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성이라는 거짓말 - 진정한 나를 찾다가 길을 잃고 헤매는 이유
앤드류 포터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1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읽기 삶읽기 237



“어느 때보다 살기 좋은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앤드류 포터 글

 노시내 옮김

 마티 펴냄, 2016.2.15. 16000원



  올해로 우리 집은 여섯 해째 시골에서 지냅니다. 시골에서 살아 본 적이 있어서 시골살이를 하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고, 어른인 나도 내 살림살이를 느긋하게 다루고 만지면서 먹을거리를 흙을 가꾸어서 손수 얻고 싶은 꿈으로 시골살이를 합니다. 목돈은커녕 푼돈도 없이 시골살이를 했기 때문에 우리 땅은 백 평이 조금 넘을 뿐입니다.


  ‘시골에 살아야 훌륭한 사람이다’ 같은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도시에서는 아이들이 하루 내내 마음껏 뛰놀 수 없는 터전이었고, 도시에서는 아이들이 노래를 마음껏 부를 수 없는 터전이었으며, 피리이든 실로폰이든 피아노이든 하모니카이든 악기도 마음껏 다룰 수 없는 터전이었어요. 참말로 아이들이 마음껏 무엇이든 누릴 수 있기를 바라며 시골에서 살림을 짓습니다.


  이렇게 아이들을 헤아려서 시골에서 사는 동안 아이뿐 아니라 어른도 ‘일과 놀이와 살림’을 더 마음껏 가꾸면서 무엇이든 두 손으로 새로 짓는 보람이나 기쁨을 그야말로 새로 배웁니다. 흔히 말하는 ‘진정한 자아 찾기’를 뜻하지 않았습니다만, 새봄에 도시에서 ‘돈을 치러서 사다가 먹는 쑥떡’이랑 시골에서 ‘손수 쑥을 뜯어서 반죽을 하고 손수 구워서 먹는 쑥떡’은 맛부터 느낌이 사뭇 달라요. 내 땅에서 돋은 숨결을 내 손으로 다스리면서 누리는 살림은 ‘진정성’을 떠나서 ‘기쁨’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일깨우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미국인들의 마음속에는 “광고업자나 정치인이 진짜라고 우기는 허상에서 벗어나 삶의 진실을 되찾고 싶은 욕구”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12쪽)


그렇다면 도중에 뭐가 잘못된 걸까? 어쩌다 우리는 우호적인 자연상태를 떠나, 피 튀기는 경쟁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근대의 삶에 도달한 것일까? (71쪽)



  앤드류 포터 님이 쓴 《진정성이라는 거짓말》(마티,2016)이라는 인문책을 읽습니다.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이라는 인문책은 글쓴이 앤드류 포터 님이 캐나다와 미국과 서유럽에서 나온 여러 책과 신문과 논문에서 다룬 ‘진정한 학문 추구’나 ‘진정한 진보’나 ‘진정한 사회운동’이나 ‘진정한 혁명’이 얼마나 ‘진정성’이 있는가를 따집니다. 그리고 ‘진정한 유기농’이나 ‘진정한 정치’라고 하는 이름이 얼마나 ‘진정성’이 있는가 하는 대목을 살피려고 합니다. 그래서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을 읽다 보면, 글쓴이 앤드류 포터 님이 다른 분 글이나 책에서 따온 글이 무척 많고, 이 글이나 책을 ‘비판하는 대목’이 무척 많습니다.



그런 불평은 초점을 벗어난다. 작품 자체는 전혀 문제가 아니다. 팔리는 것은 작품이 아니라 작가의 페르소나 또는 ‘브랜드’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미술가 중에 데미언 허스트만 한 브랜드는 찾아보기 어렵다. (117쪽)


표절은 사례에 따라 ‘글 도둑질’ 그 이상일 수도 있고 그 이하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은폐나 기만을 목적으로 하는 지적 불성실의 한 형태로 봐야 한다. 표절을 저지른 자가 과시하려 드는 명민한 지성이나 예술적 능력은 본인 내면의 능력과 감성을 반영하지 않기 때문이다. (167쪽)



