 130, 131쪽)



  로렌스 R. 스펜서 님이 엮고, 유리타 님이 한국말로 옮긴 《외계인 인터뷰》(아이커넥,2013)를 읽으며 곰곰이 생각합니다. 《외계인 인터뷰》를 한국말로 옮긴 유리타 님은 《람타 화이트 북》과 《람타, 현실 창조를 위한 입문서》를 한국말로 옮기기도 했습니다. 이 책들은 모두 한 갈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가 스스로 삶을 짓는 길이 무엇인가 하고 밝히려 합니다. 남이 아닌 내가 스스로, 어떤 권력이나 돈을 등에 업고 하는 일이 아니라 언제나 내가 스스로, 삶을 지어서 누릴 수 있는 사랑스러운 길을 밝히려 합니다.



.. 과학적 지식을 ‘기억해 낸’ 사람들은 그들이 지구에 보내지기 전에 이미 그 지식을 알고 있었습니다 … 지구 이즈비들이 지속적으로 서로를 아주 사악하고 부정적으로 상대함에 따라 인간 사회에서 이와 유사한 발전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 감옥 행성의 목적은 이즈비들을 영원히 지구에 가두기 위한 것입니다 …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 이룩한 이러한 문명들은 그 문명들을 창조한 이즈비들이 특정 양식과 스타일에 익숙해지고 또 거기에 정체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 양식과 스타일을 계속 되풀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 대부분의 행성은 대기의 화학적 구성이 식물과 다른 유기체에게 영양분을 공급하고 그 생명체가 다시 다른 생명체의 먹이가 되는 지구에서처럼, 생명체를 ‘먹여 살릴’ 대기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  (124, 125, 129쪽)



  우리는 어떻게 하루를 맞이할까요. 한국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우리들은 저마다 어떻게 하루를 맞이할까요.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나라가 맞을까요. 대한민국은 얼마나 평화로운 나라인가요. 대한민국에 자유와 민주와 평등과 평화는 참말 어느 만큼 있다고 할 만할까요.


  이 나라에서 학교를 다니는 어린이와 푸름이는 스스로 삶을 지을 수 있을까요. 이 나라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마친 젊은이는 스스로 삶을 짓거나 사랑을 지을 수 있을까요. 이 나라에서 대학교를 다닌 젊은이는 스스로 삶을 짓거나 사랑을 짓거나 꿈을 지을 수 있을까요.


  남들이 시키는 일만 하는 이 나라 사람들이 아닌가 궁금합니다. 스스로 하고픈 일을 찾아나서지 못하는 이 나라 사람들이 아닌가 궁금합니다. 어마어마한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이나 문화권력이나 군사권력이나 경찰권력 따위 때문에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는듯이 두 손을 놓는 이 나라 사람들이 아닌가 궁금합니다.


  우리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읽으려고 하는 이 나라 사람들은 얼마나 있을는지요. 우리 교육이 아이들을 어떻게 길들이면서 어떤 쪽으로 내모는가를 제대로 읽으려고 하는 이 나라 사람들은 얼마나 있을는지요.



.. 지구에 사는 대부분의 존재들은 자신이 이즈비라는 것을 모르고, 그런 영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모른다 … 덫은 이즈비들의 관심과 주의를 끌기 위해 전자파로 만든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 지구 이즈비들도 나치와 같은 구 제국의 비열한 증오로 인해 부실한 생물학적 육체 안에서 영원히 영성을 박탈당한 채 노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 난해한 종교의례, 천체의 정렬, 비밀 의식, 거대한 기념탑, 놀라운 건축양식, 예술적으로 그려진 상형문자, 인간-동물 ‘신들’은 지구의 이즈비 감옥 인구가 풀 수 없는 비밀을 만들기 위해 고안된 것입니다. 비밀은 이즈비가 생포되어 기억 삭제 요법을 받고 그들 고향으로부터 멀리 멀리 떨어져 있는 행성에 수감되었다는 사실에 관심을 두지 못하도록 주의를 딴 데로 돌리기 위한 것입니다 ..  (135, 136, 139, 151쪽)



