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른 노릇 아이 노릇 - 세계적 그림책 작가 고미 타로의 교육 이야기
고미 타로 글.그림, 김혜정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사랑하는 배움책 39
학교에 가지 않으면 ‘반사회적 행동’일까?
― 어른 노릇 아이 노릇
고미 타로 글·그림
김혜정 옮김
미래인 펴냄, 2016.3.15. 11000원
열흘 남짓 평상 짜기를 한 끝에 드디어 모든 마무리를 짓습니다. 제법 큰 낡은 평상 하나를 고쳤고, 섬돌에 얹는 평상을 새로 하나 짰습니다. 다른 일은 안 하고 평상 짜기만 했으면 하루나 이틀 사이에 뚝딱하고 끝낼 수 있었으리라 생각해요. 그렇지만 평상도 짜고 살림도 하고 밥도 짓고 빨래도 하고 아이들을 놀리거나 가르치고 이모저모 다른 일을 모두 하면서 평상을 짜느라 틈틈이 일손을 놀렸습니다.
봄맞이 집 안팎 청소도 마무리지으면서 처마 밑에 놓을 수납장을 손질하는데, 마지막 망치질을 하다가 그만 손가락을 매우 세게 찧었습니다. 곁에서 아버지 일을 지켜보던 아이들이 묻습니다. “아버지 아파?” “응, 매우 아파.” 지잉 울리면서 얼얼한 손가락을 호호 달래면서 망치질을 끝냅니다. 일을 거의 다 마칠 즈음 손가락을 찧으니 더 아픕니다.
마당과 뒤꼍에서 신나게 뛰논 두 아이가 낮잠을 잘 수 있도록 이부자리를 깔고 눕힐 적에 큰아이가 새삼스레 묻습니다. “아버지, 아까 어느 손가락 찧었어?” “응, 첫째 손가락.” “그러면 엄지손가락?” “응.” “아직도 아파?” “아니. 이제는 괜찮아.” “그렇구나. 그런데 왜 손가락을 망치로 찧었어?” “그러게. 망치질을 할 적에는 못만 바라보아야 하는데 살짝 딴생각을 했나 봐.” “무슨 딴생각?” “글쎄, 이제는 다 괜찮은데, 나도 모르게 다른 곳을 보거나 마음을 빼앗기면 그렇게 망치를 잘못 놀릴 수 있어.”
선정도서라든가 지정도서라든가 과제도서 같은 신물 나는 용어가 아이들을 둘러싼 독서 문화에 많이 등장합니다. 아이들을 위한 좋은 책, 혹은 해가 되지 않는 책이라는 의미지만, 그건 참으로 쓸데없는 참견입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책을 만날까 하는 두근거림이야말로 책이 가진 생명입니다. (16쪽)
아이들은 모두 농담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농담, 놀이, 장난의 세계라고 할까요. 눈이 즐겁고, 입이 즐겁고, 목이 즐겁고, 귀가 즐겁고, 손이 즐거운 세계입니다. (19쪽)
며칠 앞서 아이들을 이끌고 마을 어귀에 있는 빨래터를 치웠습니다. 두 아이는 아버지가 물이끼를 걷어내는 둘레에서 물놀이를 합니다. 먼저 샘터를 치워 놓으면, 두 아이는 샘터를 둘러싸면서 놀고, 널따란 빨래터를 막대솔로 벅벅 문지르면서 다 치우면 바야흐로 빨래터에 뛰어들어서 옷까지 물에 옴팡 적시면서 놉니다.
물이끼를 다 걷고 등허리를 토닥이며 기지개를 켠 뒤 《어른 노릇 아이 노릇》(미래인,2016)이라는 배움책을 읽었습니다. 말끔해진 빨래터를 바라보면서 읽는 책은 맛깔납니다.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읽는 책은 한결 재미납니다.
그림책 작가인 고미 타로 님은 이녁 삶자락을 돌아보면서 ‘배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몸은 어른이되 어른스럽지 못한 어른을 다루고, 몸은 아이인데 아이로 살기 어려운 사회를 다룹니다. 새삼스러우면서 새로운 이야기입니다.
