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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 붉은 꽃잎 ㅣ 창비시선 81
송기원 지음 / 창비 / 1990년 2월
평점 :
품절
시를 노래하는 시 105
겨울밤에 버스를 기다리며 춤을 추다가
― 마음속 붉은 꽃잎
송기원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1990.2.10. 4000원
추운 날에는 춥다고 웅크리기만 하면 더욱 춥습니다. 그렇지만 춥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신나게 몸을 움직이면서 일하거나 놀면 추위를 잊어요. 춥기 때문에 일하기 어렵지 않고, 추운 탓에 놀기 어렵지 않아요. 추워서 못 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아무리 춥더라도 스스로 좋아할 뿐 아니라 사랑하는 일을 한다면 추위쯤 얼마든지 떨칠 만해요. 아무리 춥더라도 스스로 즐길 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하고 놀이를 한다면 추위 따위는 곧바로 사라질 만해요.
처음에는 노랫소리인 줄도 몰랐습니다. / 끊일 듯 말 듯 가냘픈 소리 하나가 / 다른 소리에 잇대어지고, 그렇게 / 또 다른 소리에 닿더니 (안개)
겨울 한복판에 아이들하고 읍내로 마실을 나간 뒤에 저녁 늦게 군내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들어가서 기다릴 데도 없습니다. 이십 분 남짓 한길에서 군내버스를 기다려야 합니다. 이동안 아이들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저기로 달리고, 이쪽에 있는 울타리에 매달리고, 이 걸상을 기어오르더니 저쪽으로 폴짝 뛰어내립니다.
아이들이 노는 양을 가만히 지켜봅니다. 아이들은 춥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오직 ‘놀이’ 한 가지를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 아이들한테 두툼한 겉옷을 입히려 하지 않아도 돼요. 아이들은 마음껏 몸을 움직이면서 땀을 냅니다. 아이들한테 두툼한 겉옷을 입히는 일은 나쁘지 않으나, 정작 어버이로서 아이들한테 할 ‘일’이란 아이들이 언제 어디에서나 신나게 뛰놀면서 온몸을 움직여서 땀을 내고 기쁘게 웃도록 북돋우는 한 가지로구나 하고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십 년을 넘어 사글셋방으로 전전하다가 / 서울에서도 동쪽 끄트머리 고덕으로 옮겨와 / 금년에는 빚도 좀 얻고 하여 겨우겨우 / 아파트 전세값 천만 원을 마련했습니다. / 아내는 아르바이트로 피아노를 가르치고 / 국민학교 4학년과 1학년짜리 두 딸년도 / 아무것이나 가리지 않고 잘 먹고 잘 자라서 (고덕에서)
송기원 님 시집 《마음속 붉은 꽃잎》(창작과비평사,1990)을 읽습니다. 판이 끊어진 지 한참 된 시집을 읽습니다. 해묵은 시집이라고도 할 만하지만, 1947년에 태어난 송기원 님 나이를 헤아리자면 1990년은 한창 ‘젊은’ 나이입니다. 스무 살에 대거나 서른 살에 대면 ‘안 젊은’ 나이일 테지만, 쉰 살이나 예순 살에 대면, 또 일흔 살에 대려고 하면 ‘젊은’ 나이예요. 책으로 치자면 1990년에 나온 시집은 2016년에 돌아보기에 스물여섯 해나 묵은 책입니다만, ‘시인 한 사람’이 마흔 살을 살짝 넘긴 나이에 쓴 이야기라는 대목을 생각한다면 묵거나 오래된 시집이 아니라, ‘어느 젊은 한때에 누린 삶이 깃든 목소리’가 흐르는 책이라고 할 만합니다.
갯벌, 물결, 섬, 갈매기 등이 작은 제목이었습니다. 그런 시라도 쓰지 않으면 정말이지 옆방의 늙은 여자보다도 제가 / 먼저 죽어버릴 것 같았습니다. (여수 앞바다)
나이가 마흔이 넘응께 / 이런 징헌 디도 정이 들어라우. / 열여덟살짜리 처녀가 / 남자가 뭔지도 몰르고 들어와 / 오매, 이십 년이 넘었구만이라우. (살붙이)
이제 일흔 줄 나이에 접어들 시인으로서는 1990년에 선보인 《마음속 붉은 꽃잎》에 흐르는 이야기 같은 삶을 마주하기에는 만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시집을 선보일 무렵 송기원 님은 섬마을이나 바닷마을이나 시골마을로 찾아가면서 그곳에서 ‘술과 몸을 파는 늙은 가시내’가 읊는 하소연을 고스란히 들으면서 함께 술자리를 했다고 합니다. 이 시집에는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고향마을’을 그리는 ‘술과 몸을 파는 늙은 가시내’ 목소리가 고스란히 흐릅니다. 술잔으로 눈물을 달래는 외롭고 아픈 우리 이웃들 숨결이 고스란히 흘러요.