  한국말사전에 ‘진정성’이라는 낱말은 없습니다. ‘진정(眞正)’이라는 낱말은 한국말사전에 있습니다. ‘진정’은 “거짓이 없이 참으로”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짓이 없이”는 ‘참으로’를 뜻하지요. “거짓이 없이 참으로”라는 풀이말은 같은 말을 잇달아 적은 셈입니다. 아무튼, ‘진정성’이라면 ‘眞正 + 性’일 테고, “참다운 결”이나 “참것”쯤을 가리킨다고 할 만해요. 한국말사전 말풀이에서 엿볼 수 있듯이, 사회나 정치나 문화나 교육이나 종교 여러 갈래에서 사람들이 ‘진정성’을 말한다고 할 적에는 “거짓이 없다”고 하는 마음을 나타내려고 한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면 정치 지도자로 나서겠다고 하는 분들은 왜 그분들이 “거짓이 없다(진정하다)”고 외칠까요? 참말로 거짓이 없으니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하고 말할까요? 사회나 경제나 정치나 문화가 워낙 장삿속(자본주의)으로 흐르다 보니, “나는 장삿속이 아니에요” 하고 밝혀야 하기에 “난 참말이에요(난 진정해요)” 하고 외쳐야 할까요?



우리는 이미 읽기/쓰기 문화로 갈아탔고, 새 문화는 완전히 다른 가치와 규범에 따라 움직인다. (180쪽)


3조 달러가 넘는 예산을 좌우할 사람을 뽑는 선거가 버락 오바마의 ‘변화’ 또는 존 매케인의 ‘명예’라는 두 가지 상표 중 하나를 고르는 상황으로 귀결되는 것은 경이롭다. 하지만 더 놀라운 점은 이 시스템이 잘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정부 예산이나 정책 문서, 법률안 등을 제대로 이해할 시간도 없고, 솔직히 그럴 능력도 없다. (214쪽)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이라는 책은 ‘진정성’을 내세우는 개인이나 단체나 기업이나 정부나 학자 모두 ‘속으로 진정하지 않은 그림자나 뒷모습’이 있다고 비판합니다. ‘속으로 거짓이 없는 모습’이라면 구태여 ‘진정성 명함’을 마구 들이대거나 광고할 까닭이 없다고 비판합니다.


  그러고 보면 미국 대통령 선거가 아닌 한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어마어마한 나랏돈을 주무를 대표’를 뽑는 일이 ‘정당 구호’와 ‘정당 기호 숫자’를 누가 더 잘 홍보하느냐 하는 ‘프레임 싸움’으로 판가름나기 마련이로구나 싶습니다. 214쪽에서 말하듯이 “대다수 사람들은 정부 예산이나 정책 문서, 법률안 등을 제대로 이해할 시간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다”는 말이 참으로 맞구나 싶어요.


  그런데,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이라는 책을 읽다 보니, 곳곳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릴 만한 대목이 자꾸 나옵니다. 아무래도 자본주의 경제 얼거리에서 홍보와 광고로 돈이나 이익을 얻어야 하는 몸짓이 되다 보니까, “진정성 효과”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고 할 텐데, 너무 한쪽으로만 몰면서 책 줄거리를 이으려 하지는 않느냐 싶기도 합니다.



“흙바닥에서 먹고 자고 일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수십억이다. 원해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극빈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아마도 나무 바닥이나 대리석 바닥에서 생활하기를 선호할 것이다. 그런데 미국 일부 지역에서는 흙바닥 생활이 극빈은커녕 흠잡을 데 없는 진정성의 표시로 여겨진다(138쪽).”



  미국이나 서양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한국에서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짓는 집은 으레 ‘흙바닥’인 집입니다. 흙바닥에 장판이나 종이 한 겹을 깔고서 지내지요. 절집도 이와 같고요. 한국이나 일본이나 중국이나 아시아 나라에서 ‘흙바닥집’이나 ‘흙벽집’이나 ‘흙집’을, 또는 ‘나무집’을 짓고 사는 까닭은 ‘극빈’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흙이나 나무 같은 ‘자연 소재’로 지은 집에서 몸이 한결 말끔하면서 싱그러이 쉬면서 깨어날 수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유럽에서는 시멘트 문명에는 새 앞날이 없다고 여겨서 나무집으로 9층이나 10층짜리 아파트를 더욱 튼튼히 짓는데 값도 훨씬 적게 드는 건축법이 나오기도 합니다. ‘흙집 살기’는 ‘참말’로 ‘진정성 표시’이기만 할까요?



