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쓰지 말자



  큰아이는 글씨를 스스로 익혀서 웬만한 소리는 다 옮겨적을 수 있다. 그런데 글씨가 나날이 춤을 추거나 날갯짓을 한다고 느꼈다. 그대로 두면 안 되겠네 싶어서 모눈 공책을 장만해서 모눈에 맞추어 아주 천천히 옮겨쓰기를 하도록 이끌어 본다. 큰아이가 한쪽 옮겨쓰기를 서두르려고 하기에 “그만. 멈춰.” 하고 말한다. 이윽고 몇 마디 붙인다. “벼리야, 빨리 쓰려면 안 써도 돼. 이 모눈에 맞추어 글씨를 쓰라고 한 까닭은 빨리 쓰라고 하는 뜻이 아니야. 글씨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정갈하게 쓰라는 뜻으로 여기에 글씨를 쓰라고 하지. 쓰다가 힘들면 그만 써도 되지만, 빨리 쓸 생각이면 하나도 안 써도 돼. 다 채워야 하지 않아. 글씨를 하나만 써도 이 모눈에 예쁘게 들어가도록 마음을 기울여서 써야지.” 아이는 내 말을 잘 알아들었을까? 이 말을 들은 뒤부터 무척 천천히 쓴다. 또박또박 쓴다. 글씨를 쓸 때뿐 아니라, 밥을 지을 적에도 서두를 수 없다. 길을 나설 적에도 서두를 수 없다. 어떤 일을 하든 서두를 수 없다. 삶도 죽음도 빨리빨리 오라고, 싸게싸게 오라고 끌어당길 수 없다. 가장 즐거우면서 아름답고 환한 숨결이 되도록 온마음을 쏟으면서 차근차근 한 걸음씩 내딛을 뿐이다. 2016.6.15.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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