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와 까마귀나무 빨간우체통 3
리타 얄로넨 글, 크리스티나 루이 그림, 전혜진 옮김 / 박물관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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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126



아이한테 아버지 자리는 어디일까?

― 소녀와 까마귀나무

 리타 얄로넨 글

 크리스티나 루이 그림

 전혜진 옮김

 박물관 펴냄, 2008.6.5. 8800원



  아이한테 아버지 자리는 어디일까 하고 스스로 물어봅니다. 나를 낳고 돌본 아버지를 헤아리면서 물어보고, 내가 낳아서 돌보는 아이를 헤아리면서 물어봅니다. 먼저 우리 아버지를 헤아린다면, 우리 아버지는 집 바깥에서 돈을 버는 일을 하시느라 바빠서 이녁 아이들하고 얼굴을 마주할 겨를조차 몹시 적었습니다. 새벽 일찍 집을 나서서 밤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나날이었으니까요. ‘아버지하고 논다’고 하는 일은 겪은 일이 하나도 없다고 떠오를 뿐 아니라 ‘아버지하고 말을 섞는다’고 하는 일조차 참으로 드물었습니다.


  다음으로 오늘 내가 우리 아이들하고 보내는 나날을 헤아립니다. 나는 집에서 일하고 아이들은 집에서 놉니다. 나는 집에서 집안일을 도맡고, 바깥일이 있으면 이 바깥일도 도맡습니다. 이러면서 아이를 보살피고 가르치는 몫도 도맡습니다. 솜씨 있거나 야무지기에 이렇게 온갖 일을 다 하지는 않아요. 함께 짓는 살림에서 아버지로서 맡는 몫이 좀 더 많다고 할 뿐입니다. 이를테면 이렇게 얘기할 만한데, 힘이 조금 더 센 사람이 짐을 더 많이 날라요. 두 어버이 가운데 힘이 조금 더 있는 쪽이 여러모로 집일이나 집살림을 더 많이 하는 셈입니다.


  아무튼, 나를 낳아 돌본 아버지를 헤아리면서, 내가 낳아 돌보는 아이를 헤아리니, 내가 걷는 길은 내가 우리 아버지한테서 거의 받지 못한 사랑을 우리 아이한테 새롭게 지어서 물려주려고 하는 길이라 할 만하구나 싶습니다. 어릴 적에 거의 받지 못한 ‘아버지 사랑’이기에 ‘아버지로서 선 나’로서도 우리 아이들한테 ‘아버지 사랑’을 물려주기 어렵다고 할 만하지요. 그렇지만, 먼 옛날부터 이어졌을는지 모를 ‘사내가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지 못하거나 물려받기 어렵던 사랑’은 이제 끝나도록 마음을 쏟고 싶은 마음이라고 할 만합니다.



까마귀들을 놀라게 하면 안 되니까 나무 꼭대기를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잎사귀들 사이로 작고 동그란 까마귀 머리들이 까닥거리는 것이 보입니다. (9쪽)


첫 번째 까마귀가 날아오르면 다른 까마귀들이 따라 날아오릅니다. 이때 나무들은 몸을 부르르 떨고 가지들은 흔들거리지요. (10쪽)



  리타 얄로넨 님이 글을 쓰고, 크리스티나 루이 님이 그림을 그린 어린이문학 《소녀와 까마귀나무》(박물관,2008)를 읽습니다. 책이름만 보아서는 소녀하고 까마귀나무가 도무지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알기 어려울 만합니다. 그런데 이 어린이문학 첫 쪽을 넘기니, 《소녀와 까마귀나무》에 나오는 ‘소녀’한테는 아버지가 없어요. 아버지가 사고로 일찍 죽었어요.



우리 보트를 닦을 때처럼 병든 나무도 깨끗이 씻어 주어야 하는데, 아무도 나무를 돌보지 않습니다. 나무를 씻어 주는 것은 비뿐이랍니다. (16쪽)


나는 벌써 많은 추억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앨범에 보트 사진들이 있는데,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우리 엄마도,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빠도요. (27쪽)



  어린이문학 《소녀와 까마귀나무》에 나오는 소녀는 ‘까마귀나무’를 무척 애틋하게 여깁니다. 나무 가운데 ‘까마귀나무’라는 나무가 있지는 않아요. 까마귀가 무척 많이 내려앉는 나무이기에 ‘까마귀나무’라 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 까마귀나무는 바로 ‘소녀네 아버지’가 소녀한테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알려준 나무예요. 두 사람(아버지와 아이)이 함께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마음속에 깊이 아로새겨진 나무입니다.



쉬는 시간이 되자, 티나, 키사 그리고 사라가 내게 와서 아빠가 돌아가시면 어떤 느낌이 드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슬프다고 대답했죠. 그러자 친구들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답니다. (37쪽)


학교에서 돌아오면, 저녁마다 아빠와 자전거를 탔기 때문에 지금도 무심결에 자전거를 준비하곤 합니다. 그러다가 곧 아빠가 계시지 않다는 걸 깨닫곤 합니다. (38쪽)



  어떤 사람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말아서 아버지하고 얽힌 이야기(추억)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버지가 아직 튼튼히 계시지만 아버지하고 말을 섞는 일이 드물거나 얼굴조차 거의 마주하지 않기에 서로 나눌 만한 이야기(추억)가 없어요.


