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쇳물 쓰지 마라
제페토 지음 / 수오서재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시를 노래하는 말 304


아프고 작은 이와 이웃 되는 언론을 바라며
― 그 쇳물 쓰지 마라
 제페토 글
 수오서재 펴냄, 2016.8.22. 12000원


  저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습니다. 저는 스무 살 무렵부터 제금을 나서 살았고, 이때부터 텔레비전 없는 살림을 지었습니다. 텔레비전을 집에 두지 않은 지 스무 해가 넘는데, 살면서 어렵거나 번거로울 일을 못 느낍니다. 우리 집 아이들도 텔레비전 없는 집에서 사는 동안 힘들거나 갑갑한 일을 못 느껴요.

  텔레비전을 두지 않는 살림이란, 방송을 들여다보지 않는 살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방송에서 어떤 이야기가 흐르는지 하나도 안 들여다볼 뿐 아니라, 사회 흐름이라든지, 날씨 이야기조차 안 쳐다본다는 살림이기도 해요. 저나 곁님은 ‘마지막으로 어버이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던 무렵’에 얼굴을 보거나 이름을 들은 연예인이나 가수 이름을 어렴풋이 떠올릴 뿐, 누가 뜨거나 지는지 몰라요. 우리 집 아이들은 어떤 연예인도 가수도 모르고요.

  방송을 보지 않으니 신문도 읽지 않습니다. 이러니 저희 집에서는 참말로 정치나 사회나 경제나 문화나 교육이나 연예인이나 운동경기 이야기를 하나도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 집에서 스스로 짓는 살림을 서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더디거나 느리다 할지라도 우리 스스로 가꾸거나 돌볼 하루를 이야기할 수 있어요.

나는 역군 아닌데
종현이 아버지인데
지수 씨 남편인데
썩 괜찮은 아들인데
(나는/‘보령 조선소 직원 철판에 깔려 숨져’를 읽고서 2010.10.6.)

  시집 《그 쇳물 쓰지 마라》(수오서재,2016)를 읽으며 살짝 놀랍니다. 저희는 방송도 신문도 가까이하지 않기에 이 시집이 지난해 여름에 나온 줄 몰랐어요. 전남 광주에 있는 마을책방에 갔다가 그곳 책시렁에서 눈에 뜨여서 장만했어요. 이 시집을 선보인 분은 ‘제페토’라는 이름을 쓴다고 해요. 이 시집을 쓴 분이 사내인지 가시내인지 젊은지 늙은지 알 길이 없다고 합니다. 다만 마흔 줄을 넘긴 아저씨라고 어림한다고 해요.

  성별이나 나이란 대수롭지 않습니다. 이 시집을 낸 분이 ‘댓글로 쓴 시’가 대수롭습니다. 제페토라는 분은 이녁 이름을 고이 묻은 채, 신문에 실리는 사회 이야기를 읽다가 문득 ‘시를 써서 댓글을 남겼다’고 해요. 누리신문에서 글을 읽고서 댓글을 남겼겠지요.

짜디짠 소금장수라지만
씀씀이 푸짐했다
지뢰가 걷어붙인 두 팔로
온종일 땡볕 아래에서 수확한
눈부신 결정들은
소금이었을까
마음이었을까
(소금선생/‘세상의 소금 된 손 없는 소금장수의 선행’을 읽고서 2011.5.1.)

  신문에 실리는 사회 이야기에는 아프거나 슬프거나 고단하거나 괴로운 사람들 살림이 묻어나곤 합니다. 제페토라는 분은 아픈 이웃을 신문글로 마주하면서 함께 아파 합니다. 슬픈 이웃을 마주하면서 함께 슬퍼 하고, 괴로운 이웃을 마주하며 함께 괴로워 해요. 그리고 이 모든 마음을 시로 수수하게 풀어냅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신문에 나오는 사회 이야기는 퍽 딱딱합니다. 이른바 ‘사실 보도’만 하니까요. 일하다가 그만 용광로에 떨어져 아스라이 목숨을 잃은 이웃이 있어도, 입시지옥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어린 이웃이 있어도, 무시무시한 전쟁무기 때문에 티끌처럼 목숨을 빼앗긴 이웃이 있어도, 신문에 글을 싣는 기자는 ‘모든 슬픔이나 눈물 같은 느낌을 감추’고서 딱딱한 사실 보도만 해요.

박정호가 죽었어요
훌쩍대는 전화에
울 엄마는 그 아이
몇 등이냐 물었네
(학원 가는 길/‘명절이 지나고 다니는 학원 수가 더 늘었어요’를 읽고서 2012.9.28.)

  어쩌면 말이지요, 신문이나 방송이 꼭 사실 보도만 해야 하지 않을 수 있어요. 아프거나 슬픈 이웃 이야기를 들려줄 적에 함께 눈물을 적시면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어요. 기쁘거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줄 때에는 함께 웃음꽃을 피우면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엉터리 정치꾼이 재판을 받고 죄값을 받아서 감옥에 들어가는 이야기를 다룰 적에는 매섭게 나무라거나 꾸짖을 수 있어요. 앞으로는 ‘감정 보도’를 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참거짓(사실)에 바탕을 둔 곧은 마음(감정)을 드러내는 보도’가 되어야겠지요.

술을 샀습니다
나만큼 가난한 후배에게
한턱을 냈습니다
오래전부터 그는
곱창을 노래했었습니다 (사당동에서)

  방송국에서 파업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방송도 신문(종이신문)도 안 보지만, 누리신문에 글을 쓰는 터라, 누리신문에 오르내리는 이야기로 얼핏 알았습니다. 파업을 하려는 방송국 일꾼은 앞으로 방송이 옳고 바르며 참다운 길을 가도록 힘쓰려는 마음을 드러내려는 뜻이리라 생각합니다. 촛불 한 자루가 일으킨 큰 빛물결처럼 방송국 일꾼이 똘똘 뭉쳐서 일어나는 몸짓도, 참다운 방송으로 거듭나는 아름다운 소리물결이 될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를 바라고 싶어요. 방송 파업을 하는 김에, 방송국 일꾼이 ‘방송국이 있는 서울 같은 도시’를 떠나서 외진 시골이나 멧골로 찾아가 보면 좋겠습니다. 제가 사는 전남 고흥 같은 시골은 ‘○○시 내 고향’이나 ‘○○노래자랑’ 같은 일이 아니라면 방송국 기자도 신문사 기자도 찾아오는 일이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더욱이 외진 시골이나 멧골에 사는 할매나 할배는 ‘방송에 나오는 대로 믿’곤 하셔요. 두 다리로 외진 시골이나 멧골로 방송국 일꾼이 찾아다니면서 ‘입으로 방송 파업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렇게 시골 할매하고 할배한테 온몸으로 들려준 ‘새로운 방송으로 거듭나려는 이야기’를 차곡차곡 갈무리해서, 앞으로 새로운 방송길을 열 적에 즐거이 들려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리하여 댓글시인 제페토 님이 앞으로 ‘아름답고 즐겁게 피어나는 이웃’ 이야기도 넉넉히 마주하면서 그 시골바람 좋더라 하는 시도 쓸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 쇳물 쓰지 마라”에 이어 “그 나물밥 맛나더라” 같은 시가 태어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017.9.6.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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