“특히 유기농이 영양 면에서 훨씬 우수하다는 주장은 논란이 많다. 공중질소로 제조한 질소비료 사용을 금하는 유기농법의 지속가능성 또한 의문이다 … 그런 문제로 궁지에 몰리면 유가농법 옹호자들은 미각에 호소한다(150쪽).”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을 쓴 분은 ‘유기농 비판’을 꽤 자주 합니다. 시골에서 흙을 지으며 사는 분이라면 도시 매장에 흔하게 있는 ‘유기농 상표’가 그리 미덥지 못한 줄 알리라 생각합니다. 이 책을 쓴 분도 이렇게 비판할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진정성 있는’ 유기농이라면 대량생산을 하기가 어려울 테니까요. 그러면, 유기농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일까요? 화학농으로 비료와 농약을 엄청나게 흙에 쏟아붓기만 해야 한다는 뜻일까요?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이라는 책을 읽는 동안 이 책에 흐르는 줄거리는 ‘진정성 비판’에만 맞추어졌구나 하고 느낍니다. 이러면서 이 책을 쓰신 분은 ‘새로운 길(대안)’을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비판은 있되 대안은 없는데, 꼭 글쓴이가 대안까지 내놓아야 하지는 않습니다만,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가서 지내는 사람들은 “유기농 신봉자”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대목은 하나도 못 짚으니 좀 아쉽습니다. 시골에서 살며 농약이나 비료를 안 쓰고 흙을 살리면서 먹을거리를 얻어서 아이들을 돌볼 적에는 ‘아이들 몸에 생기는 아토피’도 한결 슬기롭게 다스리고, 무엇보다도 손수 심고 돌보고 가꾸고 지어서 먹는 밥이 삶에 기쁨을 베풀기도 해요.



“로컬푸드의 친환경성은 사실 과장된 부분이 있다. 선박이나 열차로 식품을 운송하는 것은 매우 효율적이고, 농산물의 경작, 포장, 조리에 드는 비용을 전체적으로 고려하면, 운송에 소비되는 에너지는 총 에너지 소비량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비중을 차지한다(152∼153쪽).”



  비판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판할 대목은 얼마든지 비판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배나 기차나 비행기 ‘운송비용’은 어디까지 따져 보았는지 한번 여쭙고 싶어요. 배나 기차나 비행기를 ‘만드는 돈’에다가 ‘운송 인건비(배나 기차나 비행기를 몰고 관리하고 정비하는 모든 사람들 인건비)’도 따져 볼 노릇이겠지요. 아니, 이런 돈을 ‘숫자’로 따져서 ‘진정성 겨루기’를 굳이 해야 하지는 않다고 느껴요. 마을에서 살면서 마을에서 거둔 곡식하고 열매를 마을에서 먹자고 하는 ‘마을살림(로컬푸드)’ 이야기는 거대도시 문명이 아닌 ‘마을두레(마을공동체)’를 살리자는 작은 몸짓이라고 느껴요.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이라는 책은 마을살림을 얼마든지 비판할 수도 있을 테지만, 마을살림을 비판하면서 ‘마을살림이 새로 어떻게 나아가야 아름다울까’ 하는 대목은 딱히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실질적으로 이제 부탄은 다른 유명한 아시아 여행지에서 수염 나고 땀내 나는 배낭여행자들과 뒤섞이고 싶지 않은 돈 많은 ‘진정한 사냥꾼’들을 위한 거대한 불교-친환경 고급 리조트로 변질됐다 … 히말라야 기슭에서 농민들이 뼈 빠지게 벼농사를 하는 농경시대 불교 왕국 부탄의 매력적인 모습이나, 1946년 모습 그대로 정지한 아바나를 보는 일이 강단좌파나 진정성 추종자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 줄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부탄이나 쿠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267, 268쪽).”



  부탄이나 쿠바를 ‘진정성 비판’으로 다루는 대목을 읽다가, 이 책을 쓴 분한테 “있는 그대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268쪽)”는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탄이나 쿠바가 “농경시대 불교 왕국”이나 “1946년 모습 그대로 정지한” 삶이기만 할까요?


  현대문명에도 장단점이 있듯이 부탄이나 쿠바에도 장단점이 있어요. 현대문명에서도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고치면 되지요. 부탄이나 쿠바에서도 장점을 살리고 단점은 고치면 되지요. ‘진정성 비판’이라는 이름에 너무 얽매인 나머지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이라는 책은 어느 모로 본다면 좀 ‘마구잡이 비판’처럼 ‘비판만 하다가 그치고’ 마는 얼거리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아무리 근대의 삶이 암울해도 인간개발의 측면에서 삶의 질이 그 어느 때보다 크게 개선된 사실까지 부인할 수는 없다. 수명과 건강이 향상되고, 공기나 물도 청결해졌고, 상하수도, 난방, 전기, 의료, 텔레비전, 인터넷 등의 서비스도 거의 보편화된 상태다. 오락거리, 음악, 영화, 방송, 뉴스, 기타 정보의 다양성이 풍부해졌고, 시장은 상상 가능한 온갖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한다. 즉 선진 자유민주국가의 시민들은 전반적으로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삶을 즐길 수 있게 됐다. 그런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309쪽)?”