아직도 초등학생들의 가방은 거의 란도셀입니다. 직장인들은 양복입니다. 더 어울리는 신발이나 옷이 널려 있는데, 그야말로 넘치도록 풍족한 사회인데도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 나은 것을 도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48쪽)
숙제를 하지 않은 아이에게 선생님이 화를 내는 것은 ‘내가 시킨 일을 왜 하지 않았느냐’라는 의미입니다. (62쪽)
고미 타로 님네 작은딸은 중학교를 얼마쯤 다니다가 그만둔 뒤로 학교를 다시는 더 다니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작은딸은 스스로 하고픈 일을 즐겁게 찾아서 멋지고 신나게 살림을 잘 꾸린다고 합니다.
고미 타로 님은 이녁 작은딸이 ‘아버지, 나 학교 그만 다닐래요.’ 하고 말할 적에 스스럼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퇴를 하도록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도 ‘말릴’ 뜻이 없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이가 스스로 초등학교 여섯 해를 다니고 나서 중학교를 다니다가 ‘학교는 더 다닐 만하지 않다’고 느꼈으니, 이 아이 마음을 헤아려야겠다고 여겼다고 합니다.
다만 고미 타로 님네 큰딸은 그냥 학교를 다 마쳤다고 해요. 큰딸은 아무렇지 않게 학교를 다 마친 뒤 큰딸대로 살림을 잘 꾸리면서 산다고 해요. 학교를 다 마치든 학교를 안 마치든 대수로운 일이 없다고 합니다. 이리하여 《어른 노릇 아이 노릇》이라는 책에는 학교 안팎을 둘러싼 여러 가지 이야기가 홀가분하게 흐릅니다. 학교라는 틀이 어떠한가를 다루고, 학교를 바라보는 어버이와 교사 마음이 어떠한가를 다루며, 학교를 왜 굴레나 짐처럼 여기는 사회 얼거리가 그대로 있는가를 다룹니다.
이 세상에서 ‘이지메’를 없애고 싶다면, 우선 현재의 학교 시스템을 없애야 합니다. 학교에 이지메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학교라는 구조 자체가 이지메라는 뜻입니다. (69쪽)
학교에 가지 않는 건 반사회적인 행위이고, 사회로부터 소외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기죽지 않는 아이, 게으름 피우지 않는 아이, 부지런한 아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아이로 키우기 위해 아이들을 관리합니다. 아제 그들은 보호자가 아니라 관리자, 관청입니다. (82쪽)
우리 집 두 아이도 학교를 안 갑니다. 큰아이는 큰아이대로 스스로 하고픈 것을 스스로 하면서 스스로 배웁니다. 작은아이는 작은아이대로 스스로 하려는 것을 스스로 하면서 스스로 배워요. 나는 두 아이를 늘 건사하고 돌보고 토닥이면서 ‘가르치는’ 자리에 있지만, 아이하고 함께 지내는 살림은 언제나 ‘아이한테서도 새롭게 배우는’ 셈이라고 느낍니다.
이를테면, 평상을 고치거나 새로 짤 적에 두 아이는 내 곁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들여다봅니다. 가끔 일손을 거든다고 할 적에는 잘 거들지 못하지만, 아이들은 저희 나름대로 해 볼 수 있는 데까지 해 보다가 그만둡니다. 이러고는 내 곁에서 신나게 이리 달리고 저리 뛰면서 놀아요. 다 짜고 손질해서 옻까지 바른 평상에 기쁘게 올라앉아서 소꿉놀이를 마음껏 즐깁니다. 그림책을 갖고 나와서 평상에 앉아서 읽어요. 종이를 들고 나와서 평상에 엎드려서 그려요.
평상에 앉아서 해바라기도 하지요. 평상에 앉아서 나무도 바라보지요. 구름을 살피고, 낮에 뜬 달을 올려다봅니다. 저녁에도 평상에 앉아서 별바라기를 합니다. 한낱 평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 평상을 발판으로 삼아서 아이들 나름대로 새로운 놀이를 찾고 재미난 이야기를 누립니다. 그리고 아버지한테 슬며시 묻지요. 왜 옻을 발라야 하느냐고 묻고, 옻은 뭐냐 하고 묻고, 옻붓이랑 그림붓은 뭐가 다르냐고 묻고, 망치로 찧은 손가락은 어떠냐고 물으며, 망치하고 못은 어떻게 쓰고 만드느냐고 물으며, 톱으로는 왜 나무를 켤 수 있느냐고 물으며, 톱을 손수 잡고 켜 보기도 하고 …… ‘가르침’이나 ‘배움’으로 치면 수많은 이야기와 손길이 오가면서 어우러집니다.