  어떤 사람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어도 ‘아버지가 사는 동안’ 서로 나눈 이야기가 참으로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버지하고 한집에서 사는 데에도 막상 서로 마음을 열지 않아서 따사롭거나 너그럽거나 즐겁게 꽃피우는 이야기가 그야말로 없기도 합니다.


  삶이란 무엇일까요?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살림이란 무엇일까요?


  우리 집 아이들은 으레 “아버지 좋아요. 아버지 사랑해요.” 같은 말을 읊습니다. 나는 이제껏 우리 아버지한테 이런 말을 제대로 읊은 일이 없습니다. 어릴 적부터 가부장 사회에서 자란 터라 사내(아들)가 아버지한테 “아버지 좋아요. 아버지 사랑해요.” 같은 말을 하기는 어려웠다고 ‘핑계’를 댈 수 있을 테지요. 그야말로 핑계이지요. 가부장 사회가 단단하건 말건, 마음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어버이와 아이라면, 아이로서 어버이한테 “아버지 사랑해요”이든 “어머니 사랑해요”이든 얼마든지 말할 만해요. 가부장 사회나 권력이나 얼거리는 ‘이런 틀을 그대로 두라’고 그대로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얼마든지 가부장 사회나 권력이나 얼거리를 깨고 아름다운 삶자리가 일어서도록 바꿀 수 있어요.



엄마는 한 번도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이에서 자 본 적이 없어서 이해를 못 하시는 것 같습니다. (44쪽)



  어린이문학 《소녀와 까마귀나무》는 아주 차분하게 이야기를 잇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지만 씩씩하게 하루를 새로 맞이하면서 어머니하고 지낼 뿐 아니라 동무하고 지내는 소녀 이야기를 곰곰이 들려줍니다. 어린 가시내는 무엇을 하든 이곳에서는 이곳에서 함께 지내던 아버지가 떠오르고, 저곳에서는 저곳에서 함께 놀던 아버지가 떠오르지만, 그야말로 씩씩하지요. 그러나, 남모르게 눈물에 젖는 날도 많을 테고, 남이 알도록 눈물을 흘리는 날도 많을 테지요. 다만, 눈물에 젖든 눈물을 흘리든, 아버지하고 함께 지내고 놀고 어울리고 복닥이던 나날을 기쁜 사랑이라는 씨앗으로 가슴에 심습니다. 아이로서는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어머니로서는 짝꿍을 여의었어요. 아이는 어머니 마음까지 헤아리고, ‘까마귀나무’뿐 아니라 다른 여러 나무도 함께 헤아립니다. 어버이 한 사람이 곁을 떠나서 무척 슬플 텐데, 슬픔은 슬픔대로 맞아들이면서도 이 슬픔을 새로운 마음으로 다스려요.



나는 이 아주머니와 봉은 잊어버리고 병에 걸린 나무의 움푹 패인 곳을 만져 보았습니다. 어쩌면 나무도 만져 주는 것을 좋아하는지도 모릅니다. 나무 옆에 서 있으면 내 생각을 듣겠죠. (60쪽)



  아침에 우리 집 아이들은 아버지 손길을 받으면서 잠을 깹니다. 저녁에 우리 집 아이들은 아버지 손길을 받으면서 잠자리에 듭니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아이들을 보살피고, 아침저녁으로 아이들한테 밥을 차려 줍니다. 아침저녁으로 함께 책상맡에 앉아서 책도 읽고 공부도 해요. 아침저녁으로 집 안팎에서 함께 뛰고 달리면서 놀고요.


  나를 낳은 아버지한테 자주 찾아가지는 못하지만, 나를 낳은 아버지한테는 꼭 우리 아이들하고 함께 찾아갑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이녁 손자하고 스스럼없이 웃고 뛰놀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도 내 어릴 적에 우리 아버지하고 말을 거의 안 섞으며 살았다는 생각은 내려놓고, 오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자리에서 가만히 얼굴을 바라보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려고 합니다. 아이들은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을 즐겁게 받을 적에 참말 즐겁게 자라니까요. 그리고, 아이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랑도 기쁘게 받을 때에 그야말로 기쁘게 자라요.


  아이한테 아버지 자리란 ‘사랑자리’요 ‘꿈자리’입니다. 아이한테 어머니 자리도 ‘꿈자리’이고 ‘사랑자리’예요. 아버지와 어머니한테도 아이는 늘 ‘사랑자리’이면서 ‘꿈자리’일 테니까, 어버이랑 아이는 서로서로 ‘사랑꿈자리’이고 ‘꿈사랑자리’로 한집살이를 이루리라 봅니다. 4349.1.7.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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