ㅂ 책넋 돌보기
43. 어버이한테 책을 읽어 주기
어버이는 아이를 낳아 돌보는 동안 말이랑 글을 가르치려고 그림책을 읽어 주곤 합니다. 아이가 자라서 그림책보다 긴 이야기를 바라면 동화책을 읽어 주곤 합니다.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면 아이는 어느새 어버이한테 책을 읽어 주기도 합니다. 이제 글을 마음껏 읽을 수 있기에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그야말로 지치지 않으면서 책을 신나게 읽어 주기도 합니다.
어버이 무릎에 앉아서 어버이한테 책을 읽어 주는 아이는 마음으로 무언가를 알는지 모릅니다. 아이가 어릴 적에 어버이가 얼마나 오랫동안 날마다 그림책이나 동화책을 읽으면서 따스한 숨결을 나누어 주었는가 하는 대목을 마음으로 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아이가 어버이한테 책을 읽어 준다면, 어릴 적부터 이야기밥을 받아먹고 자란 기쁨을 새롭게 가꾸면서 어버이한테 새로 이야기밥을 베푸는 셈이 되리라 느껴요.
배리 존스버그 님이 빚은 어린이문학 《내 인생의 알파벳》(분홍고래,2015)이 있습니다. 이 책은 어버이하고 아이가 어떤 사이로 지낼 때에 참다운 사랑과 삶과 살림이 되는가 하는 대목을 짚습니다. 세 가지 이야기인데, 첫째는 아이는 사랑을 물려받을 수 있어야 사랑스럽게 산다는 이야기예요. 둘째는, 아이는 어버이가 손수 짓는 삶을 지켜볼 수 있어야 삶을 기쁘게 배운다는 이야기예요. 셋째는, 아이는 어버이가 아이랑 어깨동무하면서 살림을 가꾸려는 숨결을 느껴야 비로소 아름다운 넋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펌프킨 너는 너만의 노래를 부르고 너만의 춤을 춘다는 거야. 너는 우리와 다르게 세상을 바라봐. 그거 알아? 삼촌은 가끔 우리 모두가 너처럼 세상을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해(44쪽).” 같은 대목을 가만히 헤아립니다. 아이는 아이일 뿐 어버이가 아닙니다. 어버이가 낳은 아이한테는 어버이 피가 흐르지만, 아이는 어버이가 시키는 대로 똑같이 할 수 없어요. 어버이는 어버이대로 삶을 누린다면, 아이는 아이대로 새로운 삶을 꿈으로 지어서 누립니다.
그러니까, 아이는 아이답게 ‘아이 노래’를 기쁘게 불러요. 어버이도 어버이답게 ‘어버이 노래’를 기쁘게 부를 노릇이에요. 이러면서 아이하고 어버이는 한집에서 함께 살림을 가꾸는 사람으로서 사이좋게 손을 맞잡는 기쁨을 새롭게 노래로 부를 노릇입니다.
아이는 어버이 눈치가 아닌 어버이 사랑을 볼 수 있어야 기쁘게 자랍니다. 어버이 눈치 때문에 쭈뼛거리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어버이 사랑을 받으며 넉넉하고 느긋하면서 즐거울 수 있어야 곱게 자라요. 어버이는 아이한테 꾸지람이나 눈치나 핀잔을 줄 노릇이 아니라, 어버이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가장 너르면서 따사로운 사랑을 줄 수 있어야지 싶어요. 어버이로서 아이를 낳은 까닭은 ‘아이가 어버이 말을 고분고분 잘 따르기를 바라는 뜻’이 아니라 ‘아이가 아이답게 새롭게 꿈을 지어서 새롭게 사랑을 나누는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테니까요.
《내 인생의 알파벳》이라는 책을 읽으면 “오래전 우리 가족이 화목했던 때가 어렴풋이 생각났다. 우리는 ‘버스 바퀴가 빙글빙글 돌아요’라는 동요를 목청껏 부르곤 했다 … 그 시절의 아빠는 다른 운전자들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았다(147쪽).” 같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내 모습을 돌아봅니다. 나는 두 아이를 돌보고 가르치는 어버이로서 이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다른 사람 눈치를 볼 일이 없습니다. 아이한테 이야기를 들려준다든지 아이한테 춤사위를 보여준다든지 아이한테 노래를 가르칠 적에 오직 아이만 바라보면서 이 몸짓이 됩니다. 이야기책에 나오는 아버지가 아이를 기쁨과 사랑으로 바라보면서 함께 노래하고 놀 적에 오직 이녁 아이만 바라보면서 웃고 노래하듯이, 나도 우리 아이하고 어우러져 놀 적에는 오직 우리 아이들만 바라보면서 웃고 노래합니다.