석고 데생만 죽어라 하다가 그리고 싶은 것이 떠오르지 않는 체질이 되기도 합니다. 참 딱한 노릇입니다. 그러다 결국 석고 데생을 가르치는 강사가 되기도 하죠. 그쪽으로는 아직 전통적인 수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103쪽)
창조성과 개성과 감성이 부족한 곳일수록 아이들의 창조성과 개성과 감성을 중요시하는 교육을 한다는 홍보 문구를 붙여놓습니다. (146쪽)
학교에서 교사가 교사 자리에 설 수 있다면, 교사 스스로 늘 ‘새롭게 가르칠 삶 이야기’를 즐겁게 배우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집에서 어버이가 어버이 자리에 있을 수 있다면, 어버이 스스로 늘 ‘새롭게 나눌 살림 이야기’를 기쁘게 배우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아이들은 언제 어디에서나 무엇이든 배웁니다. 좋고 나쁜 것을 떠나서 모두 새롭게 바라보면서 배웁니다. 어른인 우리는 어버이도 되고 교사도 되고, 때로는 그냥 아저씨나 아줌마가 되어 아이들을 둘러싸고 무엇이든 보여줍니다. 재미나거나 새로운 모습도 보여줄 테고, 바보스럽거나 우악스러운 모습도 보여줄 테지요.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대로 ‘어른들이 보여주는 모든 모습’을 찬찬히 지켜보면서 삶과 살림을 배웁니다. ‘몇 살 나이’에는 ‘어느 학교를 몇 해 다녀’야 배우지 않아요. 늘 언제 어디에서나 배워요. 초등학교 졸업장이나 중학교 졸업장이나 고등학교 졸업장을 거머쥐어야 ‘배웠다’고 하지 않습니다. 졸업장은 졸업장일 뿐이지 ‘배움 증명’이 되지 않아요. 배움은 언제나 삶과 살림으로 시나브로 드러나요.
아이들은 어른을 그냥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예전에 그랬으니까요. 어른들의 훌륭함을 보는 것도, 비판하려고 엄격하게 보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거기 있으니까 볼 뿐입니다. (200쪽)
열 살까지 세상을 제대로 확실히 보는 눈을 기르지 않고 흘려보내면, 왠지 그 후 인생이 시들시들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 피아제나 슈타이너를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은 많지만, 가장 중요한 아이들을 제대로 보지 않기 때문에 발전이 없습니다. 피아제와 슈타이너 속의 아이들만 보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이상한 상태가 되는 겁니다. 동물도감만 들여다보는 동물학자 같습니다. (210쪽)
《어른 노릇 아이 노릇》은 차분한 목소리로 삶 이야기하고 살림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이들은 삶과 살림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어른들은 삶과 살림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주어진 틀에서 주어진 교과서 지식을 머릿속에 더 빠르게 많이 넣는 입시교육이 아니라, 아이들이 무엇이든 스스로 꿈꾸고 생각하면서 즐겁고 사랑스레 할 수 있도록 삶과 살림을 가르치는 어른으로 거듭나야 하지 않겠느냐고 이야기합니다.
옷 한 벌이 어떻게 나오는가를 아이들한테 보여줍니다. 밥 한 그릇이 어떻게 나오는가를 아이들한테 보여줍니다. 집을 어떻게 짓거나 고치는가를 아이들한테 보여줍니다. 말 한 마디가 어떻게 태어나는가를 아이들한테 보여줍니다. 씨앗 한 톨, 책 한 권, 종이 한 장, 젓가락 한 벌, 능금 한 알, 장난감 하나, 연필 한 자루 …… 우리가 흔히 곁에 두는 모든 것이 태어난 흐름을 아이들이 가만히 살펴보면서 생각을 기울일 수 있도록 합니다.
나 스스로 아기로 태어나서 아이로 자란 끝에 어른이라는 몸으로 거듭난 내 발자국을 되짚으면서 내 앞에 있는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내 곁에 새로운 아이로 찾아온 이 어여쁜 숨결이 눈망울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바라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오늘은 무엇을 하면 재미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저녁에 함께 잠들고 아침에 함께 일어나면서 어떤 하루를 지으면 즐거울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어른 노릇하고 아이 노릇이 어우러지면 ‘사람 노릇’이 될 테고, 사람다운 길을 걸으면 저절로 사랑스러운 손길이 태어나리라 느껴요. 온누리 모든 어른하고 아이가 사이좋게 어깨동무할 수 있기를 바라며, 나는 내 보금자리에서 사이좋은 살림을 짓자고 꿈꿉니다. 2016.3.21.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