시 한 줄에는 어떤 이야기를 담을 만할까요? 시 한 줄에는 어떤 노래를 엮을 만할까요? 우리 곁에는 어떤 이웃이 있을까요? 우리 둘레에는 어떤 동무가 있을까요?
전라도 땅끝 흙부뚜막에 / 된장 뚝배기 끓던 고향집을 / 나라고 차마 잊을 수야 있나요. / 자, 우리 나가요, / 빠다냄새 나는 돈으로 한잔 살 테니. / 어디 해장집 가서 소주병 까면서 / 이미자 노래나 오지게 불러요. (이미자 노래나)
찬바람이 싱싱 부는 겨울 저녁에 읍내 한쪽에서 아이들하고 춤을 춥니다. 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가방은 내려놓고서 가벼운 몸으로 두 아이하고 버스터 한쪽에서 신나게 땀을 흘립니다. 읍내 고등학생 아이들이 지나가건 말건, 시골 아지매가 지나가건 말건, 나는 두 아이만 바라보면서 ‘우리 마을로 돌아가는 버스’가 들어올 때까지 이마에 땀이 흐르도록 함께 춤을 춥니다. 아이들은 그저 ‘노는 마음’이 되고, 나는 ‘아이들하고 노는 마음’이 됩니다. 아이들도 다른 사람 눈치를 안 보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추위를 잊습니다. 나도 어른이나 어버이라는 옷을 벗고서 다른 사람 눈치가 아니라 내 삶을 헤아리면서 깔깔깔 웃으면서 춤을 춥니다. 이렇게 춤추는 동안 오늘이 겨울인지 여름인지 생각할 일이 없고, 오늘이 얼마나 춥거나 더운지 따질 일이 없습니다.
꽃값 오천 원으로 당신이 나를 사면 / 내 고향 들샘 복사꽃으로 나는 당신을 사요. (꽃값)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 붉은 꽃잎을 건사합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크거나 작거나 향긋하거나 밋밋하거나 새빨간 꽃잎을 건사합니다. 불길처럼 활활 타오르는구나 싶은 붉은 꽃잎이 흐드러지기도 하고, 차가운 겨울바람에 스러지면서 땅바닥에 뒹굴고 마는 바싹 마르고 마는 잎사귀이기도 한 꽃잎을 건사합니다.
해가 넘어가면서 십이월에서 일월로 접어드는 날인데, 마을 논둑에 봄까지꽃이 조그맣게 보랏빛 꽃송이를 살그마니 터뜨립니다. 마을 어귀 빨래터에도, 우리 집 뒤꼍하고 마당에도, 또 볕이 잘 드는 곳마다 앙증맞도록 작은 제비꽃이 봄까지꽃처럼 환한 보랏빛 꽃송이를 가만히 터뜨립니다.
꽃은 봄에도 피지만 겨울에도 핍니다. 꽃은 여름과 가을에도 곱게 피지만, 한겨울에도 씩씩하게 핍니다. 늙은 꽃이 있고 젊은 꽃이 있습니다. 고향을 떠난 씨앗 한 톨이 새로운 고장에서 야무지게 뿌리를 내리기도 합니다. 차마 고향을 떠나기 싫은 씨앗은 어미꽃 곁에 톡 떨어져서 함께 피어나려 하기도 합니다.
어머니, 당신이 손수 물 주어 기르신 앵두나무, 사과나무, 배나무는 이 봄에도 어김없이 꽃을 피웠습니다. (꽃 피는 봄날 1)
아이들이 이 겨울 한복판에 “씨앗 심고 싶어요!” 하고 외치면서 꽃삽을 들고 마당 한쪽에서 저희끼리 텃밭을 일굽니다. 이 어여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빙그레 웃음이 터지고, 이 살뜰한 몸짓을 찬찬히 지켜보다가 삶이란 시란 노래란 이야기란 이렇게 우리가 저마다 스스로 즐겁게 심는 씨앗처럼 곱게 뿌리를 내리고 환하게 떡잎이 돋아서 자라기를 꿈꿀 적에 태어나는구나 하고 새삼스레 알아차립니다. 4349.1.1.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시읽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