  하느님은 예배당이나 성경에 없습니다. 하느님은 종교로 찾을 수 없습니다. 내가 나 스스로 돕지 않는다면 나를 도울 사람은 없습니다. 언제나 한 걸음씩 길을 걷습니다. 내가 걷는 길은 내가 걸을 뿐, 다른 사람이 걸어 주지 않습니다. 더 빨리 걷는 길이나 더 느리게 걷는 길은 없습니다. 저마다 스스로 삶을 걸어갈 뿐입니다.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어떤 마음을 다스려야 할까요. 사랑이란 무엇이고, 꿈이란 무엇일까요. 돈이란 무엇이고, 집과 옷과 밥이란 무엇일까요.


  학교라는 것이 아예 없던 지난날에는, 어느 누구도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학교라는 곳이 아예 없던 지난날에는, 어느 누구나 스스로 집을 짓고 옷을 지으며 밥을 지으며 스스로 살림을 꾸렸습니다. 학교도 책도 없던 지난날에는, 사람들이 글 한 줄 몰랐으나, 모두 풀을 알고 벌레를 알며 하늘을 알고 물과 비와 바람을 다 알았습니다.


  학교와 책이 넘치는 오늘날에는 풀을 아는 사람이 매우 드뭅니다. 전문 학자도 풀을 제대로 모릅니다. ‘풀 박사’라 하는 사람조차 모르는 풀이 많습니다. 전문가 가운데 사슴 한 마리나 토끼 한 마리보다 풀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학교랑 책이랑 인터넷이랑 아무것도 없던 옛날에는 누구나 풀을 잘 알았고, 흙이나 물이나 바람이나 해나 바람이나 별을 모두 잘 알았어요. 다만, 임금님이라든지 지식인이나 권력자 자리에 있던 이들은 아무것도 몰랐지요.


  생각해야 합니다. 지난날에는 사람들이 스스로 삶을 지으면서 아이들한테 삶을 물려주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어른’이 되어 ‘아이’한테 물려준 삶을 생각해 내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사람’으로 살며 ‘사람인 아이’한테 이어준 사랑을 생각해 내야 합니다.



.. 구 제국 정보원들은 국제적인 금융업자로서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은행들은 민간 선동가로서 은밀히 국가 간의 전쟁을 조장하고 전쟁 자금을 유통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전쟁은 수감자들 전체가 통제 가능한 일종의 내부 체제입니다. 이런 국제적 금융 업자들의 자금으로 발생되는 무자비한 대량 학살과 살육의 목적은 지구 이즈비들이 열린 소통으로 서로 나누고 협조하여 함께 번창할 수 있는 활동을 하고, 그리하여 그들이 지구 감옥을 탈출하는 것을 차단하는 것입니다 … 지구 생명체에 관한 현재의 ‘진화’ 이론은 생물학적 종이 이렇게나 다종다양하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못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자연 도태에 의한 진화는 공상과학 소설입니다 … 그 이전에 제작된 어떤 생명체도 외부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동물들은 햇빛, 무기질, 식물성 물질만을 소비했지 음식으로 다른 동물을 먹는 일은 없었습니다 ..  (178∼179, 192, 195쪽)



  뭔가 조금 ‘안다’고 하는 사람은 가끔 툭 한 마디를 할 줄은 ‘압’니다. 이를테면, 오늘날 사람들은 ‘뇌’를 코딱지만큼만 쓴다는 대목을 압니다. 어쩌면, 코딱지만큼조차 안 쓸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그렇게 학교를 다니고 외국에도 배우러 다녀와도, 뇌를 고작 코딱지만큼 쓸 뿐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책을 읽고 강의를 들으면서도, 사람들은 정작 뇌를 코딱지만큼 쓰기도 벅찹니다.


  아침마다 끔찍하거나 따분한 쳇바퀴 직업을 지키느라 지치는 요즈음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도시를 떠나지 못하고, 도시에 있더라도 도시를 아름다운 삶자리로 바꾸지 못하는 요즈음 사람들입니다.