다른 데를 보아야 하지 않아요. 어버이는 아이를 바라보면 됩니다. 아이도 다른 데를 쳐다보아야 하지 않아요. 아이를 따사롭게 바라보는 어버이를 느끼면서 어버이 낯빛하고 마음결을 고이 바라보면 즐거워요.
그런데 《내 인생의 알파벳》이라는 책을 읽으면, 이 책에 나오는 아이는 집에서 제대로 사랑받지 못해요. 이 아이뿐 아니라 학교에서 마주하는 여러 동무들도 집에서 제대로 사랑받지 못하기 일쑤예요. 그렇다고 처음부터 이런 삶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아이 아버지가 자동차를 몰며 신나게 노래하고 웃었다고 해요. 그런데 동생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갑작스레 죽고(유아돌연사), 아이 아버지는 큰아버지하고 어떤 다툼이 생겨서 그만 집안에서 웃음도 노래도 춤도 이야기도 모두 사라졌다고 합니다. 학교에서 마주하는 여러 동무들도 어버이들이 저마다 이런 아픔과 저런 생채기가 있어서 어른 스스로 아픔하고 생채기에 휘둘리느라 바쁘다고 합니다.
어른들은 어른으로서 이녁 몸 하나 건사하기에도 벅차서 그만 아이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셈이리라 봅니다. 아이들이 어버이를 물끄러미 지켜보면서 기다린다고 하는 대목을 미처 느끼지 못한다고 할 만해요. 아이들이 마음이 타면서 괴로워하다가 그만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겠다고 여길 때까지도 어른들은 좀처럼 아이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어요.
이야기책 《내 인생의 알파벳》에 나오는 아이는 집에서 사랑도 눈길도 못 받는 나머지 ‘살았어도 죽은 삶과 같다’고 여깁니다. 이 엉킨 실타래를 풀 길이 도무지 보이지 않아서 학교에서 어느 누구하고도 말을 한 마디도 안 섞는다고 해요. 때때로 종이에 글을 적어서 이 글을 보여주기만 할 뿐, 입술을 달싹일 생각도 거의 안 한다고 해요. 이러던 어느 날 도무지 견딜 수 없어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하기로 하지요. 아이가 생일잔치를 맞이한 날, 어머니하고 아버지랑 항구를 거닐다가 갑자기 바닷물로 뛰어들어요.
“아빠, 왜 계속 비행기만 쳐다봐야 해요?” 아빠가 한숨을 쉬었다. “너무 뻔한 거 아니냐, 캔디스. 비행기를 보지 않으면 조종을 못하게 되고 그러면 비행기는 박살날 거야.” “가족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내가 그 말을 하자 아빠가 나를 보았다. 비행기가 괴상하게 우는 소리를 냈다. (185쪽)
아이들은 누구나 삶을 배우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시험공부를 배우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누구나 제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배우고 싶습니다. 사랑이 없이 메마른 집이나 마을이나 학교를 쳐다보고 싶지 않습니다. 기쁜 일이 있으면 어깨동무를 하면서 함께 웃고픈 아이들입니다. 슬픈 일이 있으면 이때에도 어깨동무를 하면서 함께 울고 나서 마음을 달래고픈 아이들입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어깨동무를 하면서 하루를 새롭게 짓고 싶은 아이들입니다.
어버이 자리에 선 분들은 아이가 많이 자란 뒤에는 딱히 책을 소리내어 읽어 주지 않습니다. 아이가 혼자서 책을 얼마든지 잘 읽으니까요. 그러면, 때때로 아이를 불러서 ‘나를 도와주렴?’이라든지 ‘나한테 선물을 줄 수 있겠니?’ 하고 물으면서 책을 함께 읽자고 해 볼 수 있고, 아이가 날마다 조금씩 책을 읽어 달라 해 볼 수 있어요. 생각을 함께 나누고, 따스한 기운을 같이 나누며, 이야기 한 꾸러미를 서로서로 나누는 저녁을 보낼 만합니다.
무선조종 비행기가 박살이 나지 않게 하려면 무선조종을 하는 동안 비행기를 바라보아야 하듯이, 한 집안이 박살이 나지 않게 하려면 이 보금자리에서 서로서로 따스히 바라보면서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무선조종 비행기를 걱정하기에 무선조종 비행기를 지킬 수 있고, 아이와 어버이가 서로한테 마음을 쓰기에 서로 살가이 아끼면서 사랑을 따스히 지필 수 있습니다. 4349.1.17.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청소년과 함께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