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허기 랜덤 시선 35
전동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시를 노래하는 말 322


장례비가 든 적금통장을 받고서
― 거룩한 허기
 전동균
 랜덤하우스, 2008.2.25.


아버지 돌아가신 뒤
몇 해 동안 시 한 줄 쓰지 못했더니
지난밤 꿈속에서
누가 쓴 것인지, 서럽고 아프고 황홀한 시들이
내 입술을 열고 노래처럼 흘러나왔습니다
오랫동안 눈물 훔쳤습니다 (첫눈/12쪽)


  해마다 겨울이면 아이들은 여름에 바다나 골짜기를 놀러가자고 말합니다. 이윽고 여름이면 아이들은 눈사람을 굴리고 싶다며 눈이 언제 오느냐고 묻습니다. 겨울 한복판을 지나 곧 봄을 맞이하겠다고 느끼다가 문득 생각합니다. 왜 겨울에는 여름을, 여름에는 겨울을 그릴까요? 왜 겨울에 더 겨울다운 추위를 맞이하지 않고, 여름에 더 여름다운 더위를 누리지 않을까요?

  그래도 해마다 똑같이 흐르는 모습이 있으니, 아이들은 겨울에 처음 눈을 맞이하면 마당이나 뒤꼍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몸짓으로 입을 벌려서 눈을 받아먹습니다. 첫눈이란 겨울다운 첫밥입니다. 첫눈이란 기쁜 겨울놀이를 여는 첫걸음입니다. 첫눈이란 참말로 겨울이네 하고 느끼는 신나는 첫놀이입니다.


간성 혼수에 빠질 때는 링거 줄을 뽑아 던지며 살려달라고, 서울 큰 병원에 옮겨달라고 울부짖으셨는데, 한 달 반 만에 참나무 둥치 같은 몸이 새뼈마냥 삭아 내렸는데, 어느 날 모처럼 죽 한 그릇 다 비우시더니, 남몰래 영안실에 내려갔다 오시더니 손짓으로 날 불러, 젖은 침대 시트 밑에서 더듬더듬 무얼 하나 꺼내 주시는 거였다 장례비가 든 적금통장이었다 (겉장이 나달나달했다/20쪽)


  시집 《거룩한 허기》(랜덤하우스, 2008)를 쓴 전동균 님은 첫눈하고 이녁 아버지를 맞대어 놓고 이야기를 엮습니다. 하늘로 떠난 아버지를 그릴 적마다 서럽고 아팠는데, 어느 날 꿈에서 눈부신 시가 저절로 흘러서 잠결에 오랫동안 눈물을 훔쳤다고 합니다.

  아직 이 땅에 누워서 몹시 앓던 아버지는 어느 날 조용히 병원 침대에서 겉종이가 나달나달한 적금통장을 꺼내어 아들한테 내밀었다고 합니다. 죽음을 바라보던 늙은 아버지는 아들 어깨에 짐이 얹히기를 바라지 않으면서 ‘장례비 적금통장’을 건사했다고 해요.


꾸벅꾸벅 졸다 깨다
미사 끝나면
사거리 옴팍집 손두부 막걸리를
하느님께 올린다네
아직은 쓸 만한 몸뚱아리
농투성이 하느님께 한 잔,
만득이 외아들 시퍼런 못물 속으로 데리고 간
똥강아지 하느님께 한 잔, (까막눈 하느님/42쪽)


  겨울에 눈먹기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찬바람 쐬며 노는 아이들이 집으로 들어오고 나서 따뜻하게 몸을 녹이도록 건사하는 살림입니다. 신나게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밥을 짓고 국을 끓입니다. 개구지게 논 아이들이 씻고 나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도록 챙깁니다. 가만 보면, 어버이 자리에서 누구나 생각을 짓고 꾸려요. 아이들이 마음껏 날개를 펼 수 있도록. 아이들이 눈부신 노래를 가슴에 담을 수 있도록. 아이들이 홀가분하게 꿈길을 걸을 수 있도록. 기쁘게 놀고 즐겁게 어우러질 수 있도록.


요즘 나의 소풍은
홍은동 뒷산, 몇 해 전 이사 왔을 때 심은
살구나무에게 가는 거야

누군가 사납게 칼질을 해
몸의 절반은 찢겨졌지만
기어코 살아보겠다고, 불구의 제 몸을 부둥켜안고 발버둥쳐
두어 해나 지나서야 전해오는
연둣빛 소식을 만나러 가는 거지 (살구나무의 저녁은/94쪽)


  작은 시집에 흐르는 작은 노래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나즈막하게 읊는 이야기입니다. 하늘로 떠난 아버지를 그리는 이야기요, 꿈결에 조용히 찾아온 시잔치를 눈물로 적시는 이야기입니다. 시골마을 이웃 할배가 경운기 끌고 공소에 가서 꾸벅꾸벅 졸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막걸리 한 사발을 하느님하고 나누는 이야기요, 서울 한켠에서 살 적에 살구나무를 씩씩하게 심고는 봄빛을 만나러 다니는 이야기입니다.

  겨울은 곧 지나갑니다. 봄으로 접어들면 이 겨울날 추위는 까맣게 잊습니다. 봄빛이 흐드러질수록 지난 겨울바람을 가만히 내려놓습니다. 사나운 칼날에 살아남은 나무처럼, 배고픔이나 아픔을 짊어지다가 내려놓는 하루처럼, 조곤조곤 속삭이는 말로 이야기를 그립니다. 장례비가 든 적금통장을 받고서 늙고 고단한 아버지 손등을 어루만지던 하루를 적바림합니다. 삶을 마친 이야기를 왼손에 얹고, 삶을 이어가는 이야기를 오른손에 놓습니다. 2018.2.7.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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