  군대에서 사람을 때려죽이는 짓은 늘 일어납니다. 언론에 나오는 기사는 아주 조금밖에 안 됩니다. 얼마 앞서 한 사람이 맞아죽었다고 하는데, 군검찰이 하는 말을 들으면 여러모로 ‘재미있(?)’습니다. 맞아서 죽은 사람더러, 또 때리는 짓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더러, ‘왜 진작에 신고하지 않았느냐’고 말하는 군검찰입니다. 처음부터 ‘신고 얼거리’가 제대로 잡힌 군대라면, 어처구니없이 얻어맞았을 적에 신고를 했을 텐데, 처음부터 ‘신고 얼거리’뿐 아니라 ‘삶 얼거리’가 올바로 선 군대라면, 누가 누구를 때리는 짓부터 생길 수 없습니다. 누가 누구를 때리는 곳은 아무것도 바로서지 않은 곳입니다. 죽도록 늘 얻어맞는 아이가 신고를 해 본들 누가 들어 줄까요? 외려 더 얻어맞습니다. 게다가, 신고를 해 보았자 ‘네가 맞을 짓을 했으니 맞지. 더 맞아.’ 하면서 고개를 돌리는 군대 얼거리입니다.


  경상도 밀양에서 송전탑을 놓고 아픈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고압 송전탑이 얼마나 나쁜가 하는 자료는 진작에 다 알려졌습니다만, 이를 챙겨서 알아보는 사람이 드물고, 중앙정부와 한국전력이 하는 일은 ‘공사가 늦어져서 피해를 보는 돈이 얼마나 큰가’ 같은 거짓말을 언론에 퍼뜨리는 짓하고, 수많은 경찰과 전경(군대)을 끌어들여서 늙은 할매와 할배를 집어던지는 짓입니다.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데, 경찰과 군대를 들여 시골 할매를 집어던지는 짓을 여러 해 동안 하는 데에 들인 돈이라면, 이 돈으로 특고압 송전탑 말썽을 다 풀고도 남습니다. 그러나 중앙정부는 이러한 일을 하지 않아요. 슬기로운 길을 걷지 않습니다. 그리고, 슬기로운 일을 하지 않는 중앙정부 얼거리를 못 읽거나 안 읽는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발전소는 그냥 지어야 하는 줄 아는 사람이 많고, 송전탑도 그냥 박아야 하는 줄 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회가 시키는 대로 따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학교에서 길들여 놓은 대로 언론이 외치는 대로 고분고분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습니다.



.. 도메인 지배층은 살을 가진 몸을 입지 않는데, 그 이유는 ‘성의 탐미적 고통’의 전자 파동은 이즈비를 쇠약하게 만들고 중독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 그들이 자신들이 아는 모든 것을 잊게 만든 기억 삭제 요법을 받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그들이 영원히 배우고 연구했다면 또 어땠을까요 … 모든 것은 우주 공간에서 무게도 크기도 위치도 없는 생각, 즉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 지구가 과학기술에 의해 파멸되지 않을 것을 보장하기 위해 풀어야만 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적이고 인도주의적 문제들입니다 … 모든 창조와 생명을 타오르게 하는 영적 불꽃의 상대적인 중요성을 평가절하하거나 누락시키는 수준에 머무는 한, 모든 과학은 여전히 무력하고 파괴적인 채로 남게 될 것입니다 … 과학자들은 관찰하는 척하지만, 그들은 보는 것만 보고 그것을 사실이라고 말합니다 ..  (197, 206, 208, 209쪽)



  새마을운동은 요즈음에도 시골에서 농약과 비닐과 농기계와 화학비료를 듬뿍듬뿍 쓰도록 내몹니다. 시골에서 기껏 ‘유기질(화학비료가 아닌 유기비료)’을 중앙정부에서 돈을 들여 싼값에 판다고 하더라도, ‘유기질’은 소똥과 돼지똥으로 만듭니다. 유기질을 만드는 소똥과 돼지똥은 화학사료를 먹은 소와 돼지가 누는 똥입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화학비료로 만드나, 화학사료를 먹은 소와 돼지가 누는 똥으로 유기질을 만드나, 성분은 똑같습니다. 모양새와 이름만 다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나라에는 ‘유기농이 없다’는 뜻입니다. 도시에 있는 사람을 먹여살릴 만큼 ‘유기농업’을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새마을운동이 불러들인 여러 가지 가운데 하나는 시멘트입니다. 이제 시골에서 맨흙을 밟을 만한 땅은 아주 드뭅니다. 외지고 깊은 숲길조차 시멘트를 붓습니다. 4대강사업을 빌미로 삼아, 아주 외지고 조용한 멧골짝까지 삽차로 파내어 냇바닥과 골짜기를 시멘트로 바꾸는 짓을 일삼습니다.


