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자전거 삶노래 2015.12.24.
: 다시 길어지는 저녁
동짓날이 지난다. 동짓날까지 해가 얼마나 더 짧아져서 저녁이 얼마나 짧은가를 보여주더니, 동짓날이 지나고부터 살갗으로 느낄 수 있을 만큼 저녁이 천천히 길어진다. 도시에서 살 적에도 절기를 헤아리면서 해님 길이를 보았다. 시골에서 사는 동안 언제나 해님하고 바람을 살핀다. 섣달은 이제 막 들어서는 겨울이라 하지만, 나는 어릴 적부터 동짓날이 지나면 비로소 겨울이 저물려 하는구나 하고 느낀다. 대한이랑 소한도 있지만 대한이랑 소한 같은 절기는 겨울이 막바지에 이르러 용틀임을 하는 날씨라고 느낀다.
성탄절을 맞이해서 내가 아이들하고 곁님한테 ‘산타’가 되기로 하고 면소재지 가게로 자전거를 달리기로 한다. 두 아이더러 ‘바라는 한 가지’를 말하라 하니, 큰아이는 ‘콜라!’를 노래하고 작은아이는 ‘맥주!’를 노래한다. 응? 네가 맥주를 마시겠다고? 이달 들어 12월 7일 아버지 생일에만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안 마셨는데 모처럼 한 병을 사 볼까?
동짓날을 지났기에 해는 살짝 길어졌지만 그냥 살짝 길어졌을 뿐 겨울은 틀림없이 겨울이다. 가방을 메고 자전거를 끌고 마을을 벗어나서 논둑길을 달리다가 문득 ‘어라, 장갑을 안 끼고 나왔네’ 하고 알아차린다. 그만큼 고흥 저녁 날씨가 폭하다는 뜻이다. 바람이 제법 불기는 하지만 맨손에 반바지로 자전거를 달린다. 자전거를 달리기에는 반바지 차림이 페달이나 체인에 옷이 안 끼이니 좋기도 하고, 아주 추운 날이 아니라면 자전거를 달리며 땀이 솔솔 피어나기 때문에 반바지 차림이 한결 낫기도 하다.
해 떨어진 겨울에 논둑길을 천천히 달리면서 노래한다. 올 구월에 이 논둑길을 아이들하고 자전거로 달리다가 미끄러져서 무릎하고 팔꿈치가 아주 크게 다쳤다. 그 뒤로 이 논둑길을 자전거로 달릴 엄두를 한동안 못 냈다. 겨울이기에 논둑에 미끄러울 만한 것이 없다고 할 수 있기에 논둑길을 달리는데, 고작 석 달 앞서만 해도 서거나 걷지 못하면서 방바닥을 기어다니던 일이 아스라하다. 자전거 사고가 난 뒤 한 달 남짓 기어다니기만 했는데 석 달이 채 안 되어 무릎이 말끔하게 나았다. 팔꿈치는 아직 덜 나았지만 짐을 들거나 일을 하면서 아프거나 어렵지 않다.
겨울 달빛과 별빛을 받으면서 논둑길을 천천히 달리면서 생각한다. 자전거를 달릴 적뿐 아니라 여느 때에도 늘 노래를 부르고 노랫결을 고스란히 두 손길에 담아서 밥을 짓고 살림을 꾸릴 수 있으면 아픈 데도 고단한 데도 없으리라 느낀다. 스스로 노래하기에 스스로 튼튼한 몸이 되고, 스스로 노래하지 않기에 스스로 안 튼튼한 몸으로 바뀌지 싶다.
가방 가득 성탄절 주전부리를 장만해서 집으로 돌아간다. 시골 찻길은 저녁에 자동차가 더욱 없어서 훨씬 깜깜하고, 시골 논둑길은 저녁에 찻길보다 더더욱 깜깜하다. 그러나 이렇게 깜깜한 길이기에 밤눈을 밝혀서 한결 느긋하게 잘 달릴 수 있다. 깜깜한 길이기에 자전거로 논둑길을 달리면서 달이며 별을 마음껏 올려다볼 수 있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얼굴로 맞아들이면서도 등짝에는 땀이 솟아 후끈후끈하다. 언제나 기쁜 하루이다. 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자전거와 함께 살기)