  책을 마무리짓는 대목에서 글쓴이 앤드류 포터 님은 “공기나 물도 청결해졌고(309쪽)” 하고 적습니다. 이 대목에서 그야말로 아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참말 오늘날 우리 지구별은 ‘공기가 깨끗’해졌을까요? 토론토나 뉴욕이나 서울이나 도쿄나 런던 같은 곳은 ‘참말로(진정성 있게) 공기가 깨끗’해졌을까요? 토론토나 뉴욕이나 서울이나 도쿄나 런던 같은 곳은 ‘참으로(진정성 있게) 물이 깨끗’해졌을까요? 큰도시를 가로지르는 냇물에서 두 손으로 물을 떠서 마셔도 될 만큼 ‘물이 깨끗’해졌을까요?


  책 끝자락에 나온 이런 이야기를 읽다 보니,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을 쓴 학자는 “상하수도, 난방, 전기, 의료, 텔레비전, 인터넷 등의 서비스도 거의 보편화된 상태다. 오락거리, 음악, 영화, 방송, 뉴스, 기타 정보의 다양성(309쪽)”이 있어야 ‘진정성 있는 사회와 살림’이라고 여기는구나 싶습니다. 그런데 적잖은 사람들은 집에 텔레비전을 두지 않고, 신문이나 방송을 보지 않으며, 구태여 ‘정보 다양성’을 누리려 하지 않습니다. 어마어마한 정보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려 하지 않는 사람이 제법 많습니다. 오락거리(놀이시설)나 대중음악이나 극장(영화)이 있어야만 ‘문화를 누리는 일’이 될는지도 좀 아리송합니다. 문화를 너무 좁게 보는 눈길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이라는 인문책은 우리 사회나 정치나 교육이나 종교나 문화나 예술이나 문학 같은 자리에서 ‘진정성 화두’나 ‘진정성 명함’을 내세워서 ‘이름 팔기·돈벌이·권력 얻기’를 하려는 개인이나 집단이나 정부나 기업을 찬찬히 비판합니다. 이러한 비판은 여러모로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진정성 비판’에 살짝 지나치게 얽매인 나머지 너무 비판만 하다가는 ‘진정성 비판하게 진정하게 갇힌 비판몰이’로 그칠 수 있겠다고도 느낍니다.


  우리가 무엇을 비판한다고 할 적에는 ‘비판받는 사람이나 것이나 제도’가 깡그리 없어져야 한다는 뜻이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참말 없어져야 할 것도 있겠지요. 그러나 사람들이 저마다 새로운 기쁨을 찾아서 크고작게 가꾸는 살림살이를 마냥 비판으로만 바라보려 한다면, ‘삶을 짓는 재미’나 ‘살림을 가꾸는 즐거움’하고는 그만 멀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글쓴이 앤드류 포터 님은 책을 마무리짓는 자리에서 “어느 때보다 살기 좋은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하고 우리한테 묻습니다. 그래요. “선진 자유민주국가의 시민들은 전반적으로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삶을 즐길 수 있게 됐다(309쪽)”고 하니까 아무것도 문제가 아닐 수 있고, 이 책에서 밝히듯이 ‘진정성 비판’으로 책 한 권을 엮을 수도 있습니다. 도시가 참으로 살기 좋은데 뭐가 문제라서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가느냐 하고 비판을 할 수 있어요.


  저희처럼 시골살이를 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쓰신 학자한테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한 마디는 할 수 있습니다. 새봄에 밭에서 쑥을 뜯어서 쑥국을 끓이고 쑥떡을 찌고 쑥부침개를 하고 쑥밥을 지으면 참으로 재미있어요. 아이들하고 함께 쑥을 뜯으면서 일하거나 놀고, 아이들하고 함께 갓을 솎으면서 갓김치를 담그면 참으로 신나요. 저희는 집에 텔레비전을 안 두고 조용히 시골살이를 하면서 “아무 문제가 없”답니다. 2016.3.8.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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