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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때와 죽을 때 ㅣ 창비시선 372
황학주 지음 / 창비 / 2014년 3월
평점 :
시를 노래하는 말 251
사랑하기에 죽음은 떠올리지 않아
― 사랑할 때와 죽을 때
황학주 글
창비 펴냄, 2014.3.20. 8000원
작은아이는 올해 한가위에 장난감 자동차 한 대를 얻습니다. 작은아이는 늘 자동차를 그림으로 그리고 또 그리며 다시 그리고 새로 그리고 거듭 그리며 살았어요. 나는 처음에 이런 모습을 썩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작은아이가 자동차를 온마음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차츰 받아들였어요. 우리는 누구나 ‘사랑할 삶’을 스스로 찾느냐 못 찾느냐 하는 대목이 대수롭거든요.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사랑할 삶’을 스스로 찾느냐 못 찾느냐가 대수롭다고 느낍니다.
한사람의 젖어가는 눈동자를 / 한사람이 어떻게 떠올리는지 모르지만 / 사람들은 사랑한다고 말한다 (얼어붙은 시)
어느 날 야윈 눈송이 날리고 / 그 눈송이에 밀리며 오래 걷다 (겨울 여행자)
작은아이는 여러 할머니 할아버지한테서 받은 돈을 푼푼이 모았습니다. 이 돈으로 스스로 장난감을 장만했습니다. 리모콘으로 움직이는 자동차를 스스로 얻은 작은아이는 일산 외할아버지 댁에서 늦은 낮잠을 자면서 자동차를 품에 안습니다. 잘 적에 품에 안다가 데구르르 구르면 자칫 장난감이 깔려서 망가질 수 있다고 말했지만, 작은아이는 여느 날하고 다르게 데구르르 구르지 않습니다. 작은아이 스스로 제 작은 몸에 ‘오늘은 반듯하게 누워서 자자’ 하는 말을 심었나 봐요.
이 깜찍하도록 어여쁜 아이를 바라보며 내 어릴 적을 떠올립니다. 나는 이 아이 못지않게, 또는 이 아이만 하게, 또는 이 아이보다 더욱 장난감을 온마음으로 사랑했다고 느낍니다. 어쩌면 내 어린 나날을 돌아보기에 우리 작은아이가 ‘장난감은 덜 사랑하는 삶’이 되기를 바란다고 할 만해요.
바람이 처음 깨워주었을 때 / 그땐 우리 몸을 아직 찾지도 못했거든 / 어둠의 낭송자가 지나가듯이 / 불어오는 데서 불어가는 데까지 …… 나무로 된 신을 신고 / 나무로 된 밥을 먹고 / 나무로 된 책을 읽고 / 나무로 된 약을 바르고 / 나무로 된 방에 들어 / 나무를 몸으로 만진 게 처음이엇던 (바람의 분침)
눈이 오면 너는 일어나 나갔지만 / 눈이 오면 나는 옆으로 누워 / 고흥으로 떠난 적이 있다 (고흥)
가만히 보면 아이들한테는 장난감이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사랑받는 손길이 대수롭습니다. 아이들한테는 장난감이 있느냐 없느냐보다도, 저희가 즐겁게 놀려고 할 적에 곁에서 따스하게 보살피는 손길이 있느냐를 헤아린다고 느껴요.
사랑할 때란 살아갈 때이지 싶어요. 살아갈 때란 사랑할 때이지 싶고요. 황학주 님이 쓴 시집 《사랑할 때와 죽을 때》(창비,2014)를 읽으면서 이 대목을 헤아려 보았지요. 우리가 사랑할 때란 참말 살아갈 때입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때란 죽을 때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살겠노라 다짐할 적에는 사랑을 하기 마련이고, 우리가 스스로 죽겠노라 다짐할 적에는 사랑하고 멀어지기 마련이지 싶어요.
계단이 높은 길은 나만 사용하는 느낌이었다 / 막다른 골목엔 도금한 가락지에 끼운 등빛이 있었고 (계단 높은 방)
바람을 못 이겨 넘어진 나무는 / 바람의 미간에 환하게 맺힌 추억이 많다 / 비가 새는 지상에 그 숱한 버찌는 구르고 굴렀으니 // 나비를 좇아 어느 울음소리가 토담 골목으로 들어가듯 / 나무는 버찌를 찾아 쓰러진 것이다 (붕괴의 얼굴)
바람이 불어 시골 들판 나락이 춤을 춥니다. 바람이 불어 도시 한복판에도 한가을 더위를 식힙니다. 햇볕이 쬐며 시골 들판 나락이 무르익습니다. 햇볕이 쬐며 도시 한복판에서 자라는 나무도 한결 씩씩하게 가지를 뻗습니다. 소나기도 내리고 보슬비도 내립니다. 풀벌레가 날고 나비가 앉습니다. 아무리 도시가 커져도 사람들은 밥을 먹고 물을 마십니다. 아무리 시골이 줄어도 사람들은 시골에서 나고 자라는 밥을 고마이 먹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어버이가 씨앗으로 심어서 아이가 태어납니다. 사랑으로 심은 씨앗이라는 대목을 느끼면서 아이들이 태어나 활짝 웃음을 짓습니다. 아이들은 두 다리로 걸어서 웃고, 자동차를 타도 웃습니다. 아이들은 텔레비전을 보아도 웃고, 어버이가 함께 놀아도 웃습니다.
사랑이 흐르는 곳에 삶이 흐릅니다. 사랑이 흐르지 못하는 곳에는 삶도 살림도 이야기도 흐르지 못합니다. 사랑하기에 죽음은 떠올리지 못해요. 사랑하지 않기에 자꾸자꾸 죽음을 떠올리고 말아요. 2016.9.12.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삶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