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십자가 문예중앙시선 26
박도희 지음 / 문예중앙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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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73



시뻘건 십자가는 아무도 못 살리지만

― 블루 십자가

 박도희 글

 문예중앙 펴냄, 2013.5.24. 8000원



  1964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박도희 님이 빚은 시집 《블루 십자가》(문예중앙,2013)를 읽습니다. 1964년이면 어떤 해일까 하고 헤아리면서 시를 읽고, 이 시를 쓴 분은 오늘 하루 어떤 살림을 지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시를 읽습니다. 2000년대에 태어나서 2010년대에 어린이나 푸름이로 산다면 1960년대를 헤아리기 어려울 테지요. 1970년대나 1980년대에 태어난 사람도 1970년대를 헤아리기는 어려워요. 1960년대 서울은 1970년대나 1990년대하고 사뭇 달랐을 테며 2000년대나 2010년대하고는 더 대기 어려울 만큼 다른 곳이었으리라 느껴요.



오른발이 홈쇼핑의 글루코사민 광고를 보고 / 왼발이 아일랜드에 풍차를 세운다 / 나뭇잎아, 오래오래 아주 오래 / 공중에 머물러라 (나뭇잎을 사러 간다)


내게 거짓말을 한 적 없으므로 믿을 수 없는 당신 / 폭포수 같은 시선을 간직해도 골짜기는 잠잠하다 / 당신이 있어 난 이르게 태어나기만 거듭했을 뿐이지만 / 나락의 꿈은 내 발의 종적을 감춘다 (새벽 산)



  오늘 우리가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십자가는 ‘빨간 십자가’입니다. ‘파란 십자가’는 눈 비비고 씻고 다시 떠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박도희 님은 파란 십자가를 시집으로 노래합니다. 마치 파란 하늘 같은 십자가를, 파란 바다 같은 십자가를, 파랗게 물들이면서 흐르는 바람 같은 십자가를 노래해요.



내장산 대웅전 앞 / 〈즉석사진〉 완장을 두른 노인 / 비가 내리는 경내를 바ㅏ라보는 눈이 대웅전 같다 / 제 몸에 초점을 맞춘 적 없이 늙어버린 렌즈 속으로 / 단풍이 진다 단풍 아닌 발자국이 없다 (즉석사진)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 꿈속의 나무가 / 커져간다 / 꿈속 나무를 껴안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 내 그림자에 박힌다 (그림자가 무겁다)



  겨울에 자전거를 달려 면소재지 우체국에 다녀왔습니다. 서울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지 싶습니다만, 전남 고흥에서는 한겨울에도 맨발로 고무신을 꿰어 자전거를 달릴 만합니다. 그만큼 포근한 바람이고 날이며 하루입니다. 날이 워낙 포근해서 이 겨울에 눈이 아닌 비가 내리고, 겨울비를 맞으며 자전거를 달리는데, 장갑조차 안 낀 손에서도 땀이 돋고 몸에서 하얀 김이 돋습니다. 우체국에 택배를 맡기고 돌아오는 길에 하늘을 올려다보니 여러 새가 곳곳에서 하늘을 가르며 날아요. 동백나무 우듬지에 앉은 박새가 보이고, 빈 들판에서 이삭을 쪼다가 푸드득 날아오르는 멧비둘기가 보입니다. 까마귀 한 마리가 하늘을 가로지르기에, 저 까마귀는 그냥 까마귀일는지, 아니면 큰까마귀일는지, 아니면 다른 까마귀일는지 헤아려 봅니다. 맨눈으로는 알아보기 쉽지 않은데, 까마귀 가운데에도 텃새랑 철새가 있다고 해요.


  그러고 보면 나는 이 고흥이라는 고장에서 겨울에도 맨발에 고무신만 꿰지만, 서울만 가도 발이 시리니 양말을 꿰어야 합니다. 해주를 넘고 평양을 지나 의주쯤 이르면 양말 한 켤레로는 모자랄 테고 온몸을 친친 싸매야 할 테지요. 의주에서 압록강을 지나 연길을 거쳐 흑룡강 즈음 이르면 그야말로 눈하고 코만 바깥으로 내밀고 모두 두껍게 감싸야지 싶습니다. 시베리아쯤 이르면 추위는 또 얼마나 대단할까요.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딸이 현관문에서 소리를 지른다 아들은 시험 보는 날 지각을 한다 창밖을 보며 소나무야 소나무야 변하지 않는 네 빛, 노래를 부른다 엘리베이터도 주차장도 없는 가파른 아파트가 중력 없이 흔들린다 (떠다니는 길)



  십자가는 우리를 건져내어 살려 줄까요? 글쎄 모르는 노릇입니다. 어쩌면 십자가는 예배당은 살리되 우리는 아무도 못 건지고 못 살릴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십자가 아닌 우리 스스로를 믿고 사랑할 적에 비로소 스스로 건지면서 살려낼 수 있지 않으랴 싶어요. 해가 저물 즈음부터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십자가로는 참말 아무도 못 건지고 못 살리지만, 하늘을 닮고 바람을 닮은 파랗디파란, 그렇다고 굳이 십자가여야 하지 않을 테지만, 파란 하늘을 가슴에 담고 파란 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할 적에 스스로 새롭게 깨어날 길을 열 만하지 싶습니다.


  “소나무야 소나무야 변하지 않는 네 빛”을 노래하는 시집 《블루 십자가》를 가만히 되새기면서 겨울 저녁을 앞둡니다. 아침에 끓인 된장국을 아이들이 맛나게 먹기를 바라고, 오늘은 오늘 나름대로 새로운 놀이와 이야기로 즐겁게 삶을 지으며 가슴에 곱게 노래 한 송이를 피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엘리베이터도 주차장도 없는 가파란 아파트”에 이 겨울에도 싱그럽고 포근한 파랗게 눈부신 바람 한 줄기 불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2016.12.21.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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