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을 위한 시간 - 유럽 수도원 기행 봄날의책 세계산문선
패트릭 리 퍼머 지음, 신해경 옮김 / 봄날의책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55



고요한 곳에서 눈·귀·마음을 연다

― 침묵을 위한 시간

 패트릭 리 퍼머 글

 신해경 옮김

 봄날의책 펴냄, 2014.10.20. 12000원



  축축한 날에 잠자리에 눕다 보면 때때로 방바닥 어느 곳에서 지네가 기어가는 소리를 듣습니다. 넓은 바깥이 있는데 굳이 사람 사는 집으로 들어올 까닭이 있나 하고 여기면서도 지네가 기어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수없이 많은 다리로 사라락사라락 꽤 빠르게 기는 소리를 가만히 듣습니다.


  동이 틀 무렵 온갖 소리가 집 안팎으로 퍼집니다. 밤새 노래하던 개구리는 수그러들고 바야흐로 온갖 새가 새로운 아침을 기쁘게 맞이하는 소리가 퍼집니다. 새가 들려주는 노랫가락은 꽤 많습니다. 새마다 다 다른 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나는 아직 소리만으로 어떤 새인지 낱낱이 가리지는 못합니다만, 머잖아 귀를 기울이기만 해도 어떤 새인지 알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나는 조용한 고독과 평화를 원했고, 여기 그 고독과 평화가 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쓰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한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바깥 숲에 비가 오기 시작했다. 우울한 기분과 뭐라 말할 수 없는 외로움이 갑자기 망치로 내려치듯 나를 덮쳤다. (26쪽)



  패트릭 리 퍼머 님이 쓴 《침묵을 위한 시간》(봄날의책,2014)을 조용히 읽어 봅니다. 이 책을 쓴 분은 ‘말을 하지 않고 아주 조용한 삶’을 보내고 싶어서 여러 수도원을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여러 수도원에 머물면서 수도원 규칙을 따르고, 몇 가지 일을 하면서, 여느 때에는 오로지 ‘이녁 마음 깊은 데’로 스스로 들어가서 생각에 잠기려고 했다는군요.


  나는 수도원에 가 본 일이 없기 때문에 수도원에 어떠한 기운이 흐를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어림해 볼 만하다고 느낍니다. 수도원은 시끌벅적하지 않을 듯합니다. 수도원은 도시 한복판하고는 사뭇 다르리라 느낍니다. 이곳에 깃들려는 사람들은 모두 차분하면서 얌전한 몸짓이 되리라 느낍니다. 서로서로 느긋하면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몸을 착하게 다스리려 하리라 느낍니다.



시간을 새로 배분하게 된 덕분에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시간이 하루에 19시간으로 늘어났다. 신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점점 일이 수월해졌다. 일을 하지 않을 때는 수도원 안팎을 탐험하거나 책을 읽었다. (38쪽)



  우리는 수도원 같은 곳뿐 아니라 여느 삶자리에서도 차분하면서 조용할 수 있을까요? 도시에서는 ‘차 없는 거리’를 따로 마련하기도 하는데, 자동차가 덜 다니거나 안 다닐 적에 비로소 ‘사람이 살 만한 흐름’이 감도는 셈은 아닐까요?


  자동차를 아예 안 타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둘레에는 자동차가 너무 많지 싶어요. 기계도 너무 많고, 건물도 너무 많습니다. 찻길도 너무 많지요. 가만히 보면 관광지나 여행지가 되는 곳도 너무 많습니다.


  《침묵을 위한 시간》을 쓰려고 수도원을 다닌 분은 ‘하루 가운데 19시간’을 이녁 마음대로 쓰니 ‘신이 된’ 느낌이라고 밝히는데, 하루 열아홉 시간이 아닌 하루 스물네 시간을 오롯이 ‘내가 나를 가꾸거나 살찌우거나 북돋우는’ 데에 쓸 수 있으면, 우리는 ‘하느님이 된’ 느낌에서도 한결 더 나아갈 만하지 않으랴 싶습니다.



여기저기에 창백한 나무숲이 나타났다가 문득 어두운 소나무 숲과 마주쳤다. 들에서 일하는 수사들은 하나같이 두건을 쓰고 나막신을 신은 채 사방 천지가 물에 젖은 이 들판에 고립된 점이 되어 밭을 갈거나 나무를 했다. 도끼를 휘두르는 걸 보고 몇 초가 지나야 도끼 소리가 귀에 닿았다. (83쪽)



  천천히 걷는 동안 귀가 새로 열린다고 느낍니다. 천천히 걷는 사이에 눈이 새로 뜨인다고 느낍니다. 천천히 일하거나 쉬는 내내 몸이 새로 깨어난다고 느낍니다.


  서둘러야 하지 않습니다. 빨리 가거나 얼른 마쳐야 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은 즐겁게 할 수 있으면 됩니다. 모든 살림은 즐겁게 가꿀 수 있으면 됩니다.


  고속도로를 내기에 더 빨리 간다기보다, 고속도로를 내기 때문에 자동차가 더 늘어나면서 찻길이 더 막히지 싶어요. 즐겁게 살고, 즐겁게 어우러지며, 즐겁게 일하거나 쉬거나 놀 수 있는 터전이 될 때에 비로소 모든 기운이 환하게 열리리라 봅니다.


  조용한 곳에서 몸을 곱게 다스립니다. 고요한 곳에서 눈·귀·마음을 기쁨으로 새롭게 엽니다. 나는 오늘도 호미 한 자루로 조용히 밭자락에서 김을 맬 생각입니다. 풀벌레하고 새하고 구름하고 여름볕하고 산들바람을 동무로 삼으면서 말이지요. 2016.6.18.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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