  석면은 이제 나쁜 줄 안다지만, 시멘트는 얼마나 나쁜 줄 깨닫지 않으려 합니다. 석유를 태우는 자동차 배기가스가 나쁜 줄 알아서 ‘매연 적게 나는 휘발유’를 만든다고도 하지만, 매연이 적게 난다 한들 안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석유로 굴러가는 자동차만 끝없이 만듭니다. 집을 덥힐 적에도 석유를 쓰도록 억지스럽게 내몹니다. 장작을 태워 집을 덥히거나 밥을 끓일 수 있는 시골집은 거의 안 남았습니다.


  삶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삶을 알 수 있겠습니까. 정치와 경제와 사회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읽을 수 있겠습니까. 정치와 경제와 사회, 여기에 문화와 문학과 과학과 종교와 철학 따위가 삶을 얼마나 짓누르거나 해코지하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 과학은 물질의 종교입니다. 과학은 물질을 숭배합니다. 과학의 패러다임에서는 창조된 것이 전부이고 창조주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종교는 창조주가 전부이고 창조된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지요. 이 두 극단은 바로 감옥의 쇠창살입니다 … 구 제국 감옥 시스템의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든 당신이 당신 자신의 혼을 보지 못하도록 막는 것입니다 … 지구와 지구에 사는 모든 존재들의 생존은 당신이 자신의 본질을 되찾고 무한의 세월 속에서 획득한 기술을 다시 기억해 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 당신이 어떤 것이든 상상할 수 있고 그 모든 것을 인지하고 마음대로 그것이 일어나도록 만들 수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만약 당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만약 당신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그리고 모든 게임의 결과를 항상 알고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지루하지 않을까요 ..  (210, 211, 221쪽)



  《외계인 인터뷰》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아주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어렵다고 여긴다면 가없이 어렵겠지요. 왜냐하면, 우리가 스스로를 굴레에 가두어 스스로를 노예로 바꾸면서 스스로를 바보스레 내모는 줄 느끼지 못할 때에는, 《외계인 인터뷰》가 다루는 이야기를 하나도 못 받아들이거나 조금도 못 알아들을밖에 없습니다.


  다국적기업이 아주 뛰어나기에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바보이기 때문에 속습니다.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문학과 과학과 철학과 종교 권력을 거머쥔 이들이 매우 뛰어나기에 우리를 짓밟거나 괴롭히거나 속이거나 길들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노예나 부속품이 되려고 쳇바퀴를 돌기 때문에 바보스러운 삶을 되풀이하고야 맙니다.


  바라보아야 합니다. 삶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 마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 마음에 따라 움직이는 몸을 바라보고, 내 몸을 움직이는 마음을 다스리는 내 넋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 넋이 깃든 얼을 바라보고, 내 넋이 나아갈 길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평화를 바라보는 사람만 평화로 나아갑니다. 사랑을 바라보는 사람만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전쟁을 바라보기에 자꾸 전쟁으로 갑니다. 차별과 불평등과 따돌림을 바라보니까 자꾸 차별과 불평등과 따돌림으로 갑니다.


  꽃을 바라보는 사람은 스스로 꽃이 됩니다. 숲을 바라보는 사람은 스스로 숲이 됩니다. 권력을 바라보는 사람은 권력이 될까요? 네, 권력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을 뜨지 못한 노예나 부속품과 같기 때문에, 나보다 여린 이웃을 괴롭히는 권력이 되거나, 나와 함께 있는 동무를 짓밟는 바보스러운 권력이 됩니다.



