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학개론 리토피아포에지 55
윤종환 지음 / 리토피아 / 2017년 2월
평점 :
품절


시를 노래하는 말 295


멈춘 시계도 별빛과 같으니
― 별빛학개론
 윤종환 글
 리토피아 펴냄, 2017.2.25. 9000원


  고등학교 2학년이던 무렵, 저는 시를 적는 공책을 따로 챙겨서 들고 다녔습니다. 무언가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 공책을 따로 마련해 보았고, 늘 책상맡에 놓고서 무언가 떠오르면 그대로 적어 보았습니다.

  딱히 누구한테 읽히려는 마음으로 무엇을 쓰지 않았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날마다 똑같은 날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었어요. 대학입시를 바라보며 달리는 하루가 아니라, 어제와 오늘과 모레는 모두 다르다는 마음으로 하루를 적어 보고 싶었어요.


그대는 알까
며칠 뒤 우편함에 담길 사연과
손마디 끝에서 묻어나온 떨림
그 흔적이 흥건하게 젖은
부끄러운 한 사람의 끄적거림을 (우표)


  고등학교를 다니며 적던 시 공책은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혼자 쓰고 혼자 되읽었습니다. 이러다가 3학년에 이르는데, 어느 날 자율학습을 하던 때, 국어 교사 한 분이 교실을 죽 돌아다니다가 제 책상맡에 놓인 시 공책을 문득 보았어요. 국어 교사한테 교과서도 참고서도 문제집도 아닌 뭔가 다른 공책을 올려놓은 모습이 보였구나 싶었지요. 그분은 제 시 공책을 집어들고 아주 오랫동안 읽었습니다.

  학교에서 수업을 받다가도 무언가 떠오르면 적으려고 늘 책상맡에 두었는데, 이럴 줄이야. 보여줄 마음이 없던 글을 누가 말도 없이 집어들어 읽을 적에는 대단히 싫으면서 부끄럽습니다. 국어 교사는 제 시 공책을 다 읽고서 “부지런히 잘 써 봐.” 하고 한 마디를 남겼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날 뒤로 시 공책을 치웠어요. 더는 시 공책에 하루 이야기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내 손을 감싸던
내 맥박 소리를 가장 가까이 듣던 이가 오늘 떠났다
나와 이리저리 부대끼며 체온을 나누고
심지어 손목의 때마저도 공유하던 이 (멈춘 시계)

그간 찍은 작품을 보니
가장 아름다운 햇볕
가장 아름다운 바람이 들려옵니다
검지로 셔터를 누르는 순간
한쪽 귀에 찰칵 소리가
다른 한쪽에는 내 심장이 터졌습니다 (사진가)


  대학생이면서 시를 쓰는 윤종환 님이 선보인 《별빛학개론》(리토피아,2017)을 읽습니다. 윤종환 님은 글쓰기를 무척 좋아하고, 어릴 적부터 꾸준히 글을 써서 여러 곳에서 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대학생으로서 ‘멘토링&강연 교육기부 봉사단’을 꾸려서 이끌기도 하고, 군대에서 젊은 날을 보내는 동안에 책읽기와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해요.

  시집 《별빛학개론》은 젊은 넋으로 하루하루 짓는 윤종환 님이 그동안 마주한 모든 사람과 사물을 별빛으로 바라보면서 그려낸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 뜬 별도 별이요, 내가 마주한 사람도 별이며, 내가 손에 쥔 온갖 물건도 별이라고 하는 마음을 시 한 줄로 담아냅니다.


점과 점을 연결하다 보면
밤하늘 별자리처럼 그려집니다
별자리가 그물처럼 얽혀 있는데
그 사이로 물고기와 전갈과 황소도 지나가고
무엇이 우리 사이를 헤집고 지나가도
그물에 걸리지 않습니다 (점과 선의 밤하늘)

보라색 별의 뿌리를 씹었을 때
입안을 메우는 도라지의 쓴맛
흙의 깊은 숨결까지 끌어 모은 듯
풍성하게 퍼지는 별의 혈관 냄새
우주는 이 특유의 쓴맛을
도라지의 애환이라 일컫는다 (도라지꽃의 속사정)


  멈춘 시계를 별빛으로 볼 수 있다면, 여름에 부치는 부채도 별빛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찻길 끄트머리에 쪼개진 아스팔트 조각도 별빛으로 볼 수 있을 테고, 닳아서 몽툭한 연필도 별빛으로 볼 수 있을 테지요. 물에 젖은 광고종이도 별빛으로 볼 수 있을 테며, 이가 빠진 오랜 부엌칼도 별빛으로 볼 수 있을 테고요.

