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을 때까지 기다리는 책
책이 사람을 기다립니다. 책은 저를 읽어 줄 사람을 기다립니다. 책은 우리를 부르지 않아요. 책은 우리 손이나 발을 잡아끌지 않아요. 책은 늘 얌전히 우리를 지켜볼 뿐입니다. 우리가 손을 뻗어서 저희를 따스하게 어루만지면서 읽어 주기를 기다립니다. 우리가 발길을 멈추고 책을 손에 쥘 적에 책은 그예 온몸을 열어젖혀서 이녁한테 깃든 모든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그런데 책은 우리한테 제 이야기를 억지로 집어넣으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읽을 수 있는 만큼 우리 나름대로 책에서 이야기를 읽을 뿐이에요. 때로는 넉넉히 이야기를 읽을 테고, 때로는 아무 이야기도 못 읽을 수 있어요. 책이 나쁘거나 모자란 탓도 아니지만, 책을 손에 쥔 우리가 나쁘거나 모자란 탓도 아니에요. 어떤 이야기를 언제 어느 만큼 받아들인가 하는 대목은 늘 달라져요. 언제나 우리 삶과 살림과 사랑에 맞게 우리 나름대로 이야기를 받아들여요. 오늘 내가 살아가는 만큼 책 한 권에서 이야기를 길어올리고, 오늘 내가 살림하는 만큼 책 한 권에서 이야기를 끌어내며, 오늘 내가 사랑하는 만큼 책 한 권에서 이야기꽃을 피워요. 내가 읽을 때까지 언제까지나 고이 기다리던 책은, 우리 아이도 기다리고, 우리 아이가 앞으로 낳을 아이도 기다립니다. 기다리면서 고요히 잠을 자고, 아니 기다리는 동안 늘 새롭게 꿈을 키웁니다. 눈부시게 피어날 싱그러운 이야기꽃을 책들은 저마다 저희 가슴에 품으면서 꿈을 키워요. 2016.8.6.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