..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세력에 대항해 우리 자신을 방어할 수는 없습니다 … 자신들이 누구인지 알아 자신들이 갖고 있는 인간의 형체를 넘어서서 일어나야 합니다 … 감옥 관리자들은 지구 이즈비들의 억압적이고 전체주의적인 활동들을 언제나 조장하고 선동할 것입니다. 그러니 수감자들끼리 싸우지 않게 할 이유가 있습니까 … 수감자들이 그들 스스로 감옥을 나갈 방법을 찾아내야만 합니다 … 부처님의 실용적인 가르침과 방법은 사람들을 노예화하고 통제하여 자기 잇속만 차리려는 사제들에 의해 기계적인 종교 의례들로 왜곡되어 버렸습니다 ..  (228, 231, 233, 265쪽)



  바라보았으면 느껴야지요. 바라보아 느꼈으면 생각해야지요. 무엇을 생각할까요? 내 삶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걸어갈 삶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걸어갈 삶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 삶을 사랑스레 가꾸어 날마다 새롭게 깨어나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숨결을 생각해야 합니다.


  뇌를 코딱지만큼만 쓰는 까닭은 스스로 뇌를 쓸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뇌를 활짝 열어서 쓰는 사람이 있다면, 이녁 스스로 뇌를 활짝 열어서 쓰려고 마음을 품은 뒤 꾸준히 마음을 기울이고 또 기울여서 뇌를 활짝 여는 길을 스스로 찾았기 때문입니다.


  값비싼 사진장비를 갖추었기에 아름답구나 싶은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사진장비는 값비싸더라도 마음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구나 싶은 사진을 못 찍습니다. 마음이 있는 사람은 1만 원짜리 1회용사진기로도 아름답구나 싶은 사진을 찍습니다. 마음이 있는 사람은 값싼 사진기로든 값비싼 사진기로든 스스로 찍고 싶은 사진을 찍습니다. 이와 달리, 마음이 없는 사람은 값싼 사진기를 손에 쥐면 아예 사진 찍을 생각을 못 하고 맙니다.


  오늘날 시골은 참으로 조용합니다. 군사독재정권이 ‘지은’ 새마을운운동이 무서운 농약바람을 ‘지어’서 모든 소리를 잠재웠기 때문입니다. 다만, 죽지는 않았습니다. 잠들었을 뿐입니다.


  오늘날 시골에서는 아이들 울음소리나 웃음소리나 노랫소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농약을 뿌리는 기곗소리에다가 농기계가 움직이는 시끄러운 소리만 있기 때문입니다. 시골에서 농약과 기계와 비닐과 항생제와 화학비료와 시멘트가 사라질 때에, 비로소 다시 시골에 아이들 소리가 태어날 수 있습니다.


  잘 헤아려 보셔요. 오늘날에는 시골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아이들 소리가 없습니다. 도시는 아파트와 학교와 학원과 자가용과 아스팔트와 돈 때문에 아이들 소리가 없습니다. 거의 모든 시골 아이들을 빼앗은 도시인데, 막상 그 많은 사람이 몰렸어도 도시조차 무척 조용해요. 사람다운 소리가 없기 때문에 도시는 조용합니다. 시골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조용합니다.


  지구별에 사랑이 깃들기를 바라면서 《외계인 인터뷰》를 차근차근 되읽습니다. 나 스스로 사랑으로 거듭나기를 꿈꾸면서 《외계인 인터뷰》를 새롭게 다시 읽습니다. 이 책은 ‘지식책’이 아니기 때문에, 지식 한 가지를 더 머릿속에 넣으려 할 마음이라면 굳이 손에 들지 않아도 됩니다. 이 책은 ‘이야기책’이니, 이야기를 가만히 귀여겨들으면서 스스로 삶을 새롭게 짓고 싶은 마음이 들 때에 비로소 손에 들 수 있기를 빕니다. 슬기롭게 바라보면서 아름답게 깨어나서 사랑스레 삶을 짓는 이웃들이 차츰 늘어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4347.8.30.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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