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그머니 사람들



  ‘새치기’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습니다. ‘슬그머니’라는 말을 써 보겠습니다. 오늘 서울에서 고흥으로 돌아가는 길에 전철을 두 번 갈아타고, 시외버스를 고흥읍에서 내린 다음에 군내버스로 갈아타는데요, 이동안 참 많은 어린이·푸름이·젊은이·늙은이가 슬그머니 끼어들었습니다. 슬그머니 끼어들지 않은 사람도 제법 되지만, 슬그머니 끼어든 사람이 훨씬 많았습니다. 참 대단하지요. 멀쩡한 줄이 있어도 슬그머니 앞으로 끼어들면서 낯빛 하나 안 바뀌어요. 이들 가운데 푸름이를 슬그머니 한 번 노려보았더니 ‘왜 나한테만? 다들 슬그머니 끼어드는데?’하는 얼굴로 홱 고개를 돌려요. 몸살로 몸이 매우 힘들어서 어린이한테도 푸름이한테도 젊은이한테도 늙은이한테도 한 마디 지청구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기다릴 줄 모르고, 기다림이라는 낱말이 마음에 없구나 싶고, 이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는 빨리빨리만 있겠구나 싶어요. 나는 이런 물결이 바로 전쟁 미치광이하고 똑같은 몸짓이라고 느꼈습니다. 대놓고 빼앗는 사람 뒤에 슬그머니 숨어서, 그야말로 슬그머니 빼앗는 이들이 바로 전쟁 불구덩이가 일어나게 하는 불씨입니다. 2017.11.29.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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