  도라지 한 뿌리는 보라빛 별이 됩니다. 나물 한 접시가 별이요, 밥 한 그릇이 별입니다. 능금이나 살구나 복숭아 한 알도 별이 되어요. 콩 한 톨도, 볍씨 한 톨도 모두 별이 되고요.

  우리는 별에 둘러싸여서 별을 먹고 별을 마신다고 할 만합니다. 아름다운 별을 먹고 마시기에 아름다운 별사람으로 하루를 누리겠지요. 사랑스러운 별을 보고 느끼고 듣고 만지기에 사랑스러운 별사람으로 하루를 짓겠지요.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을 고운 별말입니다. 네 입에서 나와 내 귀로 스미는 말도 고운 별말입니다. 우리가 나누는 모든 이야기는 미리내처럼 흐드러지는 눈부신 별노래라고 할 만합니다.


만든 이의 소망을 지키려는 듯
탄생에 보답이라도 하듯
끝까지 눈덩이에 붙어있는다
녹아도 가장 나중에 녹는 웃음
겨울에 태어나서
겨울에 사라지는 눈사람 (눈사람)


  젊은 시인 윤종환 님이 스물이라는 별바다 같은 나이를 즐거이 가로질러서 서른이라는 새로운 별바다를 맞이할 때까지 어떤 별누리를 가슴에 담을 만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이윽고 마흔이라는 별바다를 만나고 쉰이라는 별바다를 만날 적에는 어떤 별노래를 부를 만할까요.

  이른 아침에 낫을 쥐고 풀을 베며 생각해 봅니다. 어느새 쑥쑥 자란 풀을 벨 적에는 이 아이들(풀) 참 잘 자라네 하고 바라보면서 손이며 몸에 풀내음이 벱니다. 갓 돋은 풀을 벨 적에는 엊그제 싹이 돋는다 싶더니 벌써 이렇게 앙증맞도록 올라왔구나 하고 노래하면서 낫질을 석석 하며 새삼스레 온몸에 풀내음이 뱁니다.

  베어 놓은 풀은 한창 키가 오르는 옥수숫줄기 옆에 놓습니다. 베어 놓은 풀이 새로운 흙이 되기를 바라는 뜻입니다. 여름볕에 옥수수가 타지 않도록 땅을 덮어 주기를 바라는 뜻입니다.
  우리 집 밭자락에서 자라는 옥수수는 해와 바람과 비를 먹기도 하지만, 온갖 풀포기가 시들며 흙으로 돌아가서 나누어 주는 기운을 먹기도 해요. 우리 집 옥수수가 잘 익어 즐거이 따서 삶을 적에는 옥수수에 깃든 모든 기운을 우리 몸으로 받아들이는 살림이 되리라 느낍니다. 이 옥수수에도 따스한 별빛이 스미겠지요.

  《별빛학개론》에 이어 조금 더 쉽게 별빛 이야기를 들려줄 시를 기다려 봅니다. ‘-학개론’이라는 딱딱한 이름 말고, 젊은 숨결로 새롭게 길을 짓는 수수하면서도 고운 이름을 붙이는 살림 이야기를 시 한 줄에 담아 볼 수 있기를 빌어 봅니다. 대학생으로 지내는 나날은 매우 짧아요. 대학생은 네 해로 그치고, 나머지 기나긴 나날은 ‘별사람’으로 짓는 삶입니다. 오롯이 흐를 별살이를 헤아리는 이야기를 적어 본다면 도시에서도 밤하늘에 별빛이 더욱 밝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2